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앞장 서겠다!!!
1429년 5월 6일 아침.
원래라면 생 앙투안 섬의 바스티드 공략은 이 날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생 루 요새 점령 후 잉글랜드 군 진영 토벌의 쾌거.
이미 뒤바뀐 역사 때문에 잔의 생 앙투안 섬 바스티드 공략도 하루가 밀린 5월 7일 아침이었다.
날짜가 바뀌었다고 별 일은 없겠지.
요셉은 로아반과 밤을 꼴딱 세워 주퇴복좌기를 연구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원 역사대로 오를레앙은 잔이 구할 것이고.
자신은 이 트라우마를 얼른 지워서 전장에서 잔을 도와야만 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여전히 힘든 일이겠지만,
생각을 고쳐먹으면 되는 일이다.
직접 죽이지 않아도 피가 낭자한 현장을 잔다르크는 잘도 누비고 다녔으니까.
잔도 저리 용맹하게 싸우는데.
하물며 나이도 많은 나라고 못할 쏘냐.
주퇴복좌기의 단점을 개량하고 나면 자신도 투렐 요새 공략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요셉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면, 잔은 오를레앙 동문 앞에서 깃발을 들고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병대와 병사들, 그리고 잔을 따르는 기사들이 밀집해 있었다.
하지만,
"절대 안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사는데 출정이라니!"
라울이 성문을 막고 섰다.
"라울! 뒤누아 공의 출정 명령이다! 당장 비켜라!"
"내 아들이 다쳤소!"
라울의 외침에 병사들이 주춤거렸다.
"생 루 요새 공격에서 민병대로 출정했던 내 아들이 다쳤소. 일전에는 저 잉글랜드 군들에게 내 첫째 아들이 죽었지. 나는 두 번이나 아들을 잃을 뻔 했소. 당신들도 죽기는 싫을 거 아니요? 여기 죽고 싶은 사람 있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들 전쟁의 피해를 온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기고 있다고는 해도 전장에서 죽는 사람은 존재하는 법이다.
그게 내가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라울의 말은 병사들의 사기를 꺾었다.
애써 뒤로 밀어 두었던 두려움이 그들 사이에서 짙게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저들은 알아서 물러 갈 텐데! 왜 죽으러 가는 거냐고!"
뒤누아의 두려움은 해결한 요셉이었지만, 라울의 두려움은 해결하지 못했다.
애당초 요셉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에서 내린 잔이 라울에게로 다가갔다.
"왜 죽을 것만 생각하십니까?"
"죽으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오."
"이기러 가는 길입니다."
"이긴다고 죽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소!"
이기적이었다.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모든 사람의 다짐을 죽이고 있었다.
잔이 외쳤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잉글랜드 군의 칼날에 맞아 죽는 프랑스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가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을 수 있잖소! 그리고 이길 거라는 보장이 있소이까? 질 수도 있는 것 아니오? 생 앙투안 섬은 배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 성벽에서 불화살을 쏜다면 수많은 선박이 불길에 휩싸이고 많은 사람들이 강물에 휩쓸려 죽을 것이오. 싸움 한 번 못해보고 죽을 수도 있다고!"
라울의 꽉 쥔 주먹이 떨렸다.
다시는, 다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시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시체를 처리했다.
그 중에는 자신의 첫째 아들도 있었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시민도 있었으며, 오다가다 마주쳤던 어린 아이, 누군가의 남편도 있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오를레앙은 무사할 수 있는데.
저 잉글랜드 군들도 배가 고프면 물러갈 수 있는데.
왜 먼저 튀어 나가 죽음을 자처하는 것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잔이 말했다.
"이기고 오겠습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니 어떻게든 될 겁니다."
무책임했다.
가장 신뢰가 가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무책임했다.
그럼 왜 그동안은 주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셨지?
왜 내 아들은 죽어야만 했던 거지?
"···아무도 죽지 않고 이기고 돌아올 수 있소?"
"그건 장담하지 못하지만···."
"거 봐! 누군가는 죽어야 하잖아!"
"죽기 위해 모였습니다!"
잔이 버럭 소리를 쳤다.
"농기구를 들고, 철퇴를 들고 오를레앙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민병대도. 왕의 부름을 받고 오를레앙으로 파견 온 군인들도 전부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입니다. 저 또한 검 하나 휘두르지 못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선봉에 섭니다."
라울은 고개를 들어 민병대원들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훑어보기 시작했다.
죽음을 각오했다.
어리석었다.
도대체 누가 죽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 깔린 의지는 확실했다.
