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라드의 제안

"선수를 친다니?"
이반이, 게라드의 말에 의문을 달았다.
그 의문에,
게라드가 싱긋 웃었다.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저희가 먼저 서식지를 꾸미고,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게끔 만드는 거죠.
도시에서 거리가 있긴 하지만, 홍보만 제대로 한다면 사람들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먹거리도 있으면 좋을 것 같고,
나무 조각품이나 솜 인형같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상품도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그와 함께 갈란투스의 멸종 위험을 사람들한테 알리는 거예요!
갈란투스의 위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을 보호하는 것도 손쉬워질 겁니다."
게라드가 또 말을 쏟아냈다.
그 말 전부를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좋은 것이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주된 골자는 갈란투스 서식지를 관광지로 만들자는 것.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갈란투스 축제라면서 왜 그 서식지를 그동안 방치해 놓았던 건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갈란투스가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겠지만,
너무 위험을 피하려고만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갈란투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는 처사였다.
알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면서 갈란투스를 쫓아낸 뒤에 그 서식지를 기념하려 한다는 것이,
조금 웃기게 느껴졌다.
"어떠신가요?"
게라드가 의견을 물었다.
이반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먼저 나서서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피드백을 구한 것이었다.
"좋은 것 같아."
이반이 대답했다.
게라드의 생각을 다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구체적인 답변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게라드가 다시 이반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신이 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게라드가 말했다.
"어떤 게 필요하지?"
이반이 물었다.
"인력도 필요하고 돈도 많이 필요하죠."
게라드가 대답했다.
반짝거리는 그의 눈빛.
역시 상인인가.
하긴, 손쉽게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얼마 정도면 충분할까?"
이반이 품 속을 뒤지면서 말했다.
그러자, 게라드가 손을 흔들며,
"아뇨, 돈을 달라는 게 아니에요!"
이반을 만류하였다.
"응?"
"저는 어차피 물건도 다 넘겨준 참이라,
그냥 도와드릴 생각이었고요.
그리고 사비를 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이반에겐 있잖아요. 안 그래요?"
게라드가 물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
그렇다. 게라드는 이반에게, 그레고리와의 인연을 사용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해하자, 이반은 게라드가 정말로 똑똑해 보였다.
직접 보지도 못했을 텐데, 이반과 그레고리 사이에 접점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예상한 것이었다.
"그럼 같이 가 줄 수 있어?"
이반이 물었다.
어차피 그레고리를 찾아갈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게라드를 먼저 찾은 것이 정답이었다.
"물론이죠. 벌써 기대되는 걸요!"
게라드가 밝은 얼굴로 대답하였다.
그의 열정이 향하는 곳은, 장사였다.
그리고 상인 길드의 수장을 만날 기회는, 좀처럼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기회를 그는 잡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반이 게라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만난 순수한 열정들이,
이반은 마음에 들었다.
* * *
하지만, 그레고리는 생각보다도 바빴다.
벌써 두 시간이 넘게, 길드 내의 사무실 앞에서 이반은 그레고리를 기다렸다.
면담은 신청했지만, 이미 약속된 미팅이 많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가까스로 얻어낸 것이었다.
이반의 이름을 댔기에, 중간의 비는 타임을 받아낼 수 있었다.
원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수행원이 얘기하였다.
말렌과 시프는 또 거리로 나갔다.
이번에도 거리에서 정보를 수집할 요량인 것 같았다.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를 가져올지, 궁금했다.
그리고 철컥.
방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손님들이 나왔다.
그런데,
"앗!"
파린이 그중 한 손님을 알아보며, 소리쳤다.
"파린? 당신이 왜 이런 곳에···."
손님도 화들짝 놀란 뒤,
파린을 알아보고, 훑어보았다.
"시장님이야말로, 왜 여기에 오신 거죠?"
파린이 물었다.
위쪽으로 꼬부라진 콧수염을 가지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굴 포트의 시장이었다.
"저는 이곳에 올 이유가 충분하죠, 파린.
백수인 당신과는 다르게,
제게는 할 일이 넘쳐나거든요."
시장이 파린을 깔보듯 말했다.
"크읏···."
그 말에, 파린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그나저나 돈은 언제 갚으실 건가요?
행방이 묘연한 당신 대신, 제가 독촉 당하고 있다고요.
안 그래도 처리할 일도 많은데,
제 짐 좀 어서 덜어주시면 안 될까요?"
시장이 하소연했다.
고충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파린을 속인 것치고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건···."
역시나 말대답하지 못하는 파린.
그렇다고 파린 대신 나설 수 있는 상황도, 입장도 아니었다.
"어서 갚으세요. 안 그러면, 토지 소유증도 무효 처리 해 버릴 테니까."
시장이 위협했다.
그 위협에도, 파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더 꽉 깨물 뿐이었다.
"흥!"
시장이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분한 듯, 치를 떠는 파린.
시장이 계단을 내려가고 보이지 않게 되자,
"아아아아악!!"
파린이 분노를 토해 냈다.
깜짝!
모두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후우우우···."
파린이 숨을 크게, 덜어 냈다.
쌓인 것이 많은 듯했다.
그런데,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마중 나온 수행원의 두 눈도,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
요란한 첫인사였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반은 조금 걱정되었다.
* * *
"이반! 반갑습니다. 생각보다도 금방 만나게 됐군요."
