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
천막 안의 광경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루스 인들이 분위기를 띄우고,
암상인들이 그에 맞춰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헌터들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봐, 마드훌은 또 없는가?"
이미 술에 취한 듯한 암상인이 헤르만을 불렀다.
"저번에 가져갔더니 우리 고객님이 무척 좋아하셔서 말이야.
앞으로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조금 내주는 게 어때?"
암상인이 넌지시 떠보았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번에 나눠드린 게 거의 대부분이라서요.
다시 생산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헤르만이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러지말고, 따로 남겨둔 거 있잖아. 응? 조금만 좀 내줘."
하지만 암상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난처해하는 헤르만을, 구해준 건 빌이었다.
빌이 암상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자네, 왜 그러나? 많이 취한 거 아닌가?"
빌이 암상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암상인의 낯빛에 취기가 가시더니,
"그··· 그런가? 내가 좀 많이 마시긴 했지?"
암상인이 꼬리를 내렸다.
암상인들 사이에서, 빌의 영향력은 꽤 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빌을 탐탁지 않게 보는 사람도, 암상인 중에는 있었다.
"자, 자 이제 그만들 돌아가지. 이미 충분히들 즐긴 것 같으니 말이야!"
또 다른 암상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입에 도르멘의 줄기를 물고 있었다.
술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이만 일어나지!"
암상인의 말에 빌이 호응을 했고,
그에 따라 다른 암상인들이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암상인들이 이반의 눈치를 조금씩 살폈다.
지난 번과 같은 사태를 또 겪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랬기 때문에 자리를 빠르게 파한 걸지도 모르겠다.
암상인들이 천막을 나설 때에,
또다시 빌이 이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또다시 당부했다.
"만부스에서 기다리겠네, 하만."
빌이 악수를 건넸다.
이름을 꼭 끝에 붙여서 말하는 것이,
상대방을 신경 쓰고 있음을 알리고자 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수완이 있는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이반이 악수를 받아주었다.
빌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일부러 멋을 부린 미소라,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반은 빌과 함께 천막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들려온 건, 암상인들의 낄낄대는 소리.
없던 불안도 지펴 지는 그런 소리였다.
암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 앞에,
키야아아아아아악!
와이번 한 마리가 크게 울으며, 날개를 펄럭였다.
그리고 곧바로, 그 비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의 발 아래에는,
우리 하나가 걸려 있었다.
무언가를 가둔 우리.
그리고 그것은, 하이드였다.
하이드가 기절한 상태로 그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이반이,
곧바로 그림자를 두르고 하이드에게로 돌진하였다.
그리고 공중에서 멀어지는 하이드를 향해,
도약하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탓.
이미 날아오른 하이드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 우리에 손끝이 닿았지만,
그것을 잡지는 못하였다.
도약했던 이반이, 땅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하였다.
* * *
그림자를 푼 이반을 추스른 건,
빌이었다.
"하만, 괜찮나?"
빌이 말했다.
정말로 안부를 묻고자 한 것은 아니었고,
이반의 정신을 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이반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노기가 잔뜩 묻어 나왔다.
"시간이 없네. 빨리 날 따라오게."
빌의 말에, 이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이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 빌의 뒤를 따랐다.
빌이 이끈 곳에는, 빌의 와이번이 몸을 길게 늘리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 주인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빌의 와이번은 다른 와이번들보다도 몸집이 더 컸다.
짐은 이미 그의 시종이 다 올려놓은 상태였다.
빌이 시종의 도움을 받아 와이번에 탑승하였다.
그리고 시종이 이번에는 이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타게!"
빌이 이반을 향해 소리쳤다.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반은 시종의 도움을 받아 빌의 뒤쪽으로, 와이번 위에 탑승하였다.
그리고 시종이 빌의 무릎 위에 올라, 와이번의 목줄을 잡았다.
와이번의 등에는 안장이 놓여 있었는데,
본래 여러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보니,
자리가 부족해 이반을 배려하여 함께 앉은 것이었다.
"이랴!"
시종이 크게 소리치며 와이번의 목줄을 당겼다.
그러자,
키야아아아아아악!
와이번이 포효하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반은 땅 아래를 한 번 보았다.
시프는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급선무는 따로 있었다.
하이드를 구해내야 했다.
이반은 검은 하늘 위를, 두 눈을 부릅 뜨고 노려보았다.
* * *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천막 안에 옮겨져 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흐릿한 눈앞을 오고 갔다.
뒤통수가 얼얼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머리가 필사적으로 떠올리려고 한다.
그리고 충격이 그 앞을 가로 막는다.
하지만 그것을 비집고 들어가, 기어코 그 안을 들여다 본다.
충격적인 장면.
하이드가 눈앞에서 쓰러지고,
자신도 그 하이드를 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이드 눈에 맺힌 눈물이, 가슴 아프다.
시프가 눈을 뜨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분노가 몸을 지배했다.
"시프! 괜찮아?"
나딥이 시프의 변화를 눈치챘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시프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딥은 시프가 깨어난 것을 알았고,
그에게 전할 말도 있었다.
"시프! 이반이 하이드를 쫓아갔어."
나딥이 말했다.
그 말에 시프는, 마음 한편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약간의 불안감.
이반의 부재를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시프는 감이 안 왔다.
하지만 그 또한 나딥이 길을 제시했다.
"너도 어서 따라가야지!"
