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촛불 하나가 불을 밝히고 있는 어두운 방, 주의가 미치지 않는 곳에 그림자가 깔려 있다.
'휘이잉.'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본다.
창문을 열어 놓았던 건지 의아하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책상 앞에 집중한다.
촛불을 따라 그림자가 흔들린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목덜미를, 그림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 자취를 따라 남자의 목이
떨어졌다.
책상에 놓인 편지지 위로 빨간 액체가 번졌다.
미약한 바람과 함께 촛불이 꺼졌다.
그 광경을 뒤로 하고 그림자가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림자가 창문을 넘어가려는 때에,
퍽!
다른 그림자가 방 안으로 그림자를 밀치고 들어왔다.
몇 개의 그림자가 더 따라 들어왔다.
밀도가 높아진 방 안에 그림자 여럿이 하나의 그림자를 둘러쌌다.
그리고 그림자들 속에서 검은 형태가 융기하며 봉긋한 형태를 갖췄다.
가운데 그림자가 당황한 듯 일렁였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그 틈이 벌어졌다.
하지만 다른 그림자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림자들이 자신의 일부를 채찍처럼 휘둘렀고,
'캉, 캉'
그림자는 그것을 급하게 받아쳤다.
금속의 파열음과 함께 작은 불꽃들이 일어났다.
숨쉬기조차 어려운 난전.
두 눈은 궤적을 따라가기 바빴다.
몇 차례의 공방이 더 이어졌고 그 사이로,
'슉',
달빛을 받아 번뜩인 단도가, 가운데 그림자를 스쳐 지나갔다.
단도를 가까스로 피한 그림자는 단숨에 달려 나가,
단도를 던진 그림자를 찔렀다.
그림자 사이로 검붉은 액체가 왈칵- 터져 나왔고,
하나의 전신이 그림자에서 나와 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노리는 일격을 '캉' 받아 넘겼다.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들과 간격을 벌렸다.
대여섯의 그림자가 더 남아있었다.
잠깐의 정적.
긴장감이 고조된 순간, 그림자들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협공했다.
하지만 여유를 되찾은 그림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수축해 공격들을 회피했다.
이어진 공격들도 그림자에게는 닿지 못했다.
그림자의 속도를 다른 어떤 그림자도 따라가지 못했다.
속도를 낸 그림자는 그대로 적들을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베어 넘겼다.
적들도 같은 입장이었기에 배려 따윈 없었다.
어느새 남은 적은 하나.
그림자가 쥐고 있던 다른 그림자의 경동맥 부분을 베면서 입을 열었다.
"누구지? 누가 시킨 거지?"
그림자가 마지막 남은 적을 노려보면서 물었다.
그 물음에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상대가 대답했다.
"아무도."
매뉴얼적인 답변이었다. 암살자에게 그 명령자를 묻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었다.
그들의 목숨은 명령자의 이름보다도 무가치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국 내의 암살 조직은 하나 뿐이었고,
타국에서 보낸 것이 아닌 이상 그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집사장 아니면 원로들··· 원탁의 결정인가?"
그림자의 벌어진 틈 사이로, 분노가 새어나왔다.
밤보다도 어두운 그림자가 마지막 목격자에게로 스멀스멀··· 다가갔다.
"네까짓 거에 원탁이? 꿈도 크시구만. 그깟 칼 좀 잘 놀린다고···
마지막 목격자의 치기 어린 저항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림자가 그를 단숨에 삼켰다.
그의 소화되지 못한 시신이 그림자의 뒤를 뒹굴었다.
은은히 비추던 달빛마저 구름에 먹혀버리고,
완연한 어둠 속에서 그림자는 어두운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누가··· 도대체 왜?
아니, 무슨 이유로···.
복잡해진 머릿속, 자신이 몸 바친 조직에 버림받았다는 배신감 위로,
막연한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곧이어,
'휘잉.'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자, 그는 정신을 차렸다.
냉정해져야 했다.
또 다른 암살자들이 그를 찾아올 수 있었다.
일단 현장을 벗어나야 했다.
그림자는 이전보다도 힘을 주어 단숨에 창문을 넘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방해 받지 않았다.
그림자가 빠져나온 방엔, 참혹한 편지지가 남겨졌다.
* * *
그림자가 올록볼록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밤거리를 내달렸다.
거리 양쪽을 어지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그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림자는 왕성으로 향하였다.
