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지다

"이반!!! 그만해 이반!!"
시프가 소리 질렀다.
그런 시프를 커진 두 눈으로 보는 하이드.
배신감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이반은 멈춰 섰지만,
그림자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프가 풀썩, 쓰러졌다.
기절.
그림자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이반은 시프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할 일은,
기사단을 배제하는 것.
이반은 다시금 아르만과 제론에게로 도약했다.
아르만이 다시 그 실 같은 걸 연결하기 전에,
제론을 제압해야 했다.
직접 칼을 부딪치지만 않는다면,
실이 연결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이반은 아르만의 반대쪽으로 돌며,
그 손이 닿지 않을, 제론의 반신을 노렸다.
늑골 아래 쪽에서,
심장을 향해 바로 찔렀다.
하지만,
칼날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이반을 누르려는 제론의 손.
이반은 뒤로 살짝 물러났다.
아무래도 말렌과 비슷한 몸인 듯했다.
하지만,
손에 느껴졌던 것은 날붙이에 부딪쳤을 때와 유사한 감촉.
어쩌면 그 몸의 성질이 달랐을 수도,
아니면 마나의 힘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가 맞아 보였다.
곧이어 휘두른 제론의 대검,
그 무뎠던 날이 이반에게 다가오면서 날카로워졌기 때문이었다.
형질을 바꾸는 쪽의 마나 운용.
신성 마법에 가까운 마나 운용이었다.
이반은 제론의 대검을 피했다.
그리고 또 약간 물러나서 제론과 아르만을 응시했다.
역시 신을 섬기는 자들인가.
제론은 그 중에서도 철을 다루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아르만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무언가의 형질을 다룰 터였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것은 아마,
그 순간, 아르만이 이반에게로 튀어왔다.
노란색의 궤적.
이반은 아르만의 전격을 막았다.
파직 파직 터지는 노란 불꽃.
전기일 것이었다.
이반은 그것을 바로 확인하였다.
이반이 자신의 공격을 막은 것을 보고,
아르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통은 일격 필살.
막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세를 취할 때 그것의 속도는,
보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반은 이미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아르만의 형질을 짐작한 데에다가,
그 전격을 빅터 때에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르만은 그때의 새끼 갈란투스가 이반인 줄은 몰랐겠지만.
하지만 그 깨달음의 표정을 보니,
"너! 그때!"
또 그 말을 들어 보니,
이제는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반은 조금 더 깊이, 그림자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림자의 손으로 아르만을 잡고,
그의 목을 베었다.
그림자에 손에 당황한 아르만이,
그것을 막지 못하고 쓰러졌다.
"너 이놈!!"
제론이 포효했다.
타깃이 자제력을 잃었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반이 곧장 제론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제론이 이반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이미 한 번 피했듯이,
이반이 가볍게 그 검을 피하고,
그 아래로 파고들어 제론을 보았다.
하지만 이반을 맞이한 건,
제론의 커다란 손.
그가 대검을 미끼 삼아,
이반을 노려왔다.
자제력을 잃은 모습도,
이를 위한 포석이었다.
대검이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이반은 다가오는 손을,
몸을 수축하여 피해냈다.
하지만 또 다른 손이 이반을 향해 뻗어졌고,
이반은 이번엔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르며,
그것을 피하였다.
그리고 몸을 틀어,
이번에도 목을, 제론의 목을 베어 냈다.
제론의 거구가 쓰러지고,
이반의 두 발이 땅 위를 내밟았다.
하지만,
"이반!!"
끝이 아니었다.
하이드의 외침에 뒤를 돌아본 이반이,
자신에게로 향한 아르만의 전격을 막아 냈다.
부딪친 검 뒤로,
아르만이 이반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어제와 같은 거리감을, 둘은 가지지 못할 것이었다.
이반은 상황을 바로 파악하였다.
아르만의 목에 상처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충분히 깊지 않았다.
아르만이 이반의 칼이 그 목에 닿기 전에,
전기로 자극을 주어, 몸을 반응시킨 것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전기의 실.