나딥이 말했다.
그 말에, 시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자신은 이반과 하이드의 동료였고,
동료로서 한시라도 빨리 그들에게 합류해야 했다.
시프가 얼굴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빛이 한결 맑아져 있었다.
"고마워, 나딥."
시프가 나딥에게 감사를 전했다.
"뭘?"
나딥은 시프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녀에게 당연한 말을 했던 것 뿐이었다.
시프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어느새 밖은 밝아져 있었고,
이반과 하이드가 놓고 간 짐이 많았다.
전부를 가져갈 수는 없었고,
필요한 것만 추려서, 시프는 짐을 꾸렸다.
그러던 중,
"아직 안에 있는가?"
천막 안으로, 대모님과 헤르만이 들어왔다.
대모님과 헤르만이 시프를 대면하였다.
"미안하네. 내 노파심에 괜히 하루 더 머물러 달라고 해서 이 사달이 났구만."
"미안해. 나도 암상인들을 잘 살폈어야 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모두 내 책임이야."
대모님과 헤르만이 각각 사과하였다.
"사과해도 하이드는 이미 붙잡혀 갔어요. 하이드를 되찾는 게 먼저예요."
시프가 말했다.
대모님과 헤르만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좋게 얘기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괜찮다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하이드의 몫이었다.
물론 나쁜 것은 암상인들이었지만 말이다.
"그 마음, 이해하네."
대모님이 마음이 착잡한 듯, 눈을 떨구며 말했다.
헤르만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본인의 잘못이 크다고, 헤르만은 생각하고 있었다.
암상인들과의 첫 대면부터 생긴 불신.
그것은 그가 감당해야 하고 또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가는 길에 도움이 되라고 이것저것 준비해 보았네."
대모님이 눈치를 주자, 헤르만이 짐 꾸러미를 시프에게 건넸다.
"식량과 옷가지, 그리고 마을의 약재들일세. 사막의 생물들은 생명력이 강하지.
분명히 도움이 될 걸세."
"감사합니다."
시프는 헤르만이 건넨 짐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불만이 있긴 했지만, 그 마음은 감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건 데스 체이서의 독이라네. 특별히 조심히 다루도록 하게."
대모님이 품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검보라 빛의 액체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시프가 그 병을 조심스럽게 받아, 자신의 품 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부스로 가는 길에 수라(Sura)라는 숲이 있는데,
웬만하면 그곳은 지나가지 말고 돌아가도록 하게."
대모님이 또 한 번,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왜죠?"
시프가 물었다.
"그 숲에 호수가 하나 있는데, 그 호수에 요정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어서 말이야.
전설에 따르면, 그 연못에는 시체가 가득하다고 하더군. 홀홀홀홀."
대모님이 작게 웃으며, 말을 끝마쳤다.
본인도 전설로 전해 들은 이야기라, 자신이 없어 보였다.
"아···, 네. 알겠습니다."
시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위험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료였다.
이반과 하이드에게로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네. 준비마저 하도록 하게."
대모님이 발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시프가 대모님과 헤르만을 향해 인사했다.
"비록 이렇게 됐지만, 파루스는 여러분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을 걸세.
언제든지 돌아오도록 하게나."
대모님이 천막을 나서기 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헤르만이 시프를 한 번 보고 고갯짓을 한 뒤, 대모님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시프는 짐을 마저 정리하였다.
* * *
"트라팔가(Trafalgar)의 소행이네. 만부스의 유명한 생물상이지.
우리를 가져왔을 땐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몰랐는데,
이제 보니 여기 오기 전부터 납치를 계획했던 모양이로군."
빌이 뒤쪽의 이반을 보며 말했다.
"트라팔가?"
이반이 되물었다.
그 목표를 머릿속에 확실히 새기려는 것 같았다.
"어찌 됐든 빨리 따라잡아야 하네.
만부스에는 그자의 세력이 있으니 말이야."
빌이 이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거래 상대가 이미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렇게 과감하게 행동한 데에는 분명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거야."
빌이 말을 덧붙였다.
"트라팔가의 와이번은 아직 보이지 않는 거야?"
이반이 물었다.
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렇다네. 우리 와이번이 가장 빠르긴 하지만, 시간차가 있어서 말이야.
그래도 도착할 때에는 많이 차이 나지 않을 걸세."
빌이 입술을 오므렸다.
답답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시종이 와이번의 고삐를 다시 한번 당겼다.
그러자, 와이번이 다시 한번 힘차게 날갯짓을 하였다.
그의 눈에는 어쩌면 목표가, 트라팔가의 와이번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 * *
시프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천막을 나섰다.
천막 밖에서 시프를 맞이한 것은 나딥.
그리고 그녀의 뒤에 대모님과 헤르만 그리고 파루스 인들이 서 있었다.
"하이드를 꼭 구해줘."
나딥이 말했다. 그리고 시프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품.
그녀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물론이지."
나딥이 떨어지자, 시프가 화답했다.
"일전에도 말했듯이, 파루스는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할 걸세."
대모님이 얘기하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대모님을 따라서 모든 파루스 사람들이 시프를 향해 경례하였다.
시프도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시프가 마을 사람들을 보고 얘기했다.
"몸 조심히 가시게."
대모님, 그리고 파루스 인들이 시프를 배웅하였다.
그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혼자가 된 시프가 길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의젓해 보였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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