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랜

모두가 얼어붙은 잠깐의 순간,
약 2초의 시간,
이반은 글랜의 팔을 자르고,
시프를 되찾아왔다.
그리고 시프를 아이샤의 옆에다가 데려다 놓았다.
글랜을 죽일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이반은 시프의 구출을 우선했다.
그 결정은 반사적인 것이라 본인도 놀랄 따름이었다.
얼어붙은 육체의 시간이 다시 흐르면서,
"으아아아아악!!!"
글랜이 밀려오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헉···, 헉···."
옆에서 아이샤가 기진맥진,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 마법이 부담이 갔던 건지,
일부러 그런 티를 내는 건지는 불분명했다.
아이샤를 모두 신뢰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가시옷단도 또다시 이반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반은 시프를 데려온 후, 그림자가 풀린 상태였다.
얼마나 더 그림자를 쓸 수 있을지, 이반은 가늠이 안됐다.
하지만 여기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이반은 다시금 그림자를 두르며, 가시옷단을 상대하였다.
그림자가 희미해졌다는 느낌을, 이반은 받았다.
그리고 가시옷단을 상대하러 가면서 이반은,
가시옷단 사이로,
물러나는 글랜을 보았다.
그 팔의 부상 때문이었다.
다행이었다.
글랜이 몽둥이를 끌면서, 서서히 멀어졌다.
가시옷단도 하나 둘, 글랜과 함께 물러났다.
이반은 남은 가시옷단을 힘을 내어 정리하였다.
그 후에 남은 것은 이반 일행과,
가시옷단의 시체뿐이었다.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말렌.
그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그 또한 많이 지쳐 보였다.
펑! 퍼버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
플랜트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화마가 플랜트를 뒤덮었다.
이제는 상황이 종료됐다.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왕도 밖에서는 원하는 대로만 상황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이반 일행은 불타는 플랜트를 뒤로 하고, 떠났다.
* * *
"수고 많았네."
빌이 인사 대신 한 말이었다.
"유통망도 가능한 한 전부 포섭하였지만, 벤더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없더군.
조금이라도 대응에 나설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숨어버린 것 같네."
빌이 고개를 저었다.
빌이 그의 사무실에 다시 돌아온 것은 이미 날이 저문 뒤였으나,
그 사이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빌을 기다린 이반 일행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만! 우리 일은 다한 것 같은데, 이쯤에서 그만두지?!"
말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렌의 그 말에, 이반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애매한 상황이었다.
아직 벤더를 처리하지 못한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플랜트도 태워 버렸고, 유통망도 어느 정도는 장악한 거잖아?
벤더가 뒤지든 말든 뭔 상관이야!"
말렌이 역설했다.
"하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는 이반의 말을,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네."
빌이 나서며, 가로채 버렸다.
"하지만 결국 벤더를 잡지 못한다면,
모운은 어디에선가 또 나타날 것이라네.
플랜트도 가장 큰 것을 없앤 것이지,
그 모두를 없앤 것은 아니니 말일세."
빌이 말렌의 말을 대신 반박하였다.
"그럼 결국 플랜트를 다 없애야 하는 건가요?"
이반이 물었다.
그 물음에, 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 남은 방법은 그것밖에 없네. 그래도 벤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말렌의 말대로 벤더는 무시하고, 계획을 진행하는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모운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걸세."
빌이 입술을 꾹 물었다.
빌은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감정에 치우칠 수는 없었다.
빌은 눈을 감았다 뜬 후, 그 입술을, 다시 열었다.
"이 만부스에 남은 플랜트는 총 네 곳이라네.
모두 십자로 끝, 도시 외곽에 위치해 있지."
말을 마친 후, 빌은 이반의 반응을 살폈다.
이반은 그 넷이라는 숫자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빌이 그것을 확인한 후,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네 곳 모두에 직접 갈 필요는 없네.
이번에는 직원들을 풀도록 하지.
그 네 곳 중, 가시옷단이 나타나는 곳에, 하만 자네가 가 주면 좋을 것 같네."
타당한 말이었다.
글랜과 가시옷단을 모두 물리친 것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도시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고
그 어딘가는 남은 플랜트 중 한 곳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한 곳에 벤더 또한 숨어있을 확률이 꽤 높아 보였다.
"알겠습니다."
이반은 빌의 그 부탁을 승낙하였다.
"하만!!"
말렌이 또 소리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이반의 결정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도 이반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이반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시프가 말렌의 등을 톡톡 쳐주었다.
말렌을 말리려는 것이 아닌, 그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이반도 말렌의 마음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아직 끝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모운을 없앤다는 이상의 끝을, 이반은 확인하고 싶었다.
* * *
"하만! 서쪽이네!!"
빌이 다급하게 얘기했다.
이반은 곧바로 출발하였다.
이번에는 하이드도 함께였다.
아이샤는 따라오지 않았다.
무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다.
물론 회복에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마법 하나에 그 정도로 힘들어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녀가 그간 보였던 모습 때문에,
의심을 쉽게 저버릴 수 없었다.
하이드는 플랜트 습격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번에는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장담했었다.
물론 지금은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당찬 모습은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반에게, 하이드가 싱긋 웃어주었다.
늑대가 웃는 것은 본 적이 없었지만,
그것이 미소임을, 이반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서쪽의 플랜트는 가운데의 플랜트에 비해,
훨씬 허름한 모습이었다.
그 크기도 작았고, 외벽도 없었다.
벽돌도 아닌 나무로 된 것이,
일반 주점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 위치를 듣고 오긴 했지만,
그 주변에 널부러진 직원들의 시체가 아니었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마치 화풀이라도 한 듯이,
그 시체들의 몰골이 처참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밟으며 다가오는 한 사람.
