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의 별

"정말로 듣고 싶나?"
바르거스가 물었다.
반응을 살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묻는 건지, 궁금한 듯했다.
"네. 듣고 싶습니다."
게라드가 답했다.
말을 주워담을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도움이 된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래···. 그럼 일단, 밥이나 먹고 얘기하지."
바르거스가 솥을 응시하며 말했다.
토끼 스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아! 네."
기대감이 사그라들면서,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급할 것은 없었다.
"으차."
바르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노파를 깨우러,
아니라면 식기를 가지러 갔을 것이었다.
게라드는 하릴없이 솥 안을 응시하였다.
토끼 고기가 들썩들썩,
터지는 기포를 따라 움직였다.
불길을 담은, 어두운 주홍색의 기포였다.
잠시 후, 바르거스가 식기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식기를 게라드의 옆에 놓은 바르거스는,
국자로 스튜를 휘휘 젓고,
슬쩍 맛을 보았다.
그리고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한 국자 크게 퍼서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다음 그것을 들고 집 안으로 가져갔다.
노파를 위한 것인 모양이었다.
다 먹지 말라고 한 건 역시나 짓궂은 농담이었다.
끼이익, 문이 닫히고,
바르거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으차."
게라드의 옆에 앉았다.
"안 먹고 뭐하고 있었어? 설마, 퍼 주기를 기다렸나?"
바르거스가 물었다.
그 시비조의 말투는 어디 가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게라드가 국자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바르거스가 국자를 낚아챘다.
"하하, 어림없지."
바르거스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어쩌자는 건지,
게라드는 마음의 소리를 삼켰다.
짓궂은 말과 장난을 즐기는 모습,
어쩌면 대화 상대가 없어서 그렇게 된 걸지도 몰랐다.
굳이 그것을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바르거스가 스튜를 한 국자 크게 퍼서,
그릇에 담고, 그것을 게라드에게 건넸다.
"자, 드셔보게."
바르거스가 농담조로 말했다.
거리감이 또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게라드가 스튜를 받았다.
그리고 한 스푼 떠서,
호호 불고, 먹어 보았다.
입안에 퍼지는 담백함과 충만감.
혀 위로 그 맑은 국물이 촥 퍼졌다.
그 뒤로 느껴진 건,
토끼 고기의 신선한 냄새와 그와 어우러진 허브 향.
허브 향이 고기 냄새를 더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고기.
고기는 약간 쫀득한 듯 퍽퍽했지만,
같이 먹은 감자가 고깃결 사이로 배어들어,
부드럽게 씹어 삼킬 수 있었다.
기대하지 못했던 좋은 음식이었다.
"맛있네요!"
게라드가 감탄하였다.
게라드의 반응을 보고,
"후후, 몇 십년을 해먹은 건데, 당연하지."
바르거스가 뿌듯한 듯, 미소를 지었다.
바르거스는 곧바로 자신 몫의 스튜도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먹었다.
고상한 모습.
바르거스가 자신이 먹는 음식에 예의를 갖추며,
음식을 먹었고 그것은,
여느 성인에게서도 보기 어려운 겸허한 모습이었다.
게라드는 바르거스의 배경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혹시 아까 그 얘기···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게라드가 물었다.
그의 스푼이 그릇 위에 놓여있었다.
"일단 음식을 다 먹고 얘기하지."
바르거스가 뜨고 있던 스푼을, 멈추고 말하였다.
괜히 방해한 듯한 느낌.
"아, 죄송합니다."
게라드가 사과했다.
그리고 다시 스푼을 들어 음식을 먹었다.
"음~. 역시 좋네요."
너스레를 떨어보았지만,
바르거스는 호응하지 않았다.
조용히 스푼을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
아무래도 식사 때는 건드리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 * *
"이반, 눈치채셨겠지만 저 파장에 닿아서는 안 됩니다.
저 파장에 닿는 순간, 정령들이 몰려올 겁니다."
호손이 말했다.
이 앞의 길, 파장을 지나가는 방법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정령의 별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이반의 책임이 되었다.