몇몇 그림자들이 그를 뒤쫓았지만,
그에게 닿지 못하고 뒤로 멀어졌다.
왕성에 다다른 뒤,
그림자는 암살대 숙사를 찾았다.
왕성 뒤편, 성벽 바로 바깥에 위치한 낮고 허름한 건물이었다.
수풀로 둘러싸여 밤에는 그 존재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림자는 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그를 찾으러 나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임무 때문인지,
숙사의 복도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그림자는 침착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그 형체를 옮겼다.
이윽고 그림자는 어떤 방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융기하여 사람의 형체를 형성하였다.
그림자를 벗으며, 소년이 나타났다.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앳된 모습이 채 가시지 않은 소년이었다.
소년이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한 남자가 등을 진 채로 문서들을 살피고 있었다.
등을 보인 채로 남자가 질문을 던졌다.
"여긴 무슨 볼일이지, 이반(Ivan)?"
등이 빤히 보였음에도 함부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왜 제가 타깃이 된 거죠? 누구의 명령입니까?"
이반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남자가 등을 돌리며 반문하였다.
그의 목소리에 권위가 느껴졌다.
"시치미 떼지 마시죠. 여기 대장을 통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이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는 너야 말로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 무슨 자신감인지 배짱 한 번 두둑하군.”
암살대 대장의 비아냥에,
"말하십시오. 그러면 서로 피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반이 강하게 맞섰다.
그러자, 대장이 이반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코웃음 쳤다.
"흥! 말은 그렇게 해도 자신이 피 흘리는 건 상상하지 못하겠지.
그야 대단하신 이반 님이시니까···.
그 유명한 미검 아르만(Arman)도 너에겐 못 당하겠지."
이반은 침묵하였다.
"네가 아무리 구해봤자 여기선 원하는 답을 찾진 못할 거다.
나도 명령을 받는 입장이지 그걸 따지는 입장은 아니거든."
"그만 가 봐. 애꿎은 내 병사들 축내지 말고."
대장이 손을 휘저으며 이반을 내쫓았다.
하지만 이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명령서를 보여주십시오."
이반이 손을 펼쳐 보이며 요구했다.
"글은 읽을 줄 아나? 그렇다면 그 눈으로 직접 보시든지!"
대장이 책상 위 문서 하나를 집어 들고 이반에게 건넸다.
이반은 대장을 경계하면서 문서를 낚아챘다.
그리고 문서를 열어보았다.
* *
[암살 명령]
암살대 A조 이반의 암살을 명령한다.
* *
그게 전부였다. 대장이 문서를 순순히 보여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 봤나?"
대장이 문서를 다시 달라며 손짓했다.
"너야 직접 명령서를 본 적이 없어서 몰랐겠지만 대개 이런 식이야.
우리는 그냥 명령을 수행하면 될 뿐이지."
큰 기대를 품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대가 무너진 건 타격이 있었다.
이반은 멍한 표정을 하고 대장에게 다시 문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쉬움을 삼키고 돌아섰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런 그의 뒤로, '쉬익' 바람을 가르며 대장이 팔을 휘둘렀다.
이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여 대장의 공격을 피했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문틀에 박혔다.
아찔했다. 분명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가도 된다고 했었나?"
대장이 이반을 노려보며 말했다.
'칫.'
이반은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대장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캉!'
그 앞을 대장의 건틀릿이 막았다.
"그렇게 뻔하게 목을 노린다고?"
'우직.'
대장이 박힌 단검을 뽑으며 재차 휘둘렀다.
그리고 그를 피한 이반이 뒤로 물러서며 간격을 벌렸다.
이반은 주변을 살폈다.
그림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복도 좌우가 금세 막혔고 전방의 대장도 그를 노리고 있었다.
퇴로가 없는 상황.
하지만 여기서 발이 묶일 수는 없었다.
군소리 없이 생을 단념하는 것 또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반은 그림자 속으로 침잠했다.
모두의 시선 속, 준비 동작을 하는 듯
그림자가 위아래로 출렁이기 시작했다.
"해보겠다는 거냐? 그래, 어디 한 번 와 봐라!"
대장이 호기롭게 소리를 질렀고,
그에 응답하듯, 그림자가 그 질주를 시작했다.
캉!
일격.
캉!
이격.
그림자는 고무공을 튕기듯 대장에게 돌진하고,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캉!
그 횟수가 반복될수록 점점 더 빨라졌다.
