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공간

화이트 포레스트의 하얀 파장 안에서,
이반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반에게,
하얀색 빛들이,
하얀색 빛의 뭉치들이 다가왔다.
하얀색 뭉치들은,
이반의 주위를 서성이다가,
그의 곁으로 하나둘 씩 다가와 붙었다.
그리고 이반은,
어떤 악몽을 꾸는 듯,
눈살을 강하게 찌푸렸다.
주변이 모두 하얀 공간.
그 안에,
이반이 홀로 까만 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웅크린 채로 누워있던 이반이,
"으으···."
의식을 찾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하얀 공간이었다.
그런데, 땅 아래에서,
하나둘,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형체가 불분명한 검은 연기들.
그 연기들 안에는 어떤 구체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뭉쳐져 있는 구체를 중심으로,
연기들이 이반에게로 다가왔다.
이반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했다.
도망칠 곳도 보이지 않았고,
왠지 모르지만 몸도 움직이지 않았기에,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그냥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반에게로 다가온 연기들은,
이반의 형체를 빨아들였다.
그것을 인지하고,
"으아아아아!!!"
이반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하얀 공간에서,
그 비명을 들어줄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반의 몸의 경계 부분이,
연기로 변화하며,
검은 연기들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검은 연기들이 이반의 몸을 계속 연기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댔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만, 그만!!"
이반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 검은 연기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말을 들을 수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이반은 자신의 몸이 그 끝에서부터 사라져 가는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목도했다.
그 어떤 광경보다도 끔찍한 광경,
그 어떤 경험보다도 끔찍한 경험이었다.
손 마디마디의 끝부터,
팔뚝과 어깨,
머리와 코끝 그리고 입술,
발끝과 종아리, 허벅지까지,
검은 연기들이 쉬지 않고, 영역을 넓혀나갔다.
어느새 이반의 얼굴이 반쯤 사라졌고,
그의 사지 또한 전부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눈 한쪽을 포함한 얼굴의 반과,
가슴팍,
그리고 조금이나마 붙어있는 목 뿐이었다.
이반이 남은 눈으로, 남은 몸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그 동공이 분주하게 흔들렸다.
소리 지를 목과 입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남아있는 눈마저도,
조금씩 조금씩 깎여나갔다.
몸도, 이제는 심장 부근까지 침범 당했다.
심장.
그런데, 그 심장 부근에서 검은 연기가,
하나 피어오르고 있는 것을,
그 시야가 전부 사라져 버리기 전에,
이반이 목격하였다.
다른 검은 연기보다도 더 탁한 어둠.
시야가 사라지며,
의식 또한 검게 칠해지는 순간,
그 일말의 순간에,
이반은 그 검은 연기를,
그것의 정체를 알고 싶어졌다.
그것을 본 기억이, 언젠가 있었다.
그림자의 손?
아니, 그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렇게까지 어둡지 않았다.
이반이 본 것은,
조금 더 어두운 것,
조금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설마.
이반이 가능성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이반의 몸은,
그 한 톨의 심장밖에 남지 않았다.
이반은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끝이, 그의 바로 곁에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 톨 심장 속에서,
가장 어두운 연기가, 휙 피어오르고,
남은 심장이,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 *
식사가 끝나고,
게라드는 바르거스를 도와 식기를 정리하였다.
정리를 돕는 와중에도,
그의 신경은 바르거스의 사연으로 향해 있었다.
몇 번 들을 기회가 유보되어서인지,
관심이 많이 갔다.
정리를 모두 마친 후에,
바르거스와 게라드는 다시 모닥불 앞에 앉았다.
바르거스가 찻주전자를 가져와서,
그것을 불 위에 올렸다.
이제는 불이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잠에 들기 전에 다시 조금 피우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게라드가 물었다.
차가 다 끓을 때까지 기다릴까 했지만,
그 잠깐을 참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바르거스가 조용히, 게라드를 응시하였다.
