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생존

"뭐라고 하셨습니까?"
게라드의 두 눈이 무서울 정도로 커졌다.
루시아가 슬픈 듯,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네가 찾는 이반, 죽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게라드가 말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미안. 내 잘못이야. 내가 말리지 못했어."
루시아가 사과했다.
하지만 그 사과를, 게라드는 받을 수 없었다.
"말리지 못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게라드가 물었다.
자초지종을 듣고자 하였다.
루시아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어 보였지만,
말 한마디로 정리될 사안이 아니었다.
"이반이 화이트 포레스트로 들어가는 걸···,
막지 못했어."
루시아가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서 슬픈 여운이 느껴졌다.
"화이트 포레스트? 그게 뭡니까?"
게라드가 바로 물었다.
하지만,
"일단 가자. 가면서 얘기해."
루시아가 물음을 일축했다.
그 말대로, 대화를 오래할 여유는 없었다.
다크 엘프들을 쫓아가야 했다.
하지만 게라드의 입장.
게라드의 입장에선 이반의 생사가 먼저였다.
게라드가 멈칫, 거렸다.
그리고 루시아가 그를 재촉했다.
"빨리! 가면서 얘기해 줄게!"
그녀는 이미 문밖에 나가있었다.
그녀가 왜 갑자기 자신을 챙기는지,
게라드는 순간 이해가 안 됐다.
전쟁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자신은 도움이 안 될 것이었다.
하지만 루시아가,
다가와서 게라드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루시아게 끌려서 밖으로 나가면서,
게라드는 루시아가 비로소 이해가 됐다.
그녀는 일단 빨리 나가야 했고,
이반에 대해 얘기해 주기도 해야 했다.
그래서 게라드를 빠르게 데리고 나가려 한 것이었다.
게라드는 깨달았다.
자신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아직 확인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이반이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처음 느껴본 자신이었다.
그를 찾으러 다니다 보니,
자신 안의 그의 존재가 더 커진 것일까.
동료라는 것에 이렇게 이입하게 될 줄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게라드는 이제 스스로의 발로, 루시아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느려서,
루시아가 정령을 불러 마법을 걸어주었다.
* * *
이반은 과일을 먹고 있다.
겉은 퍼렇고 속은 빨간색의 자글자글한 속살을 가진 과일.
무화과였다.
벌써 몇 개나 먹은 건지 껍질이 발아래에,
꽤나 쌓여 있었다.
"후. 이제 좀 살 것 같네."
이반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옆에는 여전히 누토가 떠 있었다.
일단 당장의 허기는 채워 다행이었지만,
과일 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했다.
고기.
에너지원이 될 고기가 필요했다.
이반은 옷에 칼과 손을 대충 닦고,
이제 사냥을 하러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저기요!'
누토가 갑자기 소리쳤다.
"뭐?"
이반이 누토를 돌아봤다.
'그··· 정령들이 얘기하는 게 들려와서요.'
누토가 말했다.
여전히 주제를 바로 얘기하지 않는, 답답한 말버릇이었다.
"뭔데? 그리고 난 이반이야."
이반이 물었다.
'네, 이반. 이반 님!?'
아리송한 듯.
"그냥 이반이라고 해."
이반이 말이 늘어지려는 걸, 바로 잘랐다.
'지금 이쪽으로 다크 엘프가 오고 있다는데요?'
누토가 말했다.
"뭐?"
설마 호손이?
아우렐과 협상하느라 오래 걸렸던 걸까?
"혹시 인상착의는? 어떻게 생겼는 지 알 수 있어?"
이반이 물었다.
괜히 의심을 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뭐··· 까만 피부에 은빛 머리. 그냥 다크 엘프죠.'
누토가 대답했다.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투였다.
아··· 그랬다.
누토에게는 설명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얼마나 가까워?"
이반이 다시 물었다.
거의 체념한 투였다.
하지만,
'얼마나요? 그건 또 어떻게···.'
누토는 그마저의 기대도, 실망시켰다.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몇 분 정도 걸릴 거 같은지?"
이반이 참을성을 가지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거리? 몇 분? 그건 또 뭐죠?'
누토에게는 단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이반은 그걸 바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의 물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뚜렷하게 이해하였다.
"됐어. 기다려보면 알겠지."
이반이 말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호손이 다시 오는 거라면,
그를 맞이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숨어서 지켜보는 게 맞을까.
이반은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얼마 후, 한 다크 엘프가 화이트 포레스트의 입구로 걸어왔다.
다른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크 엘프는 다른 누구도 아닌,
호손이었다.
이반은 그의 등장이 반가웠다.
하지만, 그에게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숨죽여서, 그의 행동을 더 지켜보았다.
호손은 입구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본 다음,
품속에서 정령의 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정령의 별의 등장에,
누토가 반사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깜짝 놀란 이반은,
반사적으로 심연의 그림자를 둘러,
누토를 그 손에 잡았다.
'놔! 놔! 놔줘요!!'
누토가 발버둥치며 소리쳤다.
이반은 놀라서,
누토의 주변을 아예 심연의 그림자로 둘러버렸다.
누토를 그림자 안에 가둬버렸다.
'으악! 그만! 그만!!'
누토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를 놓아줄 수는 없었다.
이반은 서둘러 호손을 확인했다.
그가 누토의 소리 또는 비명을 들었을지,
숨도 죽이고 확인하였다.
