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

그런데, 이반이 하얀색 뭉치를 베어 물려고 하자,
'잠깐! 잠깐만요!!'
어떤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목소리의 출처는 아마도 하얀색 뭉치.
역시 정령이었던 건가.
"뭐지?"
이반이 하얀색 뭉치를 입에서 떨어뜨리고, 물었다.
대화가 가능해 보였다.
'살려주세요! 다신 안 그럴게요!'
하얀색 뭉치가 사정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하얀색 뭉치 주위로,
다른 하얀색 뭉치들이 모여들어서,
둥둥 뜨며, 함께 이반을 말렸다.
그런 의사 표현을 해 왔다.
그런데 이반은,
"왜 그래야 하지?"
퉁명스러웠다.
사정한다고 들어줄 이유도 없었거니와,
그럴 여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하얀색 뭉치.
곧이어 하얀색 뭉치에게로 다른 하얀색 뭉치들이 모여들었다.
이반이 두르고 있는 어두운 연기, 심연의 그림자를 피하며 최대한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상의하는 듯,
꾸벅꾸벅 작은 움직임을 연이어 보였다.
이반은 조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기력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긴 했지만,
이들이 루시아가 두려워했던 그 상위 정령들이라면,
도움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이 모두 잡아먹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게다가, 이들을 먹는다고 기운을 다 회복할 수 있을지,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긴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저기···.'
하얀색 뭉치가 말을 걸어왔다.
이반은 그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얘기해 보라는 눈치.
그 눈치를 보고,
'혹시 무엇이 필요하시나요?'
하얀색 뭉치가 물어왔다.
"몸을 회복할 것과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
이반이 바로 대답했다.
이미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
하얀색 뭉치가 반응했다.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를 한 것이 아니었나?
조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왠지 모르게 소심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여긴 먹을 게 없어요. 여기에는 우리밖에 없어요.'
하얀색 뭉치가 대답했다.
"그럼 너희는 뭘 먹지?
너희는 먹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이반이 물었다.
괜히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가능성을 미리 말했다.
그런데,
'저희는 영혼을 먹죠.'
너도 알지 않냐는 듯한 뉘앙스로, 하얀색 뭉치가 대답했다.
물음에 대한 답변만 제공하는 짧은 대답.
왠지 열받는 느낌이었다.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처럼 여기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 아냐.
이제부턴 다음 물음까지 생각 좀 해서 말해."
이반이 그것을 지적했다.
그런데,
'다음 물음까지요? 어떤 말을 하실지 제가 어떻게 아나요?'
하얀색 뭉치가 말대꾸하였다.
맞는 말.
맞는 말인데, 답답한 말이었다.
"아니, 가능하면 대답을 한 번에 하라고."
이반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말했다.
'으악! 네! 네! 알겠어요! 알겠으니 그만!!'
하얀색 뭉치가 소리쳤다.
이반은 괴롭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반응이 재밌었다.
답답한데, 왠지 모르게 정이 가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럼 아까 물었던 것부터 대답해.
너희들은 뭘 먹지? 여기 영혼이 자주 오는 건 아닐 거 아냐."
이반이 물었다.
그런데 그 말에 또 하얀색 뭉치가 멀뚱멀뚱.
그 눈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는 바로 감이 왔다.
"빨리!"
이반이 채근했다.
'아! 네! 네!'
하얀색 뭉치의 반응.
이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영혼이 자주 와요. 영혼 뿐만 아니라 스피릿도.
최근에는 더 많이 오고 있어요.'
하얀색 뭉치가 대답했다.
"온다고? 어떻게? 내가 한 번에 말하랬지!"
이반이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하얀색 뭉치가 질겁하고,
'네! 네! 원래 여기 놓여 있던 보옥을 통해서,
영혼이나 스피릿이 넘어와요.
뭐, 사실 저희가 많이 먹는 편은 아니고,
많이 저장해 두는 편인데,
요즘에는 부족하지 않게 오고 있어요.'
곧바로 대답하였다.
그런데,
"보옥? 정령의 별 말이야?"
의외의 정보가 있었다.
'네. 아마 그걸 가지러 오신 것 같은데,
돌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하얀색 뭉치가 말끝을 흐렸다.
눈치를 보는 것이, 또 느껴졌다.
정말로 루시아가 두려워한 그 존재가 맞는 것인가?
"안돼. 내가 숲을 빠져나가려면 그걸 엘프에게 넘겨줘야 하거든.
그리고 말이야, 넌 정체가 뭐야? 정말로 상위 정령이야?"
이반이 물었다.
'엘프요? 정말요? 음···, 그렇군요.
맞아요! 저희는 정령이에요.
상위 정령인지는 모르겠지만, 엘프들은 그렇게 나누는 것 같더라고요.
엘프한테 갔다면, 다시 돌아오긴 하겠네요.
물론, 부탁을 하나 들어주긴 해야겠지만요···."
하얀색 뭉치가 푸념하는 투로 대답했다.
표정은 없지만, 너무나도 투명한 녀석이었다.
표정은 있는데, 음흉한 녀석이, 이반은 갑자기 떠올랐다.
서약.
그런데 서약은 효력이 있는 건가?
틸데는 서약을 했다고 엄청 화를 냈었는데···.
'저기···요?'
이번엔 하얀색 뭉치가 말을 걸어왔다.
"응?"
이반이 딴 생각을 그만두고 하얀색 뭉치를 보았다.
'그럼 답변 다 해드렸으니, 이만 놓아주실래요?'
하얀색 뭉치가 물었다.
심연의 그림자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 모습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살짝 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놓아줄 수는 없었다.
"아니, 미안하지만 널 먹어야겠어.
