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트라팔가가 허둥대다가,
발을 헛디뎌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트라팔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가 바쁘게 두 눈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 그를 지켜주는 부하는 더 이상 없었다.
모두 죽거나 전투불능, 또는 도망갔다.
이반이 트라팔가의 앞까지 걸어왔다.
"제··· 제발 살려줘! 이만하면 됐잖아, 응?"
트라팔가가 땅에 등을 기댄 채 말했다.
그는 이반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어 했다.
그의 무서움을, 트라팔가는 충분히 경험하였다.
"복원종도 가져갔잖아! 그리고 보아하니···."
트라팔가가 이반 뒤의 하이드를 보았다.
"네 동료도 되찾은 모양인데, 어때?
공원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복원종을 가져간 것도,
그리고 몽부아 부인과 거래한 것도,
모두 용서해 줄게!"
트라팔가가 그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하이드의 존재로 그는 거래 대상과 내용까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괜히 만부스 4악으로 불린 자가 아니었다.
이반은 그의 말에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결정은 혼자의 몫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의 목숨까지 빼앗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들긴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빌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가 상황을 지켜보다가,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나온 것이었다.
그의 옆에는 아이샤도 있었다.
아이샤의 손에는 큰 가방이 하나, 들려 있었다.
"빌! 이 빌어먹을 놈!!"
트라팔가가 빌을 보자 소리쳤다.
그 표현은 과격했지만, 그것은 나름의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트라팔가가 실실 웃으며, 빌의 눈치를 살폈다.
이곳의 결정은, 빌에게 달려 있었다.
빌은 트라팔가를 그 앞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그 앞에서 어떠한 고양감을 느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뜸을 들이며 트라팔가를 가만히 쳐다본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트라팔가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얼굴, 그리고 귀가 축 처진 것처럼 보였다.
다가올 운명을, 그는 어느 정도 짐작한 모양이었다.
"빌! 우리 서로 없던 일로 하세. 피해를 본 건 나뿐이지 않나?"
트라팔가가 그 운명을 틀기 위해, 빌에게 빌었다.
트라팔가는 이 순간에도, 빌의 입장 보다는
자신의 손실만을 따졌다.
물론 빌과 트라팔가의 손실의 크기는,
비교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차이 나는 것이었다.
"트라팔가! 왜 아직도 땅바닥에 누워 있는 건가?
어서 일어나게!"
빌이 트라팔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건넸다.
그의 미소는 어딘가 공허하였다.
"그, 그렇지? 고맙네, 빌."
트라팔가가 빌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빌과 트라팔가가 일어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트라팔가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빌의 미소에 화답하였다.
하지만,
푹.
빌이 트라팔가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자 트라팔가가 피를 흘리며,
다시 엉거주춤,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한 손으로는 가슴을 누르고,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짚으며,
트라팔가가 그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트라팔가? 왜 그러는가? 어서 일어나게!"
빌이 트라팔가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트라팔가가 빌을 바라보았다.
태양을 등진 그 모습에서, 악마라도 본 것인지
트라팔가가 기겁하였다.
"트라팔가?"
빌이 트라팔가를 다시 불렀다.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고, 고맙네···."
트라팔가가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빌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생존에의 갈망이었다.
하지만 그 갈망을,
푹.
빌이 또 한 번 찌르며, 무너뜨렸다.
트라팔가의 육신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가 눈을 부릅뜬 채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 모습, 그리고 빌의 사람을 가지고 노는 잔인한 방식은,
지켜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방식.
지배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반은 그의 방식에 절대 동의하지 못했다.
그리고 때마침, 도시 경비대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주변을 살피면서, 이반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아이샤가 도시 경비대에게 다가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가져온 가방을 건네주었다.
그 무게가 제법 되는 것 같아 보였다.
가방을 받아 들고, 만족스러운 듯,
도시 경비대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빌의 인도를 따라,
이반 일행은 사무실로 돌아갔다.
* * *
빌의 사무실 또한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다.
천장이 뚫려 있었고, 곳곳에 잔해가 널려 있었다.
까진 천장 아래로, 노을빛이 들어왔다.
아이샤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고맙네. 덕분에 일이 잘 마무리되었군."
빌이 이반 일행에게 말했다.
밖에 있을 때와는 180도 다른 태도였다.
이반 일행에 대한 인정과 감사를, 그는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반겨야 하는지, 이반 일행은 잘 가늠하지 못했다.
끝 맛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성장한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했고,
그 희생의 무게가, 빌의 행동으로 인해 더 크게 느껴진 것이었다.
"뭐, 그렇네요."
이반이 대답했다.
그 이상으로 좋게 얘기할 순 없었다.
그리고 이반의 불만을, 빌이 바로 눈치챘다.
"애석한 일이지. 이 만부스에선 관용은 사치라네.
단순히 끝을 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라네."
빌이 부연하였다.
그의 행동은, 자신의 직원들과 구경꾼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해는 됐지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하이드의 표정은 이반보다도 더 노골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부탁은 뭐죠?"
이반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감정이 있을 때, 일 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좋지 못했다.
"부탁은 복수라네. 만부스 4악 중 벤더(Vendor)라는 놈이 있네.
그 놈에 대한 복수가 내 부탁이라네."
빌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벤더? 무엇에 대한 복수죠?"
이반이 물었다.
