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탱

알비다와 선원들을 믿어야 하는 걸까?
믿고 기다리는 것이 나은 것일까?
시프는 고심했다.
알비다님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고 했다.
갑판 아래로 출렁출렁 계속 흘러 들어오는 물.
그 물의 양이 배가 흔들림에 따라,
줄어들었다가 다시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갑자기 또 물의 양이 급격하게 많아지면,
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 안에서 물에 잠겨 버리는 것도 문제였지만,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이곳저곳에 부딪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일단은 나가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통로 쪽에 그대로 있는 것은 위험했다.
"말렌, 움직일 수 있겠어?"
시프가 말렌에게 물었다.
하이드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말렌.
말렌은 거동하기 힘들어 보였다.
멀미도 다 가시지 않았는데,
거센 풍랑을 만나 더욱 힘겨워 하는 모습이었다.
말렌의 눈썹 아래로 그늘이 깊게 져 있었다.
"어···. 힘내 볼 게."
말렌이 말했다.
가라앉은 목소리.
말을 꺼낸 것이 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움직여야 했다.
"제가 부축하죠."
게라드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응. 부탁해."
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밖으로, 발을 옮겼다.
쏴아아아아아, 촤아아아아아!!
비가 쏟아지고,
때마침,
쿠르르르릉 쾅쾅쾅!!!
천둥도 쳤다.
시프는 몸을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선원들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돛대에 매달려 있는 상황.
"으아아아아악!!"
갑판 위에서 휩쓸려 다니는 선원도 있었다.
펄럭펄럭펄럭펄럭.
돛을 두들기는 강풍의 소리.
돛이 시커먼 구름 아래에서 흉흉하게 펄럭거렸다.
일행들도 어디 몸을 둘 곳이, 기댈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선체는 크게 흔들리고,
돛대에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몸을 둘 곳만 생각한다면 갑판 아래가 더 나아 보였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물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통로 쪽으로 빠지는 물살도 세지고 있었다.
벗어나야 했다.
"일단 움직이죠, 시프."
게라드가 말했다.
그는 말렌을 지지하고 있었다.
하이드는 그래도 혼자 설 수 있어 보였다.
"응."
시프가 앞장섰다.
일단은 선미로, 알비다한테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큰 물살이 일행들을 덮쳤다.
시프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바로 깨달았다.
붙잡을 것도 없이, 지탱할 곳도 없이,
파도를 그대로 맞는다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을 덮치는 물살이,
시프는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얼핏 떠서 확인해 보니,
물살이 공중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보이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며 집중하고 있는 하이드.
그녀의 목걸이, 파루스의 눈이 떠져 있었고,
그녀가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이드가 물살을 막은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그 다음 순간, 일행들이 미끄러지며,
반대쪽 불워크에 부딪쳤다.
"커헉."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
너 나 할 것 없이 고통스러워했다.
특히, 말렌을 부축하고 있던 게라드가 더욱 아파했다.
하이드는 두 눈을 감았다.
의식을 잃은 듯한 모습.
파루스의 눈도 그녀를 따라 그 눈을 감았다.
다시 반대쪽으로 미끄러져 가려는 하이드,
그 하이드를 말렌이 또 붙잡았다.
말렌도 힘겨워 보였지만,
의식의 끈을 놓치는 않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모습.
위기의 순간, 일행들이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게라드가 말렌을, 말렌이 하이드를 연쇄적으로 지탱하였다.
시프는 게라드의 심적 버팀목이었다.
"시프, 저희는 괜찮으니까, 어서 선장님에게로.
상황을 보고 와줘요."
게라드가 부탁했다.
그는 불워크를 붙잡고 있었다.
"정말? 괜찮아?"
시프가 되물었다.
일행들의 위기에 불안한 듯한 모습이었다.
"네. 괜찮습니다. 일단은 상황 파악이 먼저입니다.
어서 다녀와 주세요!"
게라드가 다시 부탁했다.
시프를 일깨우려는 듯 흔들림 없는 표정과 말투였다.
그 모습을 보고, 시프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응."
고개를 끄덕였다.
시프가 곧장 움직였다.
민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였다.
멀어져 가는 시프를 보고,
게라드가 다시 말렌과 하이드를 보았다.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 * *
못에서 뛰쳐나온 뒤에,
이반은 숲속에 갇혀버렸다.
주변이 모두 똑같은 풍경.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그를 둘러쌌다.
녹갈색과 청록색이 전부였다.
하늘도 보이지 않고,
방향도 상실하였다.
나침반.
파루스를 찾으러 갔을 때 썼던 나침반.
그 나침반이 아직도 있을까.
이반은 서둘러 모든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나온 것은 빌이 주었던 호출 장치.
아직까지도 그게 품속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반면, 나침반은 따로 버릴 일도 없었는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정말로 궁금했다.
어디 전투 중에 떨어져 버린 것이 가장 유력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차박. 차박.
이반은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못에서 뛰쳐나온 방향 그대로 걸었다.
그래도 방향을 바꾸는 것보다는 한쪽으로 계속 걷는 것이 나았다.
