요셉과 필리프의 협상

잔이 푸아티에에서 처녀성 검사와 청문회를 하고 있을 무렵.
요셉은 아침 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계획을 모든 장교들 앞에서 털어 놓았다.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첫째는, 그런다고 해도 부르고뉴 군이 물러나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
둘째는 당연히도 요셉의 말대로 해보자는 의견이었다.
회의는 오후가 될 때까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찬반토론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라한의 말이었다.
"제 아들이라 하는 말이 아니고, 요셉은 오를레앙 구원군에 있을 당시 성공적으로 적을 기만해 보급품을 안전하게 성 안으로 들였습니다. 비록 스콰이어지만 대포를 개량하기도 하는 등 큰 공을 세우기도 했고요. 한 번 믿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많은 전장에서 공을 세운 라한의 말을 그 누구도 반박 할 수 없었다.
애당초 생 세베르와 테오돌트도 요셉의 편이었으니.
장 드 뒤누아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요셉이 직접 시민단을 이끌고 적 진영으로 향하는 거요."
요셉은 뒤누아의 말에 놀랐다.
물론 자신이 제안한 전략이긴 했지만 덜컥 맡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뒤누아의 말에 요셉과 라한의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
요셉이 단단한 눈빛으로 외쳤다.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이것만 성공하면 그토록 염원하던 기사가 될 수도 있다.
한 명의 기사로 군대를 이끌고, 비교적 자유롭게 잔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
그렇게 해서, 요셉은 지금 시민단 대표와 함께 적 진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백색의 배너를 들고 맨 앞에서 말을 탄 요셉의 모습은 늠름하기 그지 없었다.
적 진영에 도착한 요셉은 날카로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럼에도 요셉은 기가 죽는 일이 없었다.
백기를 들고 온 적을 죽이는 극악무도함은 없었으므로, 요셉은 적 진영 한복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서 요셉은 부르고뉴 군 필리프 3세를 만났다.
"부르고뉴 공작을 뵙습니다. 저는 기사 라한 드 플레옹의 스콰이어, 요셉 드 플레옹이라 합니다."
필리프는 고압적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요셉은 퍽 오만한 자라 생각했지만,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이 고압적인 태도도 협상 내용에 따라 뒤바뀌게 될 것이 뻔했으니까.
"스콰이어라. 프랑스군은 패배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건가? 나는 오를레앙 성 수비대장이 직접 올 거라 생각했는데."
꽤나 고압적인 분위기였지만, 요셉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수비대장께서는 샤를 도를레앙 공(*프랑스 왕국 3대 오를레앙 공작) 대신 성의 세금을 걷는 일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세금을?"
"그 전에 좀 앉아도 될까요? 언제까지 세워두실 생각이신지."
필리프는 헛웃음을 켰다.
피코켓을 벗으니 영락없는 어린 아이가 따로 없었는데, 말 하는 것이 퍽 당돌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 항복을 전하러 온 전령을 세워 둬서는 안 될 일이지. 어디 한쪽 무릎이라도 꿇지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권하지 않으시니 제가 직접 앉겠습니다."
요셉은 의자를 끌어와 필리프의 앞에 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원목 탁자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허! 이리도 당돌한 데가."
"그런 소리 좀 듣습니다. 항복은 항복이나, 협상이 먼저기에 아직 무릎을 꿇을 수는 없습니다."
필리프는 왼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적 진영에 무기 하나 차지 않고 들어왔다.
뒤에는 싸울 능력이라곤 없는 시민단.
당장에 생포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이 어린 놈은 뭐가 이리 당당한 거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이런 자가 병사들을 이끈다면 과연 어떨까?
왜 이런 유능한 장수가 다 멸망해 가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인지 필리프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어떤 협상거리를 가지고 왔나?"
요셉은 쉬이 협상안을 말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먼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을 타고 오느라 목이 좀 마른데. 물이라도 안 내어 주십니까?"
기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오를레앙은 굳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어차피 필리프는 오를레앙을 점령하는 일이 요원하다 여기는 인물.
요셉은 자신이 가져온 파격적인 협상안을 믿었다.
이권에 관심이 있는 필리프라면 분명 수락할 만한 내용이었다.
"하! 뭘 탔을지 알고?"
"돈이라도 받으려면 절 죽이진 않으시겠죠. 아. 물 가져오는 김에 청어도 좀 주시면 좋겠는데요. 오를레앙 성에는 보급품이 끊겨서요. 배가 고픕니다."
요셉은 은근히 오를레앙 성의 어려움을 내포하는 말을 내뱉었다.
곧 잔다르크가 구원물자를 가지고 들어올 테지만.
필리프가 탁자를 연신 내리치며 박장대소 했다.
"으하하하!! 여봐라! 여기 항복하러 온 장수에게 물과 음식을 내어주어라. 아, 청어는 요기할 정도만. 이건 이해해 주시게. 병사들 먹일 물량이 부족해서."
"대접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필리프는 요셉이 퍽 마음에 들었다.
기개.
용기.
자신이 가진 카드를 믿는 자신감.
그 모든 것이 자만이 아니어야만 할 텐데.
곧이어 물과 청어 조금이 나왔다.
요셉은 필리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물과 청어를 모두 먹어 치웠다.
"이 놈 눈빛이 아주 요상하구나."
"제가요?"
"나이에 맞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에 참전했느냐?"
필리프가 비아냥댔다.
"고귀하신 귀족 나으리들께서 백 년이나 가까이 전쟁을 벌이셨으니 태어날 때부터 전쟁의 화마 속에서 컸지요."
