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푸지오

게라드는 다크 엘프의 마을, 레푸지오에 당도했다.
레푸지오까지 끌려오는 동안,
다크 엘프들은 계속 시답잖은 농담을 했었다.
인간의 수명이 짧다며 업신여겼고,
엘프들은 또 구닥다리라며 흉을 보았다.
모두 자기 종족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높이는 발언들이었다.
그들이 자존감이 낮은 종족이라는 것을,
게라드는 그 말들을 듣고 눈치챘었다.
다크 엘프들은 게라드를 마을 중앙의 거목 쪽으로 끌고 갔다.
다크 엘프의 마을, 그것은 실로 구경할만한 것이었다.
게라드가 언젠가 상상해봤던 엘프의 마을,
그 상상이 여기 구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게 다크 엘프의 마을이란 것이,
상상과는 다른 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엘프를 만나는 것도 상상이 안되는 일이었는데,
심지어 다크 엘프의 마을에 오게 되다니,
참 삶이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게라드는 집 밖의 나무판자에 걸터앉아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다크 엘프 아이들을 보았다.
아직은 머리가 길지 않은 은발의 아이들.
은빛 속눈썹과 투명한 눈이,
어두운 갈색 피부와 대비를 이루어 더 돋보였다.
미형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을 보니 하이드가, 그리고 또 시프가 떠올랐다.
그 둘이 만났기를,
그리고 앞으로 만날 수 있기를, 게라드는 속으로 바랐다.
다크 엘프들이 거목 앞의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복층의 고즈넉한 건물이었다.
등불들이 멋스럽게 달려 있었다.
다크 엘프들이 그 건물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로프를 당겨,
게라드를 따라오게 만들었다.
어차피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지위를 이용했다.
히죽거리는 모습이, 같잖아 보였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이 안에서의 일이 중요했다.
그리고 게라드의 앞에 펼쳐진 것은,
무언가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는 다크 엘프들.
마을에 아이들밖에 안 보인다 했더니,
어른들은 거의 다 여기 모여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앞으로 자신을 데려가는 건가,
싶었지만 회의를 하고 있는 자들은 게라드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게라드를 끌고 온 다크 엘프들도,
그들 앞으로 향하지 않고,
옆쪽으로 비켜가서,
계단 쪽으로 게라드를 끌고 갔다.
계단은 위쪽뿐만이 아닌,
아래쪽으로도 나 있었다.
지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게라드의 귀에 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래서,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거야?
그래도 거기엔 아우렐이 있다고?"
의심하는 목소리.
"그럴 겁니다. 우리가 수도 더 많고,
정령들도 우리를 따를 겁니다."
그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게라드는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보았다.
은빛 턱수염을 가진, 둥근 얼굴의 남자.
"그럼 그걸 좀 보여주게."
또 다시 의심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은빛 턱수염의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주색 빛을 발하는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물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것을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게라드를,
"뭘 보고 있어? 어서 따라와!"
또다시 다크 엘프가 로프를 당기며 재촉했다.
게라드에 뒤에 서있던 또 다른 다크 엘프도,
게라드의 등을 떠밀었다.
게라드는 어쩔 수 없이, 계단 아래로,
다크 엘프를 따라 내려갔다.
이긴다, 수가 많다,
설마, 전쟁이 일어나려고 하는 건가?
게라드는 불길한 전조를 느꼈다.
얼핏 생각했을 때는 좋지 않은 타이밍.
하지만, 어쩌면, 이반을 만나기에는 최적의 타이밍일 수도 있었다.
언제나처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 * *
이반은 누토의 마법으로 빠르게,
화이트 포레스트를 빠져나갔다.
이 하얀색 뭉치, 누토가 정령이라는 게 새삼 실감됐다.
이반은 힘도 들이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이트 포레스트의 밖으로 나왔다.
"자, 나왔어요. 됐죠?
절 이제 놓아주세요!"
