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상황

"이 숲에 살고 있는 다크 엘프들을 죽여주게."
엘프가 말했다.
그 말은, 예상 못 한 것이었다.
기껏해야 마수를 잡아달라고 할 줄 알았다.
"네?!"
놀란 이반의 반응을,
"건방진 놈들이 우리 허락도 없이 숲속에 들어와서 말이야.
자기들 마음대로 터를 잡았지 뭔가.
그놈들을 깡그리 박멸해 주게.
그럼 숲을 나가는 길을 알려 주겠네."
아랑곳하지도 않고 엘프가 말을 이었다.
이반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반은 눈알을 굴려, 루시아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도 엘프였고, 이 마을의 일원이었다.
"할 텐가, 말 텐가?
물론 하지 않겠다면, 자네를 마을에 잡아둘 수밖에 없어."
엘프가 몰아붙였다.
"그게 무슨···."
그래도 이반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그놈들도 자네가 잡은 씨 서펜트와 다를 게 없어.
유해하고, 거슬리기만 하는 생물이지.
말을 할 줄 안다고 다 같은 지성체가 아니야."
엘프가 사설을 붙였다.
지성체.
이반 앞이라 일부러 선택한 단어겠지만,
엘프들은 인간 또한, 다크 엘프와 같은 취급으로 볼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다크 엘프보다도 낮잡아 볼 수 있었다.
지성체란, 그들만을 지칭하는 단어일 것이었다.
갈란투스를 쫓아내려 했던 시장과, 이들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남의 손을 빌리려고 하는 점에서, 그보다도 악질이었다.
"그럼 왜 직접 하지 않는 거죠?"
이반이 되물었다.
그 물음에, 멀뚱멀뚱.
엘프들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반은 또 알 수 없었다.
엘프들은 그 긴 귀만큼이나,
길게, 턱을 내밀고 신나게 웃어댔다.
이반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웃은 뒤,
인상을 쓰고 있는 이반의 앞으로,
엘프들의 웃음이 잦아들고,
"흠흠. 그랬다간 우리 마을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잖나?
우리 같은 고귀한 존재가, 피를 흘린다는 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
그 마을 대표 같은 엘프가 말했다.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인 말.
그들이 이런 곳에 숨어 사는 것이, 이반은 이해가 갔다.
그들은 그 자신들의 고자세 때문에, 이곳으로 밀려난 것이었다.
그럴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반은,
"알겠습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만 알려주십시오."
이반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엘프들의 입가에, 미소가 크게 번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역시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구만!"
엘프들이 또 웃었다.
이렇게 웃음이 많은 종족인지는 몰랐었다.
"그래, 만약 다크 엘프 놈들을 모두 처단한다면,
우리 마을 역사에 자네를 기록해 주지.
씨 서펜트를 무찌른 인간, 이 아우렐(Aurel)의 명을 받아, 다크 엘프를 처단했다!라고 말이야!!"
그 대표격의 엘프, 아우렐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이 아우렐이었나.
공치사 때문이 아니라면, 제 이름도 밝히지 않았겠지.
그는 이반의 이름에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반도 이 대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있던 관심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알겠습니다. 위치나 알려주시죠."
이반이 다시 한번 말했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겠다. 알겠어. 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가 보군.
그 마음 이해하지.
위치는 루시아가 안내하도록 하지.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아이니까, 좋게 봐주길 바라네."
아우렐이 말했다.
그는 이반의 마음도 제멋대로 넘겨짚었다.
이반은 루시아를 보았다.
여전히 담담한 표정.
자신에 대한 나쁜 평가가, 그녀는 익숙해 보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반이 그래도 예를 갖추어서, 작별을 고했다.
괜히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 의심조차도 그 행복한 머릿속에선 하지 않을 것 같아 보였지만 말이다.
"그래. 부탁하지.
혹시 잘 곳이 필요하다면, 초소에 자리를 내어주겠네.
조금 쉬었다 가도 좋네."
큰마음을 쓰는 듯, 아우렐이 말했다.
다분히 대외적인 것, 자신의 관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이반은 거목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반의 뒤로 루시아가 따라나왔다.
그렇게나 오래되고 영험해 보이는 고목 안에는,
케케묵은, 속이 말라비틀어진 시꺼먼 것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 * *
하이드는 몸을 뒤흔드는 일렁임 속에서,
자신을 감싸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후에, 의식이 다시 감겼다.
몸이 어디론가 떠밀려갔다.
* * *
"푸하."
숨구멍에 걸려 있던 물방울.
그 물방울을, 하이드가 뱉어냈다.
"쿨럭, 쿨럭."
"하이드! 괜찮아!??"
말렌의 목소리.
하이드는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하이드! 정신이 들어?"
말렌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말렌? 다른 사람들은?"
하이드가 물었다.
그 물음에, 말렌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미안. 시프는 찾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게라드는···."
말렌이 해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때마침,그 해변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말렌!!"
게라드가 소리쳤다.
"저기 있어."
말렌이 말했다.
게라드가 다가왔다.
"하이드, 괜찮습니까?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게라드가 가까이 오자마자, 하이드를 살펴보며 물었다.
그는 정말로 보호자 같았다.
"응. 괜찮아. 머리가 조금 띵한 데,
아픈 곳도 없고, 다친 곳도 없는 것 같아.
누가 나를 지켜줬던 것 같아. 따뜻한 품이 느껴졌어."
하이드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말렌이 코를 쓱, 닦았다.
그 눈치.
