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

한참 생각을 하고 난 뒤,
"알겠습니다."
호손이 말했다.
"그럼 숲 밖으로 안내하는 건 의미가 없겠군요."
호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반을 똑바로 마주하였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말 우리 마을을 해하실 거라면,
저는 당신을 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호손이 물었다.
그의 눈빛에 긴장감이 물씬 어려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는 당신의 도움을 받아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아우렐에게 그런 힘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반이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러자, 호손이 이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또 숨기는 게 있습니까?"
호손의 눈이 이반을 관찰하였다.
그는 이반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이미 이반이 그를 실망시켰기 때문이었다.
"없습니다."
이반이 짧게 대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심장을 꺼내서라도,
진심을 보이고 싶었다.
그만큼 이반은 간절했다.
가능하다면 호손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가 그냥 질문을 던진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호손이,
"제 생각에 당신에게 남은 건 세 가지 선택지입니다.
그리고 그중 두 가지를,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였다.
"좋습니다. 말해주세요."
이반이 말했다.
"그전에 먼저, 자리를 좀 옮기죠.
여기는 너무 트여있습니다."
호손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시아를 보았다.
그녀도 함께 갈 것이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루시아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연히 이반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반의 선택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반은, 그것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도울지,
아니면 파나로 돌아가 자신의 선택을 알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녀를 두고 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반은 그녀를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이반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반은 호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도 함께 간다는 의미였다.
호손은 그것을 원치 않는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이반의 결정을 수용하였다.
* * *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석양을 등지고, 한 남자가 걸어왔다.
얼핏 봐도 키가 말렌만한, 큰 남자였다.
남자가 게라드를 발견하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게라드는 다소 놀랐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뾰족한 귀와 노을에 주황빛으로 물든 노란 머리가 그 사실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노파는 아들이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노파의 아들은 아니어 보였다.
그녀는 대꾸하기가 귀찮았던 것이었다.
"넌 뭐지?"
남자가 물었다.
불청객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저는 게라드, 상인입니다."
게라드가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다.
"노인은, 무사한가?"
남자가 물었다.
인사보다도 그녀의 안위가 먼저인 듯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그저 도움을 받고자 왔을 뿐입니다."
게라드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남자가 게라드를 지나쳐,
벌컥.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할매!"
노파를 불렀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다소 컸는지,
"나 안 죽었어!!"
노파가 성질을 버럭 냈다.
그래도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에 마음이 놓인 듯했다.
"잠깐 있어 봐!"
남자가 노파에게 말했다.
그리고 끼이익.
문을 닫았다.
문 너머로 노파가 뭐라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남자는 이제 게라드에게로 주의를 옮겼다.
"나는 바르거스(Vargus)라고 한다. 보다시피 엘프다."
바르거스가 말했다.
"엘프?"
"아, 엘프는 처음 보나? 금지된 숲까지 왔길래 아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용건이 뭐지?"
바르거스가 물었다.
그는 나름 친절해 보였다.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습니다."
그 기대가 정말이기를 바라며, 게라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렵겠군."
기대하던 대답을 게라드는 들을 수 없었다.
"네?"
반사적인 물음.
"나도 도와주고야 싶다만, 보시다시피 오두막이 좁아서 말이야.
몸을 뉠 공간이 없어."
바르거스가 오두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할매 코 고는 거 장난 아니라고.
듣고 싶지 않을걸?"
바르거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
그걸 들은 건지, 안에서 노파가 뭐라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이 앞에서 밤을 보내는 건 괜찮을까요?
어제 저녁엔 또 늑대를 만나서요. 혼자 밤을 지새우는 건 무섭습니다."
게라드가 말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바르거스가 게라드를 가만 보았다.
그 또한 노파처럼 나름의 가늠을 하는 모양이었다.
"뭐··· 그래. 그럼 덮을 거라도 가져다 주도록 하지."
반가운 일.
바르거스가 게라드를 받아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게 된 건가?"
바르거스가 이제 호기심을 보이며 물어왔다.
게라드가 머물 것이기에 한 물음이었다.
"원래는 네빌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서,
배가 뒤집히고, 여기까지 떠밀려왔습니다."
게라드가 말했다.
"뭐?! 로렐 해협에서 말인가?"
바르거스가 놀라 물었다.
약간 옛날 사람 같은 말투.
확실히 엘프는 장수한다고 알고 있었다.
"네. 갑자기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작은 배도 아니었는데, 단숨에 뒤집혀 버렸습니다."
게라드가 손짓을 섞어 말했다.
"호오···. 신기하군. 로렐 해협의 날씨는 항상 맑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 일도 다 있었군."
바르거스가 턱을 만지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어르신은 어쩐 일로 여기에 머물게 되신 겁니까?"
게라드가 물었다.
바르거스의 말투에 맞는 호칭이었다.
그러자, 바르거스가 게라드를 보고,
"그 얘긴 나중에 하지. 우선 불이나 피우고 밥이나 먹자고. 거들어 줄 텐가?"
말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안.
"좋습니다."
게라드가 대답했다.
이제 석양이 그 마지막 붉은빛을 찬연히 태우고 있었다.
* * *
"제가 말씀드릴 건 두 가지입니다.
왜 두 가지인지는 아시겠죠?"