하지만, 호손은 별 낌새를 못 느낀 듯,
자신이 하려던 것을 멈추지 않고 속행하였다.
다행이었다.
아마도 텔레파시.
하얀 늑대가 쓴 것과 같은 것인 듯했다.
이반은 평정심을 되찾고, 호손의 행동을 관찰하였다.
호손은 정령의 별을 앞에 들고,
어떤 말을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하나 둘 작은 빛의 뭉치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아마도 정령들이었다.
이반은 이제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숲에서 나오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화이트 포레스트 쪽에서도,
백색 뭉치들이 앞으로 나와, 호손에게 다가왔다.
그가 정령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제발 그만! 그만해요!!
저기 안 갈 테니까 제발 그만!"
누토가 소리쳤다.
심연의 그림자가 정말로 싫은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걸 알고서,
그것을 묵살할 수는 없었다.
이반은 누토를 바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시험 삼아,
'어때? 들려?'
누토에게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보았다.
누토는,
'들려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미안해. 들키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이반이 사과했다.
'흥!'
누토는 단단히 토라져 있었다.
그의 화를 달래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정령은 영혼이나 마나? 스피릿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스피릿 많이 먹여줄게.'
이반이 말했다.
본인도 말하면서 이게 설득이 되나?
의아했지만, 일단 얘기해 보았다.
'흥. 알았어요. 그리고 다시는 그 검은 걸로 절 잡지 마요. 알겠죠?'
누토가 이제는 협상까지 걸어왔다.
단순히 아이 같은 건 아니었을까.
아니, 그만큼 심연의 그림자가 싫은 것이었다.
'알았어. 약속할게.'
이반이 말했다.
'흥!'
누토가 콧방귀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코도 없으면서 이런 소리는 또 어디서 배운 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누토와 타협점을 찾는 사이,
호손이 정령들과 이야기를 다 나눈 모양이었다.
호손이 정령의 별을 다시 품 속에 넣었고,
몇몇 정령들이 그의 주변에 남아서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그를 따라갔다.
그것을 보고,
이반은 확신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확신감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대한 느낌.
그리고 실망감은 역시나 호손의 배신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호손은 이반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었다.
호손이 구역을 완전히 빠져나간 후,
이반이 그림자를 풀었다.
그리고 누토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아?"
물었다.
역시, 텔레파시보다는 말로 하는 게 편했다.
텔레파시도, 이반이 그걸 할 줄 알았다는 느낌보다는,
누토가 그걸 들어준 느낌이었다.
'아뇨? 저랑 얘기했잖아요?'
누토가 대꾸했다.
역시 누토였다.
언제쯤 한 번에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다른 정령들은?
여기 왔던 정령들은 듣지 않았을까?"
이반이 다시 물었다.
정령들에게 물어봐달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토는,
'그렇겠죠?'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럼 좀 물어봐 주면 안 될까?"
이반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깊은 빡침이 담겨 있는 미소였다.
그의 이마의 핏줄이, 울컥울컥하였다.
그리고,
'네! 좋아요!'
누토가 밝게 대답했다.
전에 없이 밝은 대답.
설마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 건가?
의심이 드는 대답이었다.
* * *
다크 엘프의 마을, 레푸지오에는 다크 엘프가 남아있지 않았다.
루시아를 따라 마을을 나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게라드의 시야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모두 떠났거나, 남은 사람들은 모두 집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루시아와 함께 이렇게 거리를 활보하는 데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성인 다크 엘프들은 모두 마을에 없는 게 분명했다.
게라드는 루시아, 그리고 정령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달렸다.
자신이 이런 속도를 낸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달리면서도, 실감이 잘 들지 않았다.
이반이나 시프만 이런 속도를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물론 그들에 비할 것은 아니었지만,
정령이란 그리고 그들의 마법이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이반은 어떻게 됐던 겁니까?"
게라드가 달리면서, 물었다.
"화이트 포레스트에 남겨졌어."
루시아가 짧게 대답했다.
그녀의 정신이 바빠 보였다.
하지만 그걸 배려할 여유가, 게라드에게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게라드가 물었다.
"···."
뜸을 들이다가,
"상위 정령들이 영혼을 먹어 치울 거야.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껍데기가 돼."
루시아가 대답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던 건지 게라드는 다 알 수 없었다.
"그럼 이반을 두고 나오신 겁니까?"
게라드가 질문을 이어서 하였다.
그에게 필요한 건 실낱같은 희망, 아니면 확실한 절망이었다.
"아니, 난 거기에 없었어."
루시아가 말했다.
"그럼?"
"모두 호손이라는 다크 엘프에게 들은 거야.
그가 이반이 희생했다고 말했어.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루시아가 대답했다.
옆으로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착잡했다.
"그럼 직접 본 게 아니라는 거죠?"
게라드가 물었다.
그의 얼굴에 조금씩, 빛이 비쳤다.
"응. 그런데 아우렐과 얘기하겠다면서,
왜 서두르지 않았는지,
이제 알겠어.
서둘렀다면 이반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위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니.
생각지도 못했어."
루시아가 자책했다.
그녀가 이반과 어떤 사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 그녀의 책임감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게라드는 루시아를 탓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게라드가 보기에,
아직 그녀를 탓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이반은 살아있을 겁니다."
게라드가 말했다.
굳은 확신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 작가의말
드디어 100화!!
조금씩 봐주시는 분들 덕분에 이렇게까지 이어서 쓸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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