말렌이 자신의 짓임을 티 내고 있었다.
"그건 말렌이었습니다. 말렌이 우리 둘 모두를 구해줬어요."
그 눈치가 맞았다.
그것을 게라드가 확인해 주었다.
"뭐, 그 정돈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말렌이 몸을 틀며, 거들먹거렸다.
괜히 심술이 나는 모양새였지만,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고마워, 말렌."
하이드가 감사를 표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언제든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렌이 계속 거들먹거렸다.
쑥스러워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보다도,
"그런데, 여긴 어디야?"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이반이라면 그랬을 것이었다.
"해안을 살펴보니, 해협을 건너오기는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정보다 더 안쪽으로 밀려 들어온 것 같아요.
정확한 위치는 지도를 봐야 알 것 같은데,
짐을 다 잃어버려서, 당장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게라드가 설명했다.
약간은 불편한 듯한 모습.
그 모습을 걱정하여,
"괜찮아?"
하이드가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게라드가 당황했다.
"네? 아,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시프가 괜찮은지 알 수가 없어서···."
게라드가 말끝을 흐렸다.
"아···."
그제야 시프의 부재를 다시금 느낀 하이드.
그 부재를 실감할 틈이, 그녀에겐 없었다.
"시프는 ··· 괜찮겠지?"
하이드가 게라드, 말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긍정적인 답을 내놓지 못했다.
여기 있는 인원이 모두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말렌이 그 튼튼한 몸으로 그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요.
시프는 선미 쪽에 있었을 테니,
아마 저희보다도 멀리 밀려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게라드가 침울한 분위기를 깨며, 말을 꺼냈다.
"맞아. 시프는 날래니까,
요리조리 잘 피해 갔을 거야."
하이드가 밝은 목소리로 동조하였다.
하지만 말렌은,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시프의 존재가, 그에게는 큰 의미였던 것이었다.
"말렌?"
하이드가 말렌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살폈다.
흠칫.
생각에 빠져 있던 말렌이, 하이드를 보고,
"맞아. 시프는 괜찮을 거야."
기운을 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인상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그런 말렌을, 게라드가 보고,
"네. 맞습니다. 그렇게 믿고 나아가야죠.
시프가 어딘가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일단은 해안 아래쪽으로 걸어가면서, 다른 흔적들을 찾아보죠.
저희가 어디쯤에 있는 건지도 같이 파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말했다.
어떤 해결, 또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건,
역시 이반 아니면 그였다.
침울해져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 시간조차도 아까운 것이었다.
"좋아!"
하이드가 다시 한번 동조했다.
그리고 말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을 보고,
"그럼 일단 물고기라도 잡아볼까요?"
게라드가 물었다.
예상외의 물음.
하이드와 말렌이 서로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바로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뭐라도 먹어야 힘을 내죠.
일단은 먹을 것부터 구해봅시다."
게라드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하이드와 말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 *
"우으···."
몸 안쪽에서부터 나오는 신음 소리.
철썩.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철썩.
하지만, 파도는,
철썩.
어서 일어나라며 몸을 연신 때려 댔다.
부추겼다.
철썩.
시프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알비다가 있었다.
"으으···."
알비다도 신음 소리를 내뱉고,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토미?"
또 그 이름을 불렀다.
당최 알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시프는 몸을 일으켰다.
조금 많이 뻐근하긴 했지만, 움직이기는 하였다.
다친 곳도 별로 없어 보였다.
하지만 통증은,
"아!"
뒤늦게 찾아왔다.
손바닥이었다.
시프는 손바닥을 살폈다.
손바닥에는 로프가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까진 살갗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쓰린 것이었다.
시프는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다가 아예 쥐어버렸다.
그 편이 통증이 오히려 덜하였다.
"알비다님?"
시프가 알비다를 불렀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든 줄 알았는데,
배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정신을 못 차린 것일까?
시프는 몸을 숙여, 알비다를 살폈다.
"시프?"
알비다는 두 눈을 다 뜨고 있었다.
정신도 다 차린 모양.
하지만,
"나, 다리가 안 움직여. 시프."
몸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시프가 곧바로 알비다의 다리를 확인했다.
그녀의 다리 위에, 나무판자가 올라가 있었다.
"아무것도, 안 느껴져. 시프."
알비다가 울먹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아. 아무것도! 흐허엉."
알비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당황스러웠다.
어찌하면 좋을지, 시프는 아는 바가 없었다.
"나 좀 꺼내줘. 헝헝."
알비다가 울면서 말했다.
그 꺼내 달라는 말.
그 말은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그녀를 구해 달라는 말이었다.
그 말귀를, 시프가 모두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 덕분에,
시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프는 알비다의 뒤로 걸어가, 그녀를 누르고 있는 나무판자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꽤나 무거웠다.
힘을 주어도, 다 들리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케로스님!!"
시프는 케로스를 불렀다.
그 부름에, 케로스가 나왔다.
하지만,
"음···."
뜨뜻미지근한 반응.
"이 판자 좀 치워주세요!"
시프가 부탁했다.
그리고 그 부탁을,
후웅.
바람과 함께, 케로스가 바로 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사라졌다.
그가 바로 사라진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목적은 달성했다.
그녀의 다리를 누르던 나무판자가 치워졌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시프, 빨리 좀 구해줘. 빨리···."
알비다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판자가 치워지면서 드러난 그녀의 다리.
그 다리는, 보기 흉할 정도로 파랗게, 변해 있었다.
- 작가의말
오전에 일정이 있어서 늦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