요셉 또한 비아냥 댔다.
"모두가 너 같진 않을 텐데."
"모두가 더이상의 전쟁을 바라지 않죠."
요셉은 한 마디 지고 들어가는 것이 없었다.
필리프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는 깨끗이 비운 접시를 물렸다.
그리고 물었다.
"이제 너에 대해 잘 알았으니 네가 가진 카드를 꺼내 보아라. 뭘 협상할 생각이지?"
요셉이 말했다.
"오를레앙 성입니다."
필리프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항복이라는 뜻인가?
"더 정확하게는 뒤누아 공이 모으는 오를레앙 성의 세금입니다. 그리고 남부로 진출할 발판까지."
"원하는 것이 있을 텐데?"
"모든 국민과 양쪽 병사들이 원하는 것이죠. 평화. 오를레앙 성은 더이상 버티기 어렵습니다. 잉글랜드 군의 군화에 짓밟히기 전에 필리프 공께 기회를 드리려는 것입니다."
"기회라?"
"세금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샤를 도를레앙 공을 풀어주시는 조건으로 드리고요. 필리프 공께서는 피를 흘리지 않고 오를레앙 성으로 들어와 프랑스 남부로 향하는 길을 여실 겁니다. 그게 저희의 조건입니다."
필리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좋은 협상안이다.
안 그래도 필리프는 지지부진 시간만 흐르는 오를레앙 공방전을 그만 두고 싶었다.
투렐 요새는 어찌저찌 함락했지만 오를레앙 성은 차마 점령할 수 없었다.
이럴 때 무혈입성에 프랑스 남부로 향하는 발판까지 마련해준다?
거기다가 세금의 절반까지.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요셉은 생각했다.
'필리프는 자신만의 왕국을 세운 인물이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부르고뉴 왕국을 꽤나 크게 키울 인물. 역사가 그러하니, 그의 성정 또한 이권에 집착하겠지. 그 점을 노리면 오히려 쉬운 일이다.'
실제로 필리프는 이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안 그래도 요즘 잉글랜드 군과 사이가 소원해지던 참이었는데.
몰래 세금의 절반을 받고 오를레앙에 입성한다면 잉글랜드 보다 더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오를레앙 성을 미끼로 부르주의 왕 샤를과 협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필리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돌아가 기다리거라. 베드퍼드 공작과 이야기 해보겠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요셉은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보였다.
기사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었지만, 요셉은 현대인.
목적을 위해 자신의 자존심 정도는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었다.
그 편이 적을 속이기에도 더 효과적이고.
"오를레앙 입성을 축하드립니다. 오를레앙 수비대는 부르고뉴 공작께 항복을 선언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필리프는 방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용기와는 다르게 무릎을 꿇는 요셉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 마디 지려고 들지 않았던 어린 기사가 무릎을 꿇으니 그 효과가 배가 되었다.
"너, 내 밑에 들어올 생각 없느냐?"
"...돌아가서 플레옹 경께 의논해보겠습니다."
"하하하! 마음에 들었다! 돌아가서 기다리거라!"
요셉은 일어나 필리프의 천막을 빠져나갔다.
말에 올라 오를레앙 성으로 돌아가며, 요셉은 이를 부득 갈았다.
'필리프. 네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너희는 절대로 오를레앙 성에 발조차 들일 수 없다.'
요셉의 그런 마음을 모르는 필리프는 파리로 달려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
선량공 필리프는 곧바로 파리로 달려가 베드퍼드 공작 존을 만났다.
오를레앙 성에서 항복 의사를 전해왔다며, 세금의 절반을 샤를 도를레앙 공작을 풀어주는데 지불하겠다는 말까지 전했다.
나머지 세금 절반을 주겠다는 말은 쏙 뺐다.
베드퍼드 공작은 필리프의 말에도 그닥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를레앙이 곧 점령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투렐 요새도 빼앗았고, 프랑스 군과는 연전연승을 기록하고 있었으니 베드퍼드 입장에서는 퍽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오를레앙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비보를 부르주의 반군왕에게 전해야 그들이 비로소 전의를 상실 할 테니까.
무엇보다도, 베드퍼드는 오를레앙을 필리프에게 넘기기 싫었다.
점령 한다면 잉글랜드 군이 점령하는 게 더 낫지, 부르고뉴 군이 점령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필리프는 별 소득 없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날, 필리프는 군사를 일으켜 철수를 준비했다.
떠 먹여 주는데도 받아 먹지 않고 제 의견을 묵살하기만 하는 베드퍼드와는 단 한 순간도 함께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필리프는 철수를 준비하며 오를레앙 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말 안타깝구나. 요셉이라는 자. 어떻게든 포섭하고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미리 잡아둘 걸. 아, 그 녀석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런 협상안을 걸었던 것인가? 생각하면 할 수록 기이하다. 오를레앙 성을 가지진 못하더라도 그 자를 가질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필리프는 밀려드는 후회를 속으로 씹어 삼켰다.
퍽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역사는 그대로 흘러갔지만, 뒤누아의 두려움은 역사와는 다르게 일찍이 사라졌다.
역사를 뒤틀려는 요셉의 전략이 먹힌 것이었다.
1429년, 4월 17일.
오를레앙 성 주변을 점령하고 있던 부르고뉴 군은 야음을 틈타 전장을 이탈했다.
잔다르크가 오를레앙 성으로 출발한 바로 그 날이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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