섣불렀던 걸까.
걱정이 들었지만,
"그렇지. 얘기해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군."
바르거스가 대화를 응하였다.
"뭐, 간단해. 아우렐이 나를 쫓아낸 건,
내가 바로 그의 동생이기 때문이지."
바르거스가 대답했다.
"동생이요? 그 아우렐은··· 숲의 주인이라던?"
게라드가 놀라며 물었다.
"그래. 그의 유일한 혈육이라네.
하지만 그 때문에, 쫓겨난 거야."
바르거스가 불을 응시했다.
"엘프들은 보통 자손을 많이 갖지 않아.
인간들을 피해 숲에 자리 잡고 나서는 더 그랬지."
확실히, 게라드가 읽었던 문헌에서도 그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성욕이 많지 않다고.
자손을 갖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문헌에는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도 쓰여있었는데,
바르거스는 방금 전에 토끼 고기를 잘만 먹었다.
그런 부분은 잘못된 건가, 아니면 바르거스가 쫓겨나서 그런 건가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새로운 숲에 정착해서 기분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미래를 낙관적으로 봤던 건지,
우리 부모는 아우렐이 이미 있음에도 나를 낳았어."
바르거스가 찻주전자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끓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물론 우리 부모도, 신목이, 그리고 숲이,
아우렐을 선택할 줄은 몰랐을 거야."
바르거스가 말했다.
그의 말에서, 착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신목의 선택은 바꿀 수가 없는 것이고,
그 힘을 온전히 받기 위해서,
아우렐은 나를 숲 밖으로 쫓아낼 수밖에 없었지.
물론 나도,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거고."
바르거스가 찻주전자를 다시 들어봤다.
그리고 이제는 충분히 끓었는지,
그 안에 찻잎을 한 줌 쥐어 넣었다.
찻주전자는 이제 그의 발아래,
나란히 놓여있는 컵 옆에 자리하였다.
"뭐, 그런 얘기라네. 내가 쫓겨난 건, 단순히 신목의 선택 때문이야.
할매는 나 오기 전에도 여기에 살고 있었고,
그때는 그래도 비교적 아가씨였지.
아니군. 제 반려를 잃은 과부였어.
여기에서 우연히 만나서, 서로 의지하며 지내게 되었지.
그런데 그것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군."
바르거스가 씁쓸한 듯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 컵에, 차를 따라 부었다.
먼저 따른 한 잔을,
"마실 텐가?"
바르거스가 건네며 물었다.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게라드는 그 차를 기쁘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호호 불어 마셔 보았다.
쓰지 않고 달큼한 느낌.
적당히 잘 우려낸 차였다.
꿀이 들어간 건가 꽃이 들어간 건가 궁금했다.
하지만 다시 맛을 보니,
꿀이 들어간 만큼 달지는 또 않았다.
게라드는 바르거스를 보았다.
그는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난 날의 여운을 맛보는 건지,
그 표정이 아련해 보였다.
"그럼 숲의 주인이 된다는 건 어떤 거죠?
도대체 어떤 힘을 가지게 되는 건가요?"
게라드가 물었다.
애초에 질문의 의도는,
이반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보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을 모으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됐다.
"숲의 정령들을 부릴 수 있게 되지.
상위 정령들까지는 아니지만,
정령들에게 명령을 강제할 수 있어."
바르거스가 대답해 주었다.
그가 차를 마셨다.
"그럼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건···."
게라드의 의문.
"정령들의 힘을 빌려,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하게 만드는 거지.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고."
그 의문에, 바르거스가 답을 제공해 주었다.
"숲에 발을 들인 순간, 네 동료의 존재를 아우렐은 눈치챘을 거야.
그리고 아우렐은 이방인을 그냥 보내 주지 않지. 무엇이든 대가를 지불해야 할 거야."
바르거스가 부연했다.