물론 사정이 급한 건 이반 쪽이었다.
저 별을 가져가, 아우렐과 교섭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저 자주색 별을 가지고 나온단 말인가?
하얀 파장은 멈출 기미도 없이, 거세게 요동쳤다.
그것도 불규칙하게, 침입자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반, 빨리! 빨리 해야 합니다.
여기 오래 머무는 것도 위험합니다."
호손이 또 보챘다.
이렇게 보채는 성격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반은 방법을 몰랐다.
"어떻게?"
이반이 혼잣말하듯 말을 뱉었다.
그러자,
"스피릿을 쓰세요. 스피릿!
빠르게 가지고 나오면, 괜찮을 겁니다."
호손이 대답했다.
스피릿? 마나? 빠르게?
아, 그러고 보니 눈을 보호할 때 봤던 건가?
이반이 그림자를 쓴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빨리, 이반! 서두르세요!!"
이반이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호손이 또 몰아붙였다.
상위 정령이 그렇게나 겁나는 것인가?
이반은 겪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그래도 일단은,
그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반이 그림자를 몸에 둘렀다.
"오···!"
감탄하는 호손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뒤로하고,
이반은 하얀 파장의 범위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반의 앞으로 하얀 채찍이 휘둘렸다.
이 범위 안에서는,
바닥으로만 파장이 퍼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를 두른 이반은,
그것을 몸을 돌려,
그리고 또 그림자를 축소하여,
가뿐히 피해냈다.
그 뒤로 다가온 파장도,
같은 방법으로 피해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해내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앞으로 갔을 뿐인데,
파장이 짧아져 접근이 어려워졌다.
이반의 평소 속도보다도 빠른 속도로,
파장들이 휘둘리고 있었다.
이반은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서 위아래로 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반은 위아래로 뛰면서, 파장을 관찰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규칙성도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서둘러요, 이반!!"
집중을 깨는 동행도 있었다.
이반은 그래도 눈앞의 과제에 집중했다.
집중을 놓치면, 제자리에서 뛴다고 해도 파장에 닿을 수도 있었다.
이반은 파장들을 눈에 익히면서,
빈틈을 찾았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정령의 별까지 통할 수 있는 길.
그 길을 이반은 찾아보았다.
하지만,
역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반은 좌절하지 않았다.
다시 파장들을 관찰하였다.
그런데 순간,
너무 집중한 건지,
몸이 비틀, 옆으로 꺾였다.
어?
하얀 파장이 이반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반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똑바로 하여 그것을 피하였다.
이반의 뒤로 파장이 허공을 갈랐다.
"이반!!"
호손이 걱정된 건지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반은,
그 말이 멀게 느껴졌다.
몸이 꺾이면서 무언가 본 것이었다.
이반은 이번에는 스스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보았다.
자세히 보니 파장들이,
비스듬하게 휘둘리고 있었다.
이반은 고개를 들어 파장의 윤곽을 살폈다.
그리고 발견하였다.
'그랬나! 그런 것이었나!!'
이반이 발견한 것,
그것은 바로,
파장이 범위 안에서는 구의 형태로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구의 형태를 집중해서 보니,
총 세 개의 파장이 서로 겹치면서 퍼지고 있었다.
길이와 속도가 다른 세 개의 파장이,
자주색 발원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불규칙해 보였던 것이었다.
이반은 이제 그것의 정체를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길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반은 그것을 곧바로 찾아내었다.
하지만 이반이 발견한 길.
그 틈은 너무나도 작았고, 너무나도 잠깐이었다.
이반은 긴장이 됐다.
아마도, 심연의 힘을 빌어야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었다.
하지만 그 심연의 힘은 이젠 사용할 수 없었고,
이반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후우···.'
이반이 속으로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위아래로 통통 튀면서,
그림자를 수축하였다.
노리는 것은 자주색 발원, 정령의 별.
그것에 집중하여, 이반이 한계까지 그림자를 수축하였다.
하지만, 부족하였다.
이대로는 파장에 닿고 말 것이었다.
적어도 한번은 더 수축해야만 했다.