글랜이었다.
그 한쪽 팔을 잃어버린 글랜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다가왔다.
그 남은 팔은 전에 보았던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것 같았다.
그의 뒤에서, 가시옷단이 걸어 나왔다.
"그 년은 어디 갔지? 그 마법을 쓴 년 말이야!"
글랜이 이반 일행을 훑어본 후, 물었다.
아이샤에게도 원망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지 않았어."
이반은 그걸 또 대답해 주었다.
"흥! 그렇다면 죽으러 온 것이군.
아쉽군. 그년을 위한 선물도 준비해 뒀는데 말이야."
글랜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사이에 이반 일행에 대한 대비책을 짜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이쪽도 하이드와 함께였다.
"애들아, 죽여!!!"
글랜이 외쳤다.
대화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질문은 승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이반은 곧장 그림자를 둘렀다.
말렌도, 하이드도, 그리고 시프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번에는 뒤쪽이 막히지 않아,
시프의 지원도 기대할 수 있었다.
오를 수 있는 벽도, 지붕도, 많았다.
시프는 곧장 뒤로 뛰어갔다.
그리고 달려드는 가시옷단을 말렌과 하이드가 받아냈다.
하이드는 마법을 함께 사용하며,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반은 글랜에게만 집중하였다.
일행들을 믿고, 글랜에게로 향하였다.
그 길을 방해하는 가시옷단을 하나씩 베어넘겼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고,
겁내지 않을 상대는 없었다.
글랜도 겁을 내며 허둥댔다.
하지만 그 허둥대는 모습에, 어쩐 일인지 위화감이 들었다.
글랜이 씨익 웃었다.
"지금이다!"
글랜의 말에,
그의 뒤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이반의 앞에서 쫙 펼쳐졌다.
그물이었다.
그물이 양옆에서 이반을 감쌌다.
도망치려는 이반을,
가시옷단이 방해하였다.
그들이 이반의 퇴로를 막고 그를 둘러쌌다.
그리고 함께 그물에 포획되며, 엉키었다.
이반은 곧바로 그물을 자르려 하였다.
하지만, 그 그물에는 칼이 잘 들지 않았다.
그림자 또한 흩어질 뿐이었다.
소산의 주문.
그 주문이 담긴 그물이었다.
쉐도우 핸드도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그물 안에는 자신을 노리는 가시옷단이 함께였다.
위기였다.
"하하하하하!! 이러면 네가 아무리 그림자라고 해도 별수 없을 테지!"
글랜이 호기롭게 웃었다.
가시옷단이 이반에게로 마수를 뻗쳤다.
이반의 몸을 붙잡고,
손에 든 칼로 이반을 찌르려 하였다.
그들은 몹시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그물 안이라고 하여도
이반의 민첩함을 그들은 이길 수 없었다.
그 칼을 찌르기도 전에,
이반이 그 손가락을 모두 잘라 냈다.
그리고 그들의 목 또한 베어 냈다.
아무리 뒤엉켜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틈은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이반은 유연하였다.
그림자로 몸을 수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물 만은 벗겨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물 쪽으로, 가시옷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행들은 멀리 있었다.
그들은 여유가 없었다.
가시옷단은 동료의 시체를 밟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하나를 처치하면 또 하나가 나타났다.
그 때문에 이반 쪽을 돌아볼 틈도, 도울 여유도 일행들에겐 없었다.
이반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다.
원래 이것이 정상이었다.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이라고,
이반은 생각하였다.
이반은 칼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그리고 칼에 마나를, 가능한 한 부어 넣었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이반의 마나를 먹고,
칼에 박힌 검붉은 돌이 빛을 발하였다.
그 빛을 보며,
이반은 칼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이반의 손을 떠난 칼은,
푸콰아아아아악!!!
대지를 울리며, 폭발하였다.
폭발과 함께 육신들이 터져나가고,
흙먼지가 흩뿌려지며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반!!!"
시프가 반사적으로 이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말렌은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흙먼지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그 흙먼지 사이를 움직이는 흐릿한 형체.
"쉐도우 스피어!!"
이반이 그림자의 창을, 글랜에게 꽂았다.
하지만, 그 창 끝은 돌의 벽 앞에, 무력하게 막혔다.
용의주도한 글랜이 그에 대한 대비를 해뒀던 것이었다.
그의 몸에도 돌의 갑옷이 둘러져 있었다.
사막에서 지네를 상대할 때와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단단한 갑옷을 꿰뚫을 작살이 없었다.
"쳇."
흙먼지 사이로, 아쉬워하는 이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터진 시체들.
이반이 쥐고 있는 칼은 그 시체들 중 누군가의 것이었다.
"그런가! 시체를 방패 삼은 건가!!"
글랜이 깨달았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이반은 손에서 칼을 놓은 직후,
가시옷단의 시체들 사이로 몸을 숨겼었다.
그물에 닿지 않는 이상,
마나가 흩어지는 일은 없었으니,
칼에 박힌 폭발의 주문석을 활용할 수 있었다.
물론 폭발에 타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찰나의 틈을 찌르기 위해,
이반은 그 고통을 참아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네 기지는 인정하지.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인 모양이군.
그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날 이길 수 있겠나?"
글랜이 말했다.
"네 팔도 나와 같이 만들어 주마. 그리고 그 부위에서 네 모든 피를 뽑아내 주겠어.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글랜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는 이 순간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반은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힘이 달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참았던 고통도 몰려왔다.
하지만 기댈 곳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부름에 답해주리라 기대하면서,
이반은 주문을 외웠다.
"어비스 스피어."
심연이 감았던 눈을 뜨며, 그에게 응답했다.
- 작가의말
플랜트를 모운 생산 시설을 통칭하는 이름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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