하지만,
"그 대가라면?"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조금 더 정보를 캐내고자 하였다.
"엘프의 편에 서는 것이나,
정령의 별을 가져오는 것 등이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생각나는 건 다크 엘프의 처단이겠군."
바르거스가 대답했다.
밤이 무르익어서인지,
미련이 없어서인지,
그는 대답을 곧잘 해 주었다.
이 틈에 더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게라드는 하였다.
"다크 엘프의 처단이요?"
게라드의 연속된 물음.
하지만 이번에는 그 물음을 듣는 바르거스의 눈치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바르거스가 컵 안을 확인하였다.
아직은 차가 남아있을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바르거스가 남은 차를 모두 들이켰다.
대화의 여지가,
허락된 시간이 다한 것만 같은 느낌을,
게라드는 받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도움이 될만한 것은 아직 듣지 못했다.
게라드는 자신의 컵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차가 남아 있었다.
게라드는 자신의 차를 조금 홀짝였다.
그리고 그것이 남아있다는 것을,
컵을 살짝 흔들며, 은연 중에 나타냈다.
그리고 그것을 바르거스가 보았다.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모양이군."
바르거스가 말했다.
"그래. 기왕 얘기를 시작한 거, 모두 말해주도록 하지."
바르거스가 결심하였다.
게라드는 그 결심을 듣고, 속으로 기뻐하였다.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다크 엘프는 한 이백 년 쯤 전에 숲에 들어왔어.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
이백 년 전이 최근이라는 말.
그 말은 인간 입장에서는 박탈감이 드는 말이었다.
몇 대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지도 알 수 없는 시간.
그조차도 안되는 시간에,
무언가 족적을 남기고자 인간은 아등바등 살고 있었다.
"아우렐 이전의 엘프 수장은 그들이 숲에 자리 잡는 것에, 별 대응을 하지 않았어.
어차피 자신은 영면에 들 것이었으니,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었지.
하지만, 그 사이에 다크 엘프들은 자신들만의 신목을 키워냈고, 그를 바탕으로 정령들을 포섭했어.
많은 정령들이 우리의 관할을 벗어났고, 그중에는 드라이어드(Dryad)들도 있었지."
바르거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던 듯했다.
"아우렐은 일찍부터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
뭐, 사실 그때의 수장 빼고는 모두 같은 마음이었어.
하지만 이제 와서는 다크 엘프의 세력이 커졌고,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수준까지 되어버렸어.
그 간악한 놈들.
아마 그들의 처단을, 아우렐이 부탁했을 거야.
그것이 그의, 아니, 우리의 숙원이었으니까."
바르거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갈등의 골이 깊어 보였다.
이반이 생각보다도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수 있음을,
게라드는 직감하였다.
가능하다면 그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를 도와주러 가야 했다.
"그럼 제 동료를 도울 방법은 없을까요?"
게라드가 바르거스를 보고, 직접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
게라드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에,
바르거스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없는 것 같네."
들려온 대답은 얄짤없었다.
바르거스는 단호했다.
고개 드는 무력감.
그래도,
"그럼, 저를 도와주실 수는 없는 걸까요?"
게라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미안하네. 나는 숲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라네."
바르거스는 단호했다.
게라드는 컵을 꽉 쥐었다.
그의 의지가, 그의 마음이 요동쳤다.
방법이 정말로 없는 것일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바르거스는,
"그럼 이만 일어나겠네. 밤이 깊었으니, 불을 조금 더 지피도록 하게."
그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바르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붙잡을 말이, 게라드는 떠오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게라드는 하는 수 없이 바르거스를 그대로 보내주었다.
"후···."
게라드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컵을 보았다.
그의 컵 안에, 남은 찻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 작가의말
1/14일 수정) 백림 -> 화이트 포레스트
백림이란 이름이 멋있게 느껴져서 사용했는데 분위기에는 안 맞을 것 같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