누군가는 두려움에 손을 떨고 있었음에도 무기를 놓지 않았고, 또 누군가는 두려움을 애써 잊으려 동료들과 함께 장난을 치고 있었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 나간다.
이 모든 건 프랑스를 위해서.
하루라도 더 빨리 평화로운 세상을 제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서.
라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첫째 아들도 그러했을까?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을까?
지금은 다쳐 수도원에 입원해 있는 자신의 둘째 아들도?
무너져 내린 라울을 향해 잔도 함께 무릎을 꿇었다.
따스하게 그의 어깨를 감싸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첫째 아드님도 죽음을 각오하셨을 겁니다. 지금쯤은 주님의 곁에서 이 오를레앙을 내려다 보고 계시겠죠. 그런 아들의 희생까지 헛되이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아···. 나, 나는······."
잔은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소리쳤다.
"죽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버리지 않는다.
그 말만큼 든든한 말이 없었다.
게다가 생 루 요새를 성공적으로 함락시키고, 선두에서 다친 곳 하나 없이 살아 돌아온 기적의 성녀가 한 말이 아닌가.
모두의 얼굴에 떠 있던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의지만이 활활 불타올랐다.
"내가 앞장 서겠다!! 주님의 말씀 아래 은총 있으라!! 결국 저 비열한 잉글랜드 놈들은 물러가고, 이 나라가 주님의 손 안에 다시 세워질 것이다!!!"
폭발과도 같은 함성 소리가 오를레앙의 두꺼운 동문을 진동케했다.
결국, 라울은 성문을 열었다.
잔과 라 이르, 질 드 레가 이끄는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하나의 목적 아래 모인 민병대원들이 일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생 앙투안 섬의 바스티드.
잔이 용맹한 장수처럼 말을 달렸다.
***
"좀 쉬시지요. 플레옹 경."
꾸벅꾸벅 졸고 있던 요셉을 깨우며, 로아반이 씨익 웃어 보였다.
퍼뜩 잠에서 깬 요셉은 종이 위에 잘못 그려진 긴 선을 보고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으그그극!!"
"밤을 꼴딱 세우셨으니 피곤할 만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대규모 전투까지 치르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자면 또 악몽을 꿀 것 같아서요."
"적의 기사를 제압하셨다 들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십니다."
요셉은 멋쩍게 웃었다.
사람을 죽인 것이 칭송받을만큼 전장은 참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로아반은 뜨겁게 달군 철을 철집게로 돌돌 꼬았다.
"저도 엄밀히 말하면 살인자와 다름이 없지요."
"네?"
"사람을 죽이는 무기들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매일 같이 기도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죄는 죄니까요."
대장장이들이 철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도 들려왔다.
"그래도 성녀님이 오시고 나서는 조금 편합니다. 주님의 계시를 받으신 분이라니. 무엇을 고백해도 다 용서 받는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확실히 잔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기사도를 자처하는 기사들이 잔에게 매료되었을 리가 없다.
"잔은 그런 사람이죠."
"어릴 때부터 친구이셨다면서요?"
"네."
"어릴 때의 성녀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요셉은 마치 어제 겪었던 일처럼 생생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었다.
온 몸에 흙을 묻히고서도 헤헤 하고 웃던 잔을.
마을의 불량배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던 잔을.
미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코를 골며 자던 잔을.
교회는 가기 싫어하면서도 자기와 놀고 싶다며 온 마을을 쏘다니던 잔을.
흐뭇한 미소 안에 요셉과 잔의 추억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듣지 않아도 알겠네요. 분명 좋은 분이셨을 것 같습니다."
"말괄량이였죠. 그래서 더 좋아했고요."
"하하. 그 용맹하신 성녀님께서 말괄량이였다니. 오히려 더 사람 같습니다."
"로아반."
"예?"
"로아반은 어쩌다 대포 기술공이 되었습니까?"
열심히 두드려 가느다랗게 만든 철사 비스무리 한 것을 열심히 꼬던 로아반은 용수철의 넓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만들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실패하고 다시 녹이고 만드는 것이 여러 개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뭐, 먹고 살자고 시작했지요."
"그랬겠네요."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 거기에 대해서 좀 더 좋은 말은 있지만···."
말을 줄이는 로아반을 쳐다본 요셉은 고개를 갸웃했다.
로아반이 뻐근한 허리를 펴며 일어난 탓이었다.
"플레옹 경. 잠시 저와 어디 좀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네? 어디를요?"
"잠시면 됩니다. 조금 쉬기도 할 겸."