호손이 말했다.
호손이 말한 세 가지 선택지 중 두 가지.
나머지 하나는 물론 아우렐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일 것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의 얼굴 옆에, 루시아의 얼굴이 나란히 있었다.
물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호손과 이반, 그리고 루시아는 어느 고목의 안에 있었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마른 나무.
그 안의, 딱 셋넷 정도가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공간.
프로스트 다운의 동굴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케로스는 함께가 아니었다.
"우선 한 가지는 아우렐을 죽이는 겁니다."
호손이 말했다.
그리고, 이반과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둘 모두, 동요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던 모양.
"두 분 다 짐작하고 계셨나 보군요. 하지만, 실제는 생각보다 더 어려울 겁니다.
숲의 주인인 그를 지금 상태로, 맞상대해서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그의 사각으로,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가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아무리 숙련된 암살자라고 하더라도 어려울 겁니다."
호손이 얘기했다.
암살자란 얘기에 이반의 안색이 잠깐, 바뀌었다.
그런데 그 안색을, 호손은 다르게 읽었다.
이반의 낯빛이 두려움으로 어두워졌다고 그는 파악했다.
"네. 사실 이 방법은 고려 사항이 아닙니다.
물론 아우렐을 상대하시겠다고 하면,
주의를 끄는 것 정도는 해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또한 제 동족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일이죠."
호손이 숙연한 말투로 얘기하였다.
"그럼 나머지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이게 더 어려울 수도 있는데,
그 나머지 하나는 바로, 아우렐을 설득하는 겁니다."
너무나도 순진한 말.
"예?"
황당했다.
죽이는 게 어렵다면서 설득을 하자고?
말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호손의 말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냥 말로 설득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 동족을 처단하는 것,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아우렐에게 대가로 지불하자는 겁니다."
호손이 부연했다.
"그럼 그 대가는 뭐죠?"
이반이 물었다.
"이 금지된 숲, 가장 안쪽에 '화이트 포레스트(White forest)'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호손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설마!"
루시아가 크게 놀라며 반응했다.
"예. 상위 정령들이 기거하는 곳입니다.
그 안에 있다고 알려진 전설의 보옥,
'정령의 별'을 대가로 지불하는 겁니다."
호손이 말했다.
"정령의 별이라고요?"
이반이 물었다.
"네. 모든 정령들을 부릴 수 있다고 알려진 보옥입니다.
아마 그것을 가져간다면 아우렐도 받아들일 겁니다."
호손이 설명했다.
"그건 그렇긴 하겠지만···."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불안한 듯,
그 긴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정령들이··· 우리를 영혼째로 정화시켜버릴 거야."
루시아가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보통은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길을 압니다.
정령들의 눈을 피해서 갈 수 있습니다."
호손이 자신했다.
그의 자신감을 다 믿을 수 있을까.
"거짓말!! 그런 길이 있을 리가 없어."
루시아가 그를 불신했다.
이반은 호손 그리고 루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또 선택이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루시아의 불안과 호손의 자신.
아우렐의 암살 또는 설득.
그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이반은,
"절 거기로 데려가 주세요, 호손."
호손을 한 번 더 믿기로 하였다.
이반은 또다시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종지부를 찍고 싶지 않았다.
다른 길이 있다면, 한 번 시도 정도는 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우렐이, 방해는 되어도,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암살하는 것이 그렇게 내키지도 않았다.
"그럼 바로 가시죠. 지체하다간, 아우렐이 훼방을 놓을지도 모릅니다."
호손이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우렐이 훼방을 놓는다라···,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었다.
"좋습니다."
이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확인하고,
호손이 먼저 나무 밖으로 나갔다.
이반 또한, 그를 따라 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후회할 거야, 이반."
루시아가 이반의 팔을 잡으며, 또 악담을 뱉었다.
이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루시아."
이반이 물었다.
아우렐을 죽인다고 한다면, 도와줄 것이었나?
그러지 않을 거면서,
다른 선택에 대해 토를 다는 것이 이반은 이해가 안 됐다.
"저 다크 엘프를 정말로 믿을 거야?
딱 봐도, 꿍꿍이 속이 있잖아!"
루시아가 다그쳤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다크 엘프들을 정말로 몰살시키고 싶어?"
이반이 되물었다.
루시아는,
"아니, 나는···."
그에 대답을 잘하지 못했다.
그녀도 직접 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것이었다.
애초에 아우렐도 직접 하기 싫어서 부탁한 게 아니었나.
"그럼 그냥 잠자코 따라와.
아니면, 마을로 돌아가든가."
이반이 엄포를 놓았다.
그에겐 한시가 급했다.
루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반은 그녀를 뒤로하고,
고목을 나섰다.
그리고 호손을 마주하였다.
"가시죠."
이반이 말했다.
"좋습니다."
호손이 호응했다.
그리고 그 둘이 발을 옮겼다.
그런데,
"잠깐만!"
루시아가 고목을 빠져나오며, 소리쳤다.
그녀도 함께 갈 요량인 것 같았다.
"함께 가실 거면 이름을 밝히셔야 합니다!"
호손이 이때다 싶어 말을 꺼냈다.
그리고,
"루시아야!"
루시아가 대답했다.
그녀가, 다가왔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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