주위를 둘러싼 그림자들은 그 기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그리고,
쨍!
4격 째에 그림자는 대장을 뚫고 지나가, 그대로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갔다.
쿵.
금속의 파열음 대신 들린 건, 육신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였다.
대장의 목이 그의 몸과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프시익.
빨갛게 달궈진 그의 단검과 건틀릿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 * *
숙사를 빠져나온 뒤, 이반은 왕궁으로 잠입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의 내막을 알고 싶어서였다.
달리 돌아갈 곳도 없었기에, 그 마음은 매우 간절하였다.
이반은 왕의 처소 근처, 집사장의 집무실을 찾았다.
하지만 그 길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바로 마나 룸(Mana room)의 국왕, 네드(Ned)였다.
이반은 왕을 발견하자마자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그리곤 왕을 관찰하였다.
섣부르게 행동할 순 없었다.
잠옷 차림을 한 왕은 이마를 짚으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두통이 심한 건지 괴로워 보였다.
불현듯, 왕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반이 숨은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왕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반은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또 다른 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들킬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반인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하지만 이반의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왕은 이반의 기척을 알고 있었다.
이미 들킨 것, 어쩔 수 없다.
이반이 그림자에서 나왔다.
"밤중에 실례를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고갯짓으로 이반의 경례를 받아주었다.
"암살자들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혹시 국왕께선 알고 계신 게 있으십니까?"
이반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렇게 남 취급하다니 섭섭한 걸."
왕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아···."
뜻밖의 반응에 이반이 할말을 잃었다.
"됐어. 그만큼 급한 일이겠지. 그런데 공격이라니 무슨 일이야?"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중에 습격을 받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 그리고 분노가 묻어났다.
"암살자라고?"
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네가 암살대잖아. 그게 무슨 소리지?"
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다만 저도 경위를 알지 못합니다."
이반 본인이 생각해도 엉뚱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혹시 집사장이 시킨 일인가? 나는 아는 게 없는데··· 정말로 짚이는 게 없어?"
왕의 표정은 그의 말보다도 더 투명했다. 그는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네. 없습니다."
이반 역시 아는 게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정 그러면 집사장한테 가서 물어볼래? 어차피 거기로 가는 길이었거든."
왕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의표를 찌르는 물음이었다.
이반은 당혹스러워했다. 그리고,
"네···. 그러면 따라가겠습니다."
얼떨결에 동의했다.
암살대 대장 때와는 달리 집사장을 직접 마주할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왕의 눈빛이 일순 바뀌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무거운 눈빛.
"뭡니까?"
이반은 불안했다.
"그냥 얌전히 따라와 줄 수 있을까?"
왕이 생긋 웃으며 물었다.
그 물음의 뒤로, 왕의 손가락 끝에서 빛의 고리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황금빛 머릿결이, 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빛났다.
이반은 반사적으로 뒤로 뛰었다.
휙, 휙, 휙
왕의 손끝을 떠난 고리들이 허공을 갈랐다.
이반이 재빠른 몸놀림으로 고리들을 모두 피해냈다.
"무슨···."
이반이 왕을 강하게 응시했다. 갑작스런 공격은 이미 충분히 당한 터였다.
"그렇지만 일단은··· 죄인인 거 아냐? 그리고 또 내 말을 순순히 듣진 않을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이반은 잡힐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에게 대적할 수는 없었다.
고리들을 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휙, 휙, 휙, 휙
"참, 잘도, 피하, 네!"
왕이 미소를 띠며 고리를 던졌다.
본인의 즐거움 또한 이 상황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 후로도 왕이 빛의 고리를 던지고, 이반이 그것을 피하는 형세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를,
'끼이익.'
낯선 소리가 침범했다.
"혹시··· 국왕님이십니까?"
집사장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말소리가 밖으로 나왔다.
이반은 그새를 놓칠세라 그림자를 휘감고 단숨에 튀어나갔다.
그 뒤로 빛의 고리들이 벽에 닿아 무너졌고,
이반은 집사장의 앞에 비로소 다다랐다.
이반이 두 팔을 휘둘러 집사장을 제압하려는 찰나,
극심한 전류가 그를 덮쳤고,
"으···."
이반은 버텨 보았으나,
이내 마비되어 쓰러졌다.
그의 감기는 시야 사이로 집사장의 메마른 얼굴이, 내비쳤다.
- 작가의말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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