그레고리가 먼저 다가와서 이반을 반겨주었다.
그러면서 악수를 건넸다.
"네, 반갑습니다. 이렇게 또 뵙게 될 줄은, 저도 몰랐네요."
이반이 악수를 받으며 말하였다.
"그런데 방금 그 소린?"
그레고리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약간의 재치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파린의 소란을, 그는 분위기를 깨는 데 이용하였다.
역시 그 또한 상인이라 그런지, 머리가 빠릿빠릿 잘 돌아갔다.
파린이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네, 여기 파린이 낸 소리입니다."
이반이 파린을 소개하였다.
적절한 소개 같지는 않았지만,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파린이 사죄하였다.
"하하, 아닙니다. 혈기왕성한 건, 좋은 것이죠."
그레고리가 대답하였다.
그의 주름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다른 분들은 다 일행이십니까?
여기 갈색 머리 분은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레고리가 물었다.
그러자, 게라드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저는 행상인, 게라드라고 합니다.
여기 헷지 길드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게라드가 예를 갖춰서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그레고리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그의 십자가 목걸이가 살짝 앞으로 나왔다.
그것을 보며, 이반은 경계심이 들었다.
불확실한 면이 있었지만, 교회는 잠재적인 적이었다.
"반갑습니다. 저희 길드에 계신다니 정말로 감사하군요.
바로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레고리의 자신을 낮추는 태도.
그것은 여느 조직의 수장에게서 볼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태도에 그레고리를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그를 인정하게 되었다.
게라드는 그가 수장인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번에 오신 것은 어떤 일 때문인가요?"
그레고리가 물었다.
순식간에 바뀐 눈빛.
그 진지한 눈빛에 압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 카리스마의 압박감을 이겨내고,
"하나, 제안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게라드가 말을 꺼냈다.
"뭐죠?"
그레고리의 물음.
이제는 자신의 후배를 대하듯,
냉정한 눈빛이었다.
"갈란투스 서식지를 관광지로 만드는 계획입니다."
게라드가 자신감을 잃지 않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그 얘기는, 방금도 들은 것인데요?"
그레고리가 반문하였다.
뭐!?
놀라운 얘기였다.
이미 시장이 얘기를 하고 간 것이었나,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것이었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선수를 친다는 말이, 이제는 무색해졌다.
그리고 이반 일행에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특별하게 매력적인 요소가 없다면,
제안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시장과 합의를 봤을 수도 있었다.
"그랬군요. 하지만 저희 제안이 더 좋을 겁니다."
하지만, 게라드는 놀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신감 있게 행동하였다.
"그럼 얘기해 보시죠. 알고 있을 테지만, 시간은 그리 많이 드릴 수 없습니다.
3분 안에, 저를 설득시켜 보시죠."
그레고리가 시간에 제한을 걸었다.
가혹했지만,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려한 것이었다.
벌써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장님이 어떤 제안을 했을지는, 사실 조금 예상이 됩니다.
서식지에 갈란투스 조각상을 세우고,
광대나 시인을 불러서 그 모습을 모방하고 흥을 돋운 사이, 물건들을 판다는 계획이겠죠.
그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실물이 없다면, 그 웅장함을 직접 느껴볼 순 없겠죠.
저희가 제안하는 것은 갈란투스와 직접 교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 파린 씨가 직접 나서서 갈란투스에 대해 설명을 해주실 거고요.
파린 씨의 통제 하에, 새끼 갈란투스를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갈란투스의 성장기와 축제 기간이 겹치기 때문에, 새끼 갈란투스를 만져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도 새끼 갈란투스 인형 등을 제작해 팔 거고, 새끼 갈란투스에게 줄 수 있는 먹이들도 판매할 겁니다.
그리고 남는 수익은 갈란투스 보존을 위해 또 사용할 계획입니다."
게라드가 자신의 계획을 남김없이, 빠르게 쏟아냈다.
제한 시간을 꽉꽉 채운 제안이었다.
그것을 들은 그레고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말한 대로, 시장 쪽의 제안과는 차이가 있군요.
그리고 다행인 것은, 시장 쪽의 제안을 저희가 유보했다는 겁니다.
어차피 축제 기간 이후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죠."
그레고리가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다 얘기해 주셔도 되는 건가요?"
이반이 물었다.
시장 쪽의 이야기를 털어놓아 주는 것이, 고맙긴 했지만 그래도 되는 것인가 궁금했다.
"안될 것도 없죠. 어차피 말로만 오간 얘기고,
더 좋은 제안을 채택하는 것이, 저희가 하는 일인 걸요."
그레고리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기대감을 가지고, 게라드가 물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얘기지만, 대중들도 그것을 좋아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군요.
그게 충분히 안전한가도 검증이 되어야 할 것 같고요."
그레고리는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입술을 꾹 무는 게라드.
실망감을 그는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안전하다는 것만 확인이 된다면,
어느 정도 지원은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레고리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 미소는 게라드를 향한 것이었다.
그의 가능성을 그레고리는 본 것이었다.
"아···!"
실망감이 환희로 바뀌는 순간.
이반도 기뻤지만,
게라드의 표정 변화는 더 극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보기 위해 실망감을 준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네. 안전을 확보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오세요.
그다음에 다시 얘기해 보죠."
그레고리가 긍정했다.
그러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게라드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반과 파린도 감사를 표했다.
하이드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그레고리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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