대장간을 빠져 나온 로아반과 요셉은 오를레앙 성곽을 향해 올라갔다.
성곽 사이사이마다 나무 방패가 세워져 있었다.
그간의 공성전을 상기라도 시키듯, 나무 방패에는 불에 그을린 자국과 표적지마냥 무수히 많은 화살이 박혀 있기도 했다.
성곽에 세워진 대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걷던 로아반은 요셉을 향해 말했다.
"왜 대포 기술공이 되었냐고 물으셨죠?"
로아반은 청동제 대포의 포신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이것들이 참 밉더군요."
미워?
대포가?
"분명 성을 부술 수 있는 화끈하고 멋있는 무기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양날의 검과도 같은 놈입니다. 넣은 장약이 터져 죽는 포병들도 있고, 반동에 밀린 포신에 깔려 죽는 포병들도 있었습니다. 적들을 응징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포가 아군을 죽인다니. 정말 밉지 않겠습니까?"
로아반은 아들이 있었다.
오를레앙 공방전이 벌어지기 전에 민병대에 차출되었다.
대포를 다루는 포병의 교육을 받았는데. 적과 싸우다가 반동에 밀려 떨어진 포신에 깔려 죽었다.
그때부터 로아반은 대포를 개량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수많은 연구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포신의 반동을 제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장약을 넣는 곳의 내구성을 높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들과도 같은 병사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을까. 그게 제가 대포를 만들게 된 이유입니다."
멋있었다.
자신은 그저 잔다르크를 지키기 위해 기사라는 삶을 선택한 것 뿐인데.
오로지 잔의 옆에 서서 전쟁을 함께 하기 위해 기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로아반은 지키기 위해 적을 죽이는 대포를 만들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어이없는 죽음을 막기 위해 대포의 개량에 몰두했다.
"플레옹 경께서 처음 주퇴복좌기의 청사진을 주셨을 때 생각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구나. 내가 알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그래서 더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플레옹 경도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기사입니다. 플레옹 경께서 적의 수장을 일격에 죽이셨기 때문에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 집들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생 루 요새에서 살아 돌아온 자식들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저게 다 플레옹 경과 같은 기사분들과 병사 분들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요셉은 로아반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들.
조금은 안도한 표정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저들의 미소는 플레옹 경께서 지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도 그런 기술공이 될 생각입니다. 주퇴복좌기에서 튀어오르는 용수철에 맞아 죽는 병사들이 없도록. 더 이상 아군의 장약에 희생되는 아군이 없도록. 제가 이를 악물고 이 단점을 보완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너무 자신을 갈아 넣는 것처럼 보여서 한 말씀 드린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플레옹 경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 저를 믿어주세요. 저도 플레옹 경처럼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대포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좀 쉬세요. 이렇게 밤 새서 일할 정도로 자신을 갈아 넣지 않으셔도 됩니다."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까지 요셉은 너무 한 가지 사실에만 몰두했었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하지만 조금만 더 시선을 돌려보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만약 요셉이 허드슨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무수히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 것이다.
그걸 초장에 제압한 요셉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영웅이자, 진정한 기사였다.
그동안 자신은 기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왔는데.
그 누구보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기사라고 생각해주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감사합니다."
요셉은 저 멀리 대포를 가지고 훈련을 하고 있는 포병들을 바라보았다.
장약을 운반하는 훈련.
발사각을 설정하는 훈련.
돌 공을 나르는 훈련.
분주하게도 돌아다녔다.
로아반이라면.
그라면 분명 성공할 것도 같았다.
안전한 주퇴복좌기를.
내구성의 단점을 보완한 주퇴복좌기를.
그때.
"······?"
요셉은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요컨대 용수철이 제멋대로 튀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지금의 주퇴복좌기는 용수철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 있어 조금만 궤도가 틀어져도 버티지 못하고 튀어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수많은 용수철을 달아 놓았지만 포신이 조금만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어마어마한 탄성을 가진 용수철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아군을 치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다시 끼워 넣기도 불가능했고.
반동은 잡았지만 내구성과 안전성을 잡지 못한 것이 지금의 한계.
그렇다면 튀지 않게만 하면 되는 거잖아?
요셉은 21세기의 침대를 떠올렸다.
수많은 용수철이 있음에도 침대는 위험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방이 막혀 있으니까.
"로아반?"
"예?"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당장 만들어 보자.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공지에 요셉이 만든 주퇴복좌기에 대한 내용을 올려 이해하시기 편하게 해보겠습니다.
자세한 건 공지를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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