그 실을 달고 아르만과 검을 부딪치는 것은 좋지 않았기에,
이반은 일단 아르만의 거리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하지만, 이반의 등 뒤를 덮치는 커다란 그림자.
마찬가지로 목에 상처를 입은 제론이,
안간힘을 쓰며 이반을 노려왔다.
그 목의 상처는 아르만의 경우와 다르게 위중한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목숨이 끊겼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두꺼운 근육으로,
그리고 형질 변환으로,
억지로 지혈하고 버텨내고,
이반에게 공격까지 가한 것이었다.
그렇게나 필사적이었던 그의 몸 던짐.
그러나 그것은 이번에도, 이반에게 닿지 못했다.
펼쳐진 물의 장벽에,
그가 턱을 부딪치며 떨어졌다.
제론이 쓰러지기 전, 하이드를 노려 보았다.
하이드가 겁을 먹고 물의 장벽을 풀었고,
이반이 제론의 뒤를 잡았다.
불안한 눈으로 이반을 보는 아르만.
이반이 제론의 머리를 들고,
그의 목숨을 확실히 거두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만!!"
아르만이 외쳤다.
"제발 그만. 제론 죽이지 마."
아르만이 울먹이며, 간청했다.
계속되었던 만류.
케로스에 시프, 그리고 이제는 아르만까지.
왜들 그렇게 막아서는 걸까.
이제야 모든 것이 명료해지고 깔끔해졌는데.
돌아가려 할수록 방해받고 힘들 뿐이었는데.
결국 농락당하고 말뿐이었는데.
다들 그 과정이 즐거웠던 걸까.
소꿉놀이로 끝나고 말지라도, 그것이 소중했던 걸까.
이반은 이제, 이해도 공감도 안됐다.
그때, 이반의 시야에 들어온 도롱뇽 마수.
도롱뇽 마수가 이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말소리가,
"이반!!!"
들려왔다.
도롱뇽 마수는 또 어디에서 구한 것일까.
이반은 제론의 머리를 들고,
그것을 기다렸다.
또 자신을 만류하려는 건지, 이반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공허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제론이 척결자의 얼굴을 밟았었지.
이반은 제론의 머리를 조금 더 들어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어울리는 창백한 얼굴.
입에서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마무리하지 않더라도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르만이 이반을 응시하며,
울컥 울컥 터지려는 감정을, 뛰쳐나가려는 몸을, 억누르고 있었다.
제론에게는 과분한 감정과 애정이었다.
역시 끝을 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칼을 든 손을 움직이려는 이반을,
"이반! 파린 씨는! 괜찮답니다!!"
이번에는 게라드가 소리치며 막았다.
왜 이렇게들 방해하는 건지.
이반은 제론의 머리를 그냥 떨어뜨렸다.
그냥 포기해 버렸다.
파린의 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항이 겹치고 겹쳐서,
이제는 지쳐버렸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거둔다는 일이,
암살대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피로하게 느껴졌다.
기사단의 목숨을 놓아주는 것이 아깝기는 했지만,
아르만까지 잡을 게 아니라면,
원한을 사지 않는 쪽이 나아 보이기도 했다.
"날 방해하지마."
이반이 아르만에게 말했다.
그리고 게라드에게로 향했다.
아르만은, 제론에게로 곧장 다가갔다.
그리고 품속에서 성수를 꺼내, 그의 상처 부위 위에 부었다.
그 후에, 주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할 기도를 하였다.
"전에 세력에 대해서 얘기했었지."
이반이 게라드에게 말했다.
이반의 갑작스런 접근과 혼란스러운 주변의 상황.
덩달아 패닉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게라드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네. 그랬습니다."
게라드가 대답했다.
게라드가 마수의 목줄을 바짝 당겨 잡았다.
마수를 진정시키려는 것,
또는 본인의 정신을 꽉 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 끝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이반이 말했다.
의미심장한 말.
그 말을 듣고,
"미시오(Missio)입니다."
게라드가 바로 대답했다.
"미시오? 미시오라면, 그 선교 단체?"
이반이 물었다.
"네. 대외적으로는 그렇죠.