누토가 이반을 내려놓고 말했다.
귀염성이 많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반은 누토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안. 안되겠어."
이반이 말했다.
"왜죠? 전 약속을 지켰는데요!
어서 놔주세요. 어서요!"
누토가 이반의 손안에서 바둥거렸다.
확실히, 심연의 힘을 더 오래 쓰는 건,
좋지 않아 보였다.
대가 없이 쓸 수 있는 힘이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걸 믿고 찾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반은 그걸 믿지 않았다.
이반이 믿는 건 동료, 그리고 눈앞에 있는 것.
그런데 호손은, 동료라고 할 수 있을까?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이반이 말했다.
'네? 왜요?'
누토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정령의 별을 되찾아야 되거든."
이반이 대답했다.
'네? 가져가신 게 아니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누토가 물어왔다.
"맞아. 호손이 가져갔는데,
돌아오지 않았어.
이유를 묻고, 정령의 별을 다시 찾아와야 해."
이반이 말했다.
완전히 자기 본위의 말이었다.
'예?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제게 좋을 게 없는데요?'
누토가 대꾸했다.
누토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이반은, 지금 도움이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반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제발 좀 부탁할게. 도와줘."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으아악!! 그만! 그만!! 알았어요. 그만해요!'
누토가 소리 질렀다.
이반은 대답을 듣고, 누토를 바로 놓아줬다.
고통을 주어 말을 듣게 하는 건,
사실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인지시켜야 하지만,
그 고통이 오래가거나 심각하지 않게 해야 했다.
안 그러면, 도리어 화를 입을 것이었다.
'켁, 켁.'
누토가 숨을 토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기 위해 내는 소리라는 것을,
이반은 눈치챘다.
목이 없는데 그런 소리가 자연적으로 나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반의 양심에 호소하는 소리였다.
상위 정령이라더니, 하는 짓은 7살 애기랑 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도 잘 쳐준 것이었다.
그런데 일단, 당장은 뭘 좀 먹어야 했다.
"혹시 과일이라든가, 잘 알아?"
이반이 물었다.
'네?'
누토가 또 물어왔다.
한 번에 잘 대답하는 경우가 없는 녀석이었다.
"이 숲에서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뭔지 아냐고."
이반이 다시 말해주었다.
누토의 버릇을 고치는 것은,
애진작에 포기했다.
그런데 누토가 또,
'음···. 모르겠는데요?'
천진난만하게 말대답하였다.
파직.
이반 이마의 핏줄이, 갑자기 팍! 튀어 올랐다.
"그래? 그럼 널 먹어야겠네?"
이반이,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그러자,
'히이익!!'
누토가 질겁하였다.
그리고,
'잠깐만요! 다른 정령들에게 물어볼게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요!'
소리쳤다.
이반은 그 말을 듣고,
심연의 힘을 풀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혼자 속삭였다.
그런데, 몸이 진정되는 듯 하더니,
갑자기 기운이 훅, 떨어졌다.
이반이 몸을 휘청였다.
그런데 그걸 또,
'괜찮으세요?'
누토가 보고 물어왔다.
여차하면 도망갈 것 같은 느낌.
누토가 이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반은 몸을 곧게 일으켰다.
그리고,
심연의 힘을 살짝 두르고,
"괜찮아. 빨리 먹을 거나 찾아!"
누토에게 소리쳤다.
'히익! 네! 네!'
누토가 이반과 다시 거리를 두었다.
아직은 긴장을 늦출 때가 아니었다.
* * *
게라드는 지하에, 술통들이 있는 방에,
철저하게 버려졌다.
다크 엘프들은 게라드를 이곳에 데려다 놓고,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다시 찾아올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게라드의 앞에는,
왠지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금발의 여자.
정황 상 엘프인 듯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몇 번 말을 걸어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뭔가 다른 말을 꺼내보아야 하나.
일단 여기에서 나가야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그녀 뿐이었다.