주위를 살피면서 나아갔다.
여기는 새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만큼 깊은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위험이 있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위험을 일일이 확인하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시선.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느껴지자마자,
이반이 그림자를 두르고,
그것에게로 돌진하였다.
대상은 나무 위에 있었다.
이반이 사라진 것을 보자마자,
대상이 바로 도망쳤다.
그도 눈치는 있었다.
하지만 이반은 그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흐릿한 기척.
나름 기척을 잘 숨기는 편이었다.
다만 상대가 이반일 뿐이었다.
쉭.
이반이 대상에게로 칼을 던졌다.
그리고 칼이,
콱.
나무에 박히면서,
대상의 망토가 나무에 걸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발버둥 치는 대상의 모습.
이반은 다가가서 대상을 잡고,
칼을 뽑은 뒤,
그것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대상을 깔고 앉아, 그의 목 아래로 칼을 댔다.
축축이 젖은 나뭇잎이,
살짝 공중에 떴다가, 가라앉았다.
"너는 누구지?"
이반이 물었다.
그림자 사이로, 그의 입이 움직였다.
나뭇잎 사이로 헝클어진 노란 머리.
그리고 뾰족한 귀, 오똑한 코.
"이거 놔."
큰 눈망울을 부라리며 대상이 말했다.
자존심이 강해 보였다.
"이름부터 말해."
이런 상대에게 밀려서는 안됐다.
그 말에, 이반을 빤히 보는 대상.
이반이 정말로 사람을 찌를 수 있는 위인인지, 가늠해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간을 보는 것은,
이반을 상대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말해."
이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칼로 대상의 목을 조금 찔렀다.
손에 떨림이, 전혀 없었다.
피가 찔끔, 흘러내렸다.
"큿."
미성의 목소리.
아르만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 대상도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루시아(Lucia)야."
대상이 말했다.
마지못해 말한 티가 역력히 느껴졌다.
"왜 나를 관찰했지?"
이반이 물었다.
그림자를, 그는 아직도 두르고 있었다.
"얼굴이나 보이고 말하지?"
루시아가 짜증을 냈다.
그녀는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왜 나를 관찰했는지부터 말해.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이반이 경고했다.
상대의 말에 따를 필요는 없었다.
자존심을 확실히 눌러 놓아야 했다.
"너야말로, 조심하는 게 좋을걸?
내 동료들이, 곳곳에 있어."
루시아가 이반에 맞섰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다.
이반은 주위의 경계를 놓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혼자 이곳에 왔다는 것을,
이반은 확신하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여기 혼자 왔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어."
이반이 말했다.
그러면서 칼을 조금 더 밀어 넣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조금만 더 깊이 찌르면, 치명상이었다.
이반은 그 경계를 잘 알고 있었다.
"큿."
루시아가 당황했다.
그녀의 목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 떨림을 최대한 억누르는 모습.
죽음의 위협이 그녀의 바로 앞에 있었다.
"순찰이야. 그런데 정령들이 얘기해 줬어.
외부인이 숲에 들어왔다고.
그래서 확인하러 와본 거야."
루시아가 목을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이반이 그림자를 풀었다.
루시아의 말에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좋은 일이었다.
너무 몰아붙이기만 한다면, 반발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이반이야. 해협을 건너다가, 여기까지 왔어."
이반이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였다.
루시아가 이반을 또 빤히 보았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거면, 그만 비켜줄래?
동료들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금방 나를 찾을 거야."
말하였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혼자 이곳에 머무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행색이 너무 단출했다.
이반은 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루시아에게서 비켜서,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그녀의 목에서 피는, 더 흐르지 않았다.
루시아가 목을 만져보았지만,
상처는 체감했던 것만큼 깊지 않았다.
"고맙다고는 하지 않을 거야."
이반이 일으켜준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물론 이반이 그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존심이 센 사람에게는,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알아. 이 숲에서 나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지?"
이반이 물었다.
그도 사과는 하지 않았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굽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루시아가 이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가 정말로 위험인지 아닌지 한 번 더 확인하는 모양.
달아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잡힐 것을 루시아도 알고 있었다.
"따라와. 일단 마을로 가자."
루시아가 말했다.
고고한 말투. 자신이 우위에 서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앞장서."
이반이 다시 고쳐 주었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의 관계는 그렇게 설정되어선 안됐다.
상대의 진영에서 얕보여서는 안됐다.
얕보였다가는 어떤 함정에 빠뜨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분명히 해야 했다.
그것을,
"칫."
루시아가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대꾸하지는 못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의 상황과 관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루시아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반이 그 뒤를 따랐다.
근처에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으니,
그래도 마을까지는 꽤 걸어야 할 것이었다.
그나저나 정령이라니,
그 푸른빛 벌레들을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시프가 봤다던 요정 같은 거라면 또 곤란했다.
숲은 생각보다도 큰 것 같았고,
이 안에 또 어떤 것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가는 길을 알려주는 대신,
마을로 가자고 한 것을 봐도,
이 숲은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이곳에 집중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 작가의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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