아가페적 사랑을 나누는 선교 단체이자 봉사 단체.
하지만 그 수뇌부들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게라드가 대답했다.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
이반이 물었다.
그는 또 이용당하고 마는 것을, 경계하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이반, 그 수뇌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찾기는 어려울 거예요."
게라드가 말했다.
하지만 일의 난이도는, 이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한다.
그것이 그에게는 전부였고,
그 목표가 분명해졌다면 그것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고마워."
이반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애들을 잘 부탁해."
마지막 말과 함께, 사라졌다.
도시에 변화의 바람을 가져올 뻔했던 소꿉놀이는,
그렇게 쓸쓸하게 끝이 났다.
* * *
졸지에 보모가 된 게라드.
하지만 이들의 구심점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파린과 말렌의 침상 옆에서,
아이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교회 안의 병실이었다.
요근래 병실에는 손님이 많아졌다.
건너편에는 빅터가,
또 반대편에는 제론과 그를 돌보는 아르만이 있었다.
병상들 사이에 가림막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눈에 들어왔다.
빅터는 돌아누워 있었다.
빅터는 말렌이든 제론이든,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신을 꺾고,
자존심마저도 밟은 자들이었다.
보기도 싫을 것이, 당연하였다.
자신의 뭉개진 얼굴을 보이는 것도 싫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가 싸움을 걸거나,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서의 싸움은 물론 금지된 것이었지만,
그가 그것을 잘 지킬 줄은 몰랐었다.
어쩌면 가끔씩 그에게 신경을 써주는 시프 덕일지도 몰랐다.
시프는 이반이 떠났음에도 의연한 모습이었다.
파린과 말렌을 잘 살피면서,
교회 사람들과도 계속 소통하고 잡일도 맡아서 하였다.
그 자신이 화살을 쏘면서,
이미 마음을 먹은 것일지도 몰랐으나,
확실히 또래에 비해, 심지가 굳은 친구였다.
반면 하이드 쪽은 충격이 큰 듯 보였다.
시프랑도 말을 잘 섞지 않았고,
파루스의 눈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게라드는 하이드를 더욱 신경 써 주었다.
이반의 부탁이 그의 마음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야, 상인!!"
뒤쪽에서 들리는 쇳소리.
돌아보니, 제론이었다.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 보였다.
목의 상처는 치료하였으나,
성대도 다쳤고 흉터도 크게 남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너 그놈이 어디로 간 지 알지?
어서 말해. 안 그러면 상인이라도 봐주지 않을 테니까."
늘 하는 듯한 협박이었다.
이반에게 당한 것이 분한 모양이었다.
"왕도로 갔을 겁니다."
게라드가 제론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굳이 감출 생각은 없었다.
이반도 숨길 생각은 없을 것이었다.
"왕도? 정확히 어디로 간 건지 말 안 해?"
좋게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을,
제론은 굳이 험하게 물어보았다.
그것이 자신을 돕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모를 것이었다.
"글쎄요. 교황청이라도 부수러 간 게 아닐까요?"
자세한 내용까진, 사양이었다.
게라드가 비꼬았다.
"뭐!?? 이놈이!!"
제론이 병상에서 몸을 들었다.
하지만,
"그만둬, 제론.
네 목숨이 붙어있는 건 저분 덕분이야."
아르만이 제지하였다.
"죄송합니다. 제 동료가 성질이 급해서."
아르만이 게라드에게 대신 사과하였다
"괜찮습니다."
게라드가 고개를 살짝 숙여 그 사과를 받았다.
"흥!"
하고 돌아눕는 제론.
양옆 병상의 사람들이 모두 돌아누웠다.
관계란, 등지기 쉬운 것이었다.
"게라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말렌이 고개 들어 물었다.
그 물음에, 게라드는 놀랐다.
그런 질문이 자신에게 올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시프도, 하이드도, 모두 게라드를 쳐다보았다.
파린은 남일인 양 신경 쓰지 않았다.
이 풍경을 이반은 줄곧 봐왔던 것일까.
게라드는 이제 그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아니라면 여기에서 이만 정리를 해야 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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