이반은,
통,
튕김과 동시에 그림자를 한번 더 수축했다.
그리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
그림자의 무리한 수축에,
몸이 그 압력을 버텨내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이것을 풀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세 파장이 교차하며,
이반이 찾았던 그 틈이 나타났다.
의식이 날아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이반은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돌진하였다.
자주색 발원으로.
하얀 파장에 닿지 않고,
그 틈 사이로,
직진하여,
자주색 발원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땅속에 묻힌 정령의 별을 꺼냈다.
자주색 보석.
그리고, 돌아보았다.
하지만, 파장이 여전히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치지 않은 것이었다.
정령의 별을 꺼내면 파장도 그칠까,
기대를 걸어봤지만, 그러지 않았다.
별개의 문제였다.
다행히도 발원 부근에서는 파장이 치지 않았지만,
돌아갈 힘이, 이반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이반! 제게 던지세요!!"
호손이 이반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대신 가서 협상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호손이 말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
이제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팠고,
힘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이반은 다시 한 번 집중하였다.
극한까지 밀어붙인 몸이었지만,
어떻게든 또 집중은 할 수 있었다.
사람의 몸이란 게,
마치 한계를 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반은 그 집중력과 남은 마나를 쥐어짜서,
정령의 별을 던졌다.
그 자주색 동그란 별이,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추고,
하나의 점이 되어 날아갔다.
그리고 호손의 눈앞으로, 뻗어나갔다.
탁!
호손이 정령의 별을 받았다.
하나의 까만 점이었던 그것은,
빨갛게 달아오른 호손의 손바닥 위에서,
그림자를 벗고,
그 자주색 광채를 되찾았다.
호손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 표정,
그 기색은 왠지 모르게 위험해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반은 이제, 어쩔 수 없었다.
호손 밖에, 그는 기댈 곳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반! 제가 꼭!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호손이 소리쳤다.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픽, 옆으로 쓰러졌다.
이제는 정말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호손이 그것을 보고,
달아나듯 뛰어나갔다.
* * *
무료한 시간의 연속.
시프는 바다 너머를 자주 바라보게 되었다.
호라 마을에서 이반을 만나고,
함께 모르닥스를 잡고,
파루스에서 데스체이서를 잡고,
만부스에서 또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그리고 굴포트에서는 갈란투스 행사를 함께 열었었다.
지난 날들을 떠올려 보니,
꿈만 같았고,
꿈이라도 그런 일들을 경험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꿈을 꾸게 해 준 이반과 헤어졌고,
자신이 이반을 내치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옳게 느껴졌던 일인데,
역시 다르게 행동했어야 했나 싶었다.
"케로스님."
시프가 케로스를 불렀다.
"뭐냐, 꼬맹이."
케로스가 나타났다.
"이반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시프가 물었다.
그러자, 케로스가 잠시 눈을 감더니,
다시 그 눈을 뜨고,
"아직 금지된 숲에 있다."
대답했다.
"그렇구나···."
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냐, 그게 다냐 꼬맹이?"
케로스가 물었다.
그 물음에,
"이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시프가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정말 궁금했던 건 이쪽이었다.
하지만,
"흥! 난 점쟁이가 아니다, 꼬맹이.
미래에 대해선 알지 못해."
케로스는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했다.
"그치만···."
시프가 말을 삼켰다.
이반이 그립기도 하고,
죄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그럼···, 이반이 그 금지된 숲이라는 곳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시프가 물음을 다시 바꾸어서 던졌다.
마치 신탁을 기다리는 듯, 간절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케로스가 조금 진지하게 궁리하였다.
그리고,
"아마 힘들긴 할 거다. 하지만,
애송이가 자신이 가진 힘을 깨닫는다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
대답했다.
"힘이요? 이반에게?"
시프가 되물었다.
"그래. 심연의 힘이지. 애송이는 아직 그 힘을 다 깨닫지 못했어."
케로스가 말했다.
그 심연이란 것이 무엇인지, 시프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알 생각도 크게 들지 않았다.
그 말이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시프는 그저 이반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 작가의말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 선호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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