안 그러면 여길 나갈 수 없을 것 같거든."
먹을 게 따로 없다고 했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반이 하얀색 뭉치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또,
'잠깐! 잠깐만요!!'
반복되는 외침.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반복되지 않을 것이었다.
이반이 그 외침을 무시하고, 입을 벌렸다.
그런데,
'제가! 제가!! 밖으로 보내드릴게요!'
하얀색 뭉치가 외쳤다.
긴박하고도 처절한 외침.
무시하고 싶었지만,
이반은 한 번 더, 인내심을 발휘했다.
다시,
"어떻게?"
하얀색 뭉치를 얼굴 앞에 들고 물었다.
그러자,
'밖으로만 보내면 되는 거잖아요?
제가 바로 밖으로 보내드릴게요!
먹는 건 밖에서 찾으세요!'
하얀색 뭉치가 다급하게 얘기했다.
마지막 간청.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솔직하고 재밌는 말이었다.
그냥 먹어버리기에는 아까운 녀석이었다.
"그래. 좋아."
이반이 긍정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반의 물음에,
하얀색 뭉치 주위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제 이름은 누토(Nuto).
무언가를 뜨게 만드는 것이 제 특기거든요.'
누토가 대답했다.
이반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 * *
금지된 숲에 발을 들인 게라드는,
일정 거리마다 표식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숲에는 안개가 깔려 있었고,
나무들은 죄다 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필요한 조치였다.
숲을 마음대로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 길은 표시해 두는 편이 나았다.
너무 깊게만 들어가지 않으면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물론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피슉.
갑자기 날아온 화살 하나가,
바로 깨뜨려 버렸다.
화살은 게라드의 발 바로 앞에 박혔다.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건지,
잡아가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르거스에게서 뭐라도 훔쳐 올 걸 그랬다.
그의 소중한 물건을 가져왔다면,
그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쫓아오지 않았을까.
하아.
부질 없는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었다.
어차피 엘프들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으니,
또 만나려고 온 것이니,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이반을 찾는다는 목적에 집중해야 했다.
게라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한 엘프가 게라드에게로 다가왔다.
그 뾰족한 귀만 보아도 엘프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바르거스를 경험했었다.
그런데, 그 머리색이 달랐다.
금발이 아닌, 은발이었다.
은빛 장발.
그리고 짙은 갈색의 피부.
"인간, 이 숲에는 무슨 일로 온 거지?"
엘프가 물었다.
호전적인 말투.
외부인을 반기지 않는 듯했다.
"동료를 찾으러 왔습니다. 혹시, 엘프가 맞습니까?"
게라드가 물었다.
그런데,
"하! 엘프라니."
엘프(?)가 코웃음을 쳤다.
"우린 다크 엘프다. 엘프 같이 뒤떨어진 놈들하고, 우리를 비교하지 마라, 인간."
다크 엘프가 짜증을 냈다.
좋지 않은 첫인상.
그것은 자칫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제 견문이 짧았습니다."
게라드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정중한 태도로 다크 엘프에게 사죄하였다.
그의 숱한 경험이 그의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우리?
게라드가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두 명의 다크 엘프가 먼저 나온 다크 엘프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흥! 그래도 네놈은 좀 예의를 아는 놈인 모양이군."
다크 엘프가 게라드의 반응을 마음에 들어하였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어보니 다른 누군가를 만난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반.
그렇지 않고서는, 비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저 말고도 또 인간을 보셨습니까?"
게라드가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그에,
"그래, 동료를 찾는다고 했지?"
다크 엘프가 호응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만나서 마을까지 데려갔었지.
물론, 지금은 화이트 포레스트에서 시체가 되어있겠지만 말이야. 하하하하하하하!!"
말을 마치고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냥 웃음이 아니었다.
죽었다는 대상에 대한, 비웃음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을 게라드는 의식하지 못했다.
비웃음을 의식하기에는,
그 말에 담긴 정보가 너무나도 중요한 정보였다.
"혹시 그 사람의 이름을 아십니까?"
게라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크 엘프가 인상을 찡그렸다.
게라드의 반응이 시원찮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열등한 존재의 이름 따위, 내가 알 리가 없지."
다크 엘프가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인상착의는요? 뭐 기억나는 건 없으십니까?"
게라드가 실망감을 삼키고, 재차 질문하였다.
하지만 그 질문,
"모른다. 그런 놈을 굳이 기억해 내고 싶지는 않군."
그 질문은 다크 엘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또한 첫 인상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인간,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라.
나는 네 궁금증을 해결해 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다."
다크 엘프가 경고했다.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게라드가 대답했다.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뭐 아무튼, 동료를 찾으러 왔다면 헛걸음 한 거다.
그만 돌아가라, 인간."
다크 엘프가 게라드에게 연민을 느낀 건지, 답지 않게 따뜻한 말을 하였다.
하지만 게라드가 알기로는,
"물론, 이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아하하하하하하!!"
그랬다. 나갈 수 없다고 들었었다.
다크 엘프들이 이번에는 게라드를 향해 그 비웃음을 던졌다.
"하하하하하하하!!"
자기들끼리 신나서 웃어 댔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게라드는 그것에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성적이었기에,
그에 반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하 하···.재미 없군."
또 한 번 다크 엘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다크 엘프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게라드는 그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비웃음은 별 것 아니었지만,
그것을 듣고도 예의를 차릴 것은 아니었다.
예의를 모르는 상대에게,
예의로 대할 필요는 없었다.
"흥! 인간들이란. 가자! 일단 마을로 데려가자!"
다크 엘프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소리쳤다.
그래도 일단은 마을로 데려가 줄 모양이었다.
게라드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괜찮은 결과였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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