정보가 빠져 있었다.
"내 아들에 대한 복수라네.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결국 다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네."
빌이 말했다.
"이 만부스에서 벤더가 취급하는 것은 '마약'이라네.
그것도 마나를 기반으로 만든 마약이지.
왕도까지도, 그 마수가 뻗쳐 있다네."
빌이 그 입을 오므렸다.
그만큼 무거운 얘기였다.
입이 마른 빌이, 품에서 시가를 찾았다.
"마나로 만든 마약이라고요?"
이반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얘기였다.
"흠···. 자네 마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빌이 이반에게 되물었다.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빌이 시가의 끝을 자르고, 불을 붙였다.
"자연에 존재하는 에너지? 신의 축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반은 왕도에서 들은 대로 대답하였다.
그 외의 설명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얘기들 하지. 하지만, 마나에 대해서는 아무도 잘 알지 못해.
그것을 연구하는 순간,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거나 프로스트 다운에 끌려가기 때문이라네."
빌이 이반을 뚫어져라 보았다.
마치, 이반이 프로스트 다운에서 온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확실히, 암살자가 왕도에서 쫓겨난 사안에 대해 알고 있는 암상인이 있었다.
그들은 소문에 빠삭한 게 분명했다.
빌이 시가를 한 모금 빨았다.
그리고 내뱉으며,
"하지만 사실, 마나는 영혼과 크게 다르지 않네.
만부스의 암상인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이미 마나병은 봤지?"
이반에게 물었다.
빌의 물음에,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드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집중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하이드와도 관련이 깊은 얘기였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영혼을, 마나가 이어주는 거지.
그렇다면 그 매개 또한 영혼 또는 그에 버금가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나?"
빌이 얘기하는 도중에, 시가를 물었다.
그의 말이 점차 신빙성을 더해가고 있었다.
"벤더가 파는 마약은 모운(Mourn)라고 불린다네.
그 마약을 투입하면, 영혼의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거야.
마나를 체내에 직접 주입해 본 적이 있나?"
빌이 물었다.
물론, 긍정의 답변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질문이었다.
빌이 시가를 입에서 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이반과 하이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모운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할 걸세.
다만, 미쳐버리겠지.
마나병이 이성을 유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네.
바로 그 영혼의 소리 때문이지."
빌이 시가로 포인트를 주며 얘기하였다.
그때, 이반의 머리 속에 트라팔가의 마나병과
안데르가 떠올랐다.
이성을 유지했던 마나병과
마수와 사랑을 나눈 안데르.
그 둘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묻는 것은, 둘 다 다른 이유로 어려웠다.
"모운은 그 줄타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약이네.
이성은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고양감을 주고 환상을 느끼게 해주는 약이지."
빌이 얘기했다.
그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그의 손가락 위에서 피어나는
시가 향이 복잡하였다.
"영혼의 소리는 덤과 같은 거라네.
모운을 사용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하지."
빌이 누군가를 회상하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실 상품으로는 결격 사항이 있는 불량품이지만,
그 울음소리에 중독된 사람도 꽤 많다네.
그리고 내 아들 놈이 그런 놈팽이 중 하나였지."
빌이 얘기하였다.
그의 눈은 허공 너머로, 아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빌이 시가를 다시 입에 가져가, 물었다.
"그런 울음소리에 중독된 사람의 끝은,
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겠나?
무척이나 참혹했다네.
그 끝에 이르는 과정도 참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 끝은, 정말로 두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네."
자신의 끔찍한 기억을, 빌은 담담하게 얘기하였다.
감정을 배제시키려는 그의 노력이었다.
시가의 덕을 본 것일 수도 있었다.
"뭐, 그런 얘기일세.
그런 이유로 아들의 복수를 꼭 좀 하고 싶네."
빌이 조금 단출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아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말문이 막힌 건가 싶었다.
그래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가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가 느낀 슬픔과 분노를, 그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사업을 정당화해줄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복수를 위한 사업이라기에는, 그 또한 피해자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도 똑같은 놈이잖아!"
말렌이 일갈했다.
그는 정말로, 만부스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욕해도 이해한다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빌이 말했다.
변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벤더라는 사람을 처치해 주길 바라는 건가요?"
이반이 물었다.
벤더를 처치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의문이 들었다.
"그렇네.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모운이라는 것을 지워주도록 하지."
빌이 시가를 다시 입에서 떼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여태껏 본 적 없는, 각오가 서린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계획은 있나요?"
이반이 그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물었다.
"하만!!"
말렌이 이반을 향해 외쳤다.
그는, 빌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아 했다.
이미 은연중에, 이반을 동료라고 스스로 인식한 듯했다.
하지만 모운이라는 마약을 없앨 수 있다면,
하다못해 잠시라도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이반은 생각했다.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얘기해 주세요."
이반이 말했다.
계획도 없이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라면,
이 얘기가 구실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바로 돌아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을, 빌은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다.
"아이샤."
빌이 작은 목소리로, 아이샤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아이샤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어느새, 사무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반은 그녀의 등장에, 속으로 크게 놀랐다.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현장직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녀 또한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이샤가 또 다른 두루마리를, 탁상 위에 펼쳐 놓았다.
두루마리에는 어떠한 계획이 적혀 있었고,
그 안에서, 이반은 몽부아 부인의 이름을 발견하였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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