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감

홀로 길을 떠나게 된 게라드에게,
밤은 가혹한 것이었다.
횃불이 밝히는 것은 밤이었지만,
그 외에 전부는 어둠이었다.
한쪽에는 철썩, 파도 소리.
또 다른 한쪽에서는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그 소리들 사이로 어떤 맹수가,
또 어떤 마수가,
불빛을 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해변을 따라 걸었기 때문에,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벌레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느 지역에서는 사람만 한 벌레가 있다고도 들었었다.
게라드는 어둠에 맞서서,
한 걸음씩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걷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목표가 있었기에,
게라드는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얼마 뒤,
계속 걷는 게라드의 앞에 나타난,
노란 안광.
그 노란 안광이 해변에서 숲 쪽으로,
무언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게라드는 횃불을 들어 그것을 밝혔다.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 무엇이 설마 시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는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횃불에 눈을 움츠리는,
회색 늑대.
그 아래에는,
사슴.
목이 물어 뜯긴 사슴이, 늑대의 아래에 있었다.
게라드는 횃불을 얼른 다시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몸을 숙였다.
도망친 사슴을 늑대가 쫓은 모양.
그리고 늑대가 그 사슴을 자신의 무리에게로 데려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늑대 무리가 있을 것이었다.
늑대가 게라드 쪽을 응시하였다.
불이 밝혀져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게라드는 숨을 죽였다.
솔직히, 겁이 났다.
늑대가,
하지만 다시 사슴의 목을 물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이었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후우."
게라드는, 숨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늑대의 움직임을 끝까지 관찰하였다.
여차하면 바다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늑대는 얌전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은 이만,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 * *
누구지?
시프는 다가오는 실루엣을 응시하였다.
그리고 하나로 보였던 실루엣이,
불빛으로 다가오면서, 둘로 펼쳐졌다.
키가 큰 실루엣과
작은 실루엣.
그리고 불빛을 받아,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 머릿결.
"말렌!!"
시프가 말렌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하이드!!"
하이드도 곧바로 인식하였다.
시프의 목소리에,
말렌과 하이드도 그를 바로 보았다.
해변을 걷던 중 모닥불을 발견하여,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다.
설마 했던 시프가, 그들 앞에 등장하였다.
"시프!!"
말렌과 하이드가 동시에 외쳤다.
그리고 그 둘이, 시프에게로 뛰어왔다.
너무나도 반가운 순간,
하지만 그 순간에도 위험은 있었다.
눈을 꼭 감고 달려오는 하이드.
시프는 자신에게로 곧장 달려오는 하이드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대로 그녀를 받았다간,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말렌이 그녀를 발견하였다.
말렌이, 시프에게 닿기 전에, 하이드를 막았다.
그리고 그에 놀란 하이드.
자신이 힘을 빼지 않은 것에, 자신이 놀란 것이었다.
그리고 몰려오는 안도감.
다행이었다.
하이드는 이제 마음을 놓고,
말렌 그리고 시프를 끌어안았다.
시프와 말렌 그리고 하이드가,
재회를 기뻐하였다.
모닥불이 그들을 밝혀주었다.
재회의 기쁨을 만끽한 후에,
누워있는 알비다를 먼저 발견한 것은,
역시나 말렌이었다.
"레이디? 어디 몸이 좋지 않은 건가요?"
몸을 숙이며, 말렌이 물었다.
"파도에 휩쓸려서. 시프가 도와줬어요."
알비다가 대답했다.
레이디란 호칭이, 그녀는 거북했다.
"오! 시프, 고생했구나. 잘했어!"
말렌이 시프를 칭찬했다.
그 말에 시프가 알비다를 한 번 보고는,
"케로스님이 도와주셔서 가능했어."
그 공을 케로스에게로 돌렸다.
알비다의 마음에 드는 답변은 아니었지만,
자책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여기에서는 만족해야 했다.
"케로스님이? 오···, 역시 케로스님!!"
그리고 케로스라는 말에, 하이드가 반응했다.
여기, 그의 신자가 있었다.
"키야 캬카카캬캬!! 그래 나를 받들어라! 나를 칭송해라!!"
자신을 부르는 신자의 목소리에 부응하며,
케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보는 듯한 그 오만한 모습.
그 모습에, 하이드는 자기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이반과 헤어지고,
동료들과도 헤어지고,
근래에는 생각해보면 울적한 일들이 많았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게라드는? 게라드는 어디에 있어?"
시프가 틈새를 비집고, 물어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게라드는···."
하이드는 바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대신해서,
"게라드는 우리랑 갈라졌어."
말렌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이 조금 어설펐다.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말.
"뭐!?"
시프가 놀라서 물었다.
"널 찾기 위해서, 반대 방향으로 갔어."
말렌이 뒤늦게 부연 설명을 하였다.
시프의 눈빛이 그 말을 듣고, 또 약간 어두워졌다.
자신의 책임을 또 절감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게라드잖아?
이반을 만나든, 우리에게로 돌아오든, 알아서 잘 할 거야."
말렌이 시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그래도 시프를 잘 아는 그였다.
그의 말에, 알비다가 들었던 고개를 다시 내려놓았다.
한결, 마음을 놓았다.
시프도 밝은 얼굴로, 말렌을 마주하였다.
"응! 그 말이 맞아."
시프가 말했다.
다행이긴 하지만 또 씁쓸한 느낌.
자신의 사연을 다 이야기하여도,
동료의 한 마디가, 더 위력이 있었다.
알비다는 그것을 뒤에서 듣고만 있어야 했다.