"저기, 괜찮으신가요?"
게라드가 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다른 말, 다른 말···.
게라드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혹시 이반을 아시나요?"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움찔,
엘프가 반응하였다.
엘프가 양 팔 사이에 파묻혀 있던 고개를 들고,
큰 눈을 번뜩이며, 게라드를 노려보았다.
마치, 길고양이를 상대하는 듯한 느낌.
반기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반을 알고 있는 듯했다.
"저는 게라드. 이반의 동료입니다. 이반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혹시 그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게 있나요?"
게라드가 자신을 소개하고, 바로 물었다.
그러나,
묵묵부답.
그녀는 그 큰 눈으로, 게라드를 볼 뿐이었다.
"흠···. 그러면 여기는 어떻게 오게 되신 겁니까?
혹시 나가는 방법을 알고 계신가요?"
게라드가 포기하지 않고, 또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젠 오히려 눈을 피하였다.
더는 묻지 말라는 눈치였다.
대화를 명백히 피하고 있었다.
그녀가 도대체 어떤 일을 겪은 건지,
게라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의사가 중요한 시점이 아니었다.
어쩌면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이반을 그곳에서 만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전에 함께 피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었다.
"곧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나가야 해요!"
게라드가 힘을 주어서 말했다.
긴박함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말에,
그녀가 다시 눈을 들어, 게라드를 바라보았다.
한 번 더.
"전쟁이 일어나도 괜찮으신 겁니까?
다크 엘프들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고요!"
게라드가 한 번 더 몰아붙였다.
그러자,
"언제? 그 얘긴 어디에서 들었어?"
그녀가 물어왔다.
그 눈보다도 맑은 목소리였다.
"여기 들어올 때 들었습니다.
이길 수 있냐는 얘기도 했고,
아우렐이 있어서 쉽지 않을 거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자주색 물건을 보여 주었습니다."
게라드가 자신이 본 것을 전부 말하였다.
"아우렐!"
그녀가 그 이름을 아는지 소리쳤다.
게라드 얘기의 신빙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게라드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게라드의 어깨를 붙잡고,
"인간, 너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됐지?
그들이 여기를 나갔어?"
더욱 커진 두 눈으로 물어왔다.
게라드와 달리, 그녀의 손은 묶여있지 않았다.
그녀는 포로가 아니었던 것인가?
그런데 호기심보다도 일단은···,
여기서 나가는 게 먼저였다.
"들어온 지는 글쎄요, 한 두세 시간 됐을까요?
제가 봤을 땐 바로 나갈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게라드가 대답했다.
"그럼 아직 마을까지는 가지 못했겠네.
혹시 또 들은 건 없었어?"
그녀가 물었다.
"아뇨, 제가 들은 건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게라드가 또 대답했다.
"칫. 그럼 일단 여기를 나가야겠네.
같이 갈 거야?"
그녀가 또 물었다.
"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공중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마도 무언가 정령과 대화하는 것일 것이었다.
엘프는 정령과 대화할 수 있다고 읽었었다.
"쳇. 벌써 다 나간 모양이야.
서둘러야겠어.
인간, 이름이 뭐였지?"
그녀가 물었다.
"저는 게라드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게라드가 화답하며 물었다.
"나는 루시아야."
루시아가 대답했다.
"역시, 다크 엘프를 믿어선 안 됐어.
잠깐 비켜봐, 게라드."
루시아가 문 옆쪽에 있는 게라드에게, 비키라고 손짓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일어나서, 또 뭐라고 속삭이자,
갑자기 문이,
콰지직.
말 그대로 찌그러졌다.
"가자."
루시아가 앞장섰다.
그리고 게라드가 일어나며,
"혹시 이반을 보셨습니까?"
루시아의 등에 대고 물었다.
그런데 루시아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게라드가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침을 삼키는 목의 움직임.
"미안. 이반은 죽었어."
루시아가 말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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