시프를 가장 잘 이해하는 건 그의 동료였고,
그들 사이에서, 시프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듯,
시프가 알비다를 돌아보았다.
그에 따라, 다시 고개를 살짝 든 알비다.
알비다를 향해, 시프가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비다는, 그에 미소로 화답하였다.
서로가 어색한 미소.
하지만 그것이 이해의 또 다른 걸음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린 당장 움직일 수가 없어.
일단 알비다님이 몸을 다 회복한 후에, 움직어야 해."
시프가 말했다.
"그래. 알았어. 레이디를 위해서라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지."
말렌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알비다가, 자신과 눈을 맞추려는 말렌의 눈을 피하였다.
시프를 북돋아 준 건 고마웠지만, 부담스러웠다.
"응. 좋아. 그럼 오늘 밤을 보내고,
내일은 좀 더 넓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하이드도 동의하였다.
이제는 야숙에 익숙해진 하이드였다.
"그래."
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닥불 위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밤새 이어졌다.
* * *
얼마 간 휴식을 취한 뒤에, 이반은 다시 움직였다.
루시아가 앞장섰다.
루시아를 따라가는 일이, 이반은 익숙하게 느껴졌다.
풍경도, 다시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 똑같아 보이는 풍경 속에서 길을 이리저리 잘 찾아가는 것이,
이반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조금씩 속삭이는 걸로 봐서는, 정령의 도움을 받는 것일 수도 있어 보였다.
자신과 만나게 된 것도, 정령이 얘기해 줬기 때문이었다고 했었다.
이반은 정령에 대해 더 알고 싶었지만,
별다른 말없이 루시아를 따라갔다.
일단은 다크 엘프에게로 이동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척을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루시아에게는 적대적일 것이 분명했다.
들키지 않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그 꿈도 잘 꾸지 않게 되었다.
심연의 힘을 사용한 뒤로 자주 꾸었던 그 꿈.
케로스에 대한 꿈이라고 생각이 되었던 그 꿈을, 이반은 이제 잘 꾸지 않았다.
아마도 마나석을 버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료들은 무사할지 또 잘 있을지, 이반은 궁금해졌다.
괜히 자신을 따라오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자신만의 바람이었다.
이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어서,
어서 이 숲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쉿."
루시아가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숙였다.
이반도 그녀를 따라 몸을 숙였다.
아직 어떠한 기척도 느끼지 못했었다.
루시아가 근처의 나무 뒤로,
천천히 이동하였다.
그리고 손짓.
이반이 그 손짓을 따라, 루시아에게로 붙었다.
그리고 루시아가 눈짓하였다.
어딘가를 보라는 듯한 눈짓.
이반은 그 눈짓을 따라, 나무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떠한 것도,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빈 공간이 있었는데,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그에 놀란 듯한 루시아.
루시아가 다시 손짓하여,
루시아와 이반은 뒤쪽으로 이동하였다.
"안 보여?"
얼마간 떨어진 뒤에, 루시아가 물었다.
몸은 웅크린 채, 그대로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락 거리는 풀숲 사이로, 작게 새어 들어왔다.
"응."
이반이 짧게 대답했다.
그도 기척을 죽이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 너머에 다크 엘프 레인저들이 있었어.
아마도 순찰을 돌고 있는 것 같아."
루시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엘프들은 눈이 더 밝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레인저라니, 반가운 명칭이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하지?"
이반이 물었다.
하지만,
"뭐? 어떻게는 네가 말해야지."
그에 대한 생각을, 루시아는 하고 있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루시아가 이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음··· 그럼 저기엔 몇 명이 있어?"
이반이 물었다.
"세 명."
루시아가 대답했다.
"그럼 다크 엘프는 모두 얼마나 돼?"
이반이 또 물었다.
"이 숲에? 아마 40명 정도?"
루시아가 또 대답했다.
"뭐!?"
이반이 놀랐다.
적대 세력이라, 그 숫자가 비슷할 줄 알았었다.
"왜?"
하지만 루시아는 이반이 놀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 아냐."
이반이 말을 삼갔다.
조금 물러났다고 하더라도,
근처에서 대화를 오래 나누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40명이라니,
말 한마디에 죽일 수는 없는 숫자였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그걸 부탁한 쪽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일단은 사태를 다르게 파악해야 했다.
여기에서 마찰을 일으켰다간,
결국 다크 엘프 모두와 대척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만약의 경우,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전쟁을 부추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반은 그냥 일어섰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루시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는 안 됐다.
하지만 이반은, 루시아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크 엘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아가, 놀라서 뛰쳐나가,
이반의 앞을 막아 섰다.
'지금 뭐하는 거야?'
루시아가 속삭였다.
하지만 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멈춰 서서, 루시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 너희! 두 손 올려!"
다크 엘프 레인저들이, 이반과 루시아를 포위하였다.
인상을 크게 찌푸리는 루시아.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그녀였다.
이반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크 엘프들을 돌아보았다.
"인간, 그리고 엘프? 왜 우리 구역을 침범한 거지?"
다크 엘프가 물었다.
엘프와는 반대되는 어두운 피부.
그리고 푸른빛을 띠는 은빛 장발.
나무 틈 사이에서도, 그 은빛은 달빛처럼 잘 보였다.
하이드가 생각나는 머리색이었다.
"도움을 구하러 왔어."
이반이 말했다.
루시아가 이반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반의 배신에, 그녀가 치를 떨었다.
움직일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반에게 활을 쏴버릴 기세였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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