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가

55화. 선동가
-숙소-
두 번째 도전자에 관한 힌트를 계속 떠올렸다.
벨페고르가 그는 욕망의 화신이기도 하지만, 게으름과 나태함을 부추기는 존재라고 했다.
사람을 타락시켜서 전쟁을 일으키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한대의 탐욕을 가져도 된다고 부추기는 자라고도 했다.
글리터를 쳐다봤다.
“글리터, 벨페고르가 한 말 너도 들었지?”
“들었어.”
“그럼 다음 도전자는 어떤 자일 것 같아?”
“벨페고르가 72 악마의 순위에 들지 않았지만, 힘으로만 비교하면 72 악마 중에서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순위야.”
“그래?”
벨페고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글리터, 혹시 새로운 도전자도 내가 아는 자일까?”
“아는 자가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나와 관련이 있는 자가 아닌지 의심이 가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나도 알 수 없어.”
“정말 모르는 거 맞아, 시스템에 관한 것은 말할 수 없다고 했잖아?”
“그건 일반 글리터였겠지.”
“그럼 넌 진짜 모른다는 거지?”
“내가 아는 것도 시스템 일부분일 뿐이야.”
“시스템을 다 아는 사람은 그럼 없어?”
“그런 것도 당연히 나는 알 수 없지.”
벨페고르가 마지막에 보여줬던 모습이 아직 선명하게 떠오른다.
“분명히 뭔가 내가 아는 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눈을 감았다.
양미간 사이에 의식을 집중하고 들숨과 날숨을 규칙적으로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잡념을 떨쳐 버리고, 머릿속으로 벨페고르가 남긴 마지막 힌트만 계속 떠올렸다.
오른쪽 발목의 아픔도 왼팔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히 엘릭시아의 정원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치유되고 마나가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떴다.
이제 생각났다.
나에게는 ‘빛의 심판자’가 있었지.
마음을 비우고 정성을 다해서 알고싶은 것을 종이에 글로 썼다.
[다음 도전 퀘스트 상대.]
그리고 종이를 위에 두고, 그 아래 타로를 섞어서 내려놓았다.
노스무스 교수가 타로를 할 때는 진심으로 해야 길이 제대로 보인다고 했다.
첫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타워(The Tower)가 펼쳐졌다.
해설에서 타워가 번개에 휘말려 무너지는 모습은 불안과 파괴를 상징한다고 했다.
처음 카드는 내가 찾는 자의 과거를 상징했다.
카드만 보면 혼란과 관련이 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찾아야 할 악마가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나온 것은 악마(The Devil) 카드였다.
두 번째는 현재.
현재의 그는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카드에서도 어떤 악마의 기운이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음?”
심호흡을 하고 세 번째 카드를 펼쳤다.
나온 것은 황제.
미래를 상징하는 이 카드는 악마의 미래의 모습이다.
황제라고?
생각나는 것은 흑태자 에드워드뿐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미래의 황제가 될 사람인데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흑태자뿐이 없는데.
흑태자가 건네준 엘드라이트를 쳐다봤다.
글리터도 엘드라이트로 인해 소환된 것인데?
마지막으로, 네 번째 카드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마법사(The Magician) 카드가 나왔다.
문제의 해결책을 나타내는 카드였다.
제일 중요한 카드였다.
노스무스 교수에게 받은 해설서를 찾았다.
중요한 키워드는 속임수와 지혜, 그리고 은밀한 계획.
다음 도전자는 마법사 카드와 관련이 있는 건가?
노스무스 교수가 없으니 물어볼 사람도 없고.
“글리터, 혹시 내가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 김수오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악마로 나타나는 것 아냐?”
글리터가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알 수 없는 질문에 답할 수 없어.”
알 수 없다면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야?”
“모든 시스템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잖아.”
“혹시 그럼 엘드라이트와 관련이 있는 자야?”
“그것도 모르겠어.”
다시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김수오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타났던 벨페고르는 분명 엘리스 링 프로젝트 지원자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다음 도전자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계속 김수오의 기억을 떠올렸다.
앨리스 링을 통과하면 무언가가 바뀐다.
그래서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글리터, 노스무스 교수가 악마 서열 71위였지, 그의 이름이 뭐였지?”
“그는 다카리아였어, 단탈리온이라고도 불러.”
이상하게 노스무스 교수는 처음 봤을 때부터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벨페고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분명 조금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벨페고르는 분명 참전 용사 그분이었는데?
제발 기억나라.
생각해보니 노스무스 교수와 비슷한 느낌의 지원자도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노스무스 교수도 분명히 앨리스 링 프로젝트 지원자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지원자 중 참전 용사인 벨페고르도 있었다.
흐릿한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김수오가 면접관으로 프로젝트 지원자 면접을 보는 기억이다.
김수오가 면접관의 자격으로 물었다.
“어떤 일을 하시죠?”
“저는 한식 요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건 지금 하는 일이잖아요, 연세가 너무 많으신데, 그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죠?”
“번역 일을 했었는데, 일이 뜸해졌고 최근에는 일이 없어서 생계 대책으로 요리 기술을 배웠습니다.”
“프로젝트에 자원하신 계기는 뭐죠?”
“삶에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자원했습니다.”
“프로젝트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못 들으셨어요?”
“요리를 배우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도 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싶습니다.”
“음?”
전혀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프로젝트 실험이다.
메뉴얼 대로 반복적인 질문을 했다.
메뉴얼 대로만 하면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검사 출신의 관계자가 심문하듯이 만든 면접 메뉴얼이다.
가장 기본은 똑같은 질문을 주기적으로 계속하면서 상대를 떠보는 것이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다른 질문에 섞어서 똑같은 질문을 때때로 반복한다.
거짓없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대답은 즉시 나온다.
대답의 맥락은 같지만, 말이 조금씩 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대답 반응도 느리고 따져보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거짓말을 꾸미려고 한다.
또 다른 자는, 분명 시간 기간을 두고 질문을 했는데 대답 반응도 빠르고 처음 대답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바로바로 대답하는 부류다.
지금의 경우는 후자다.
반응도 빠르고, 완벽하게 똑같이 대답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질문을 알고 답을 연습했다는 뜻이다.
필기를 살폈다.
분명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처음 했던 대답을 그대로 했다.
너무 과하게 정보가 딱딱 들어맞으면 오히려 거짓말이 티가 나는데.
“왜 이 프로젝트에 자원하셨죠, 프로젝트에 참여해도 아무 대가도 지급하지 않잖아요.”
“삶에 다른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
-상점-
마법 재료를 사려고 상점을 찾아왔는데 뭔가 어수선했다.
뭐지?
마법 상점 주인에게 물었다.
“왜 이리 시끄럽죠?”
상점 주인의 말로는 누군가가 광장에서 연설한다는 것 같았다.
큰 목소리로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박수와 함성이 우레와 같았다.
“와!”
“옳소.”
“짝짝짝!”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로월아스는 호기심에 군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계속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 아래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남부가 북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확신에 찬 목소리, 진실처럼 들리는 중저음.
“시민 여러분, 우리의 미래를 결정 짓는 중대한 순간에 서 있습니다. 지금의 공화정은 북부의 앞잡이들로 가득합니다.”
“공화정을 반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와 평등, 그 가치를 지키려면 먼저 북부의 손에서 남부가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월아스는 계속 군중들을 밀치고 전진했다.
이 목소리 분명히 면접에서 탈락시킨 그 남자 목소리였다.
최대한 가까이 단상 아래로 다가갔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청중을 둘러보았다.
“저도 압니다, 북부 제국은 강력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유를 갈망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북부가 언제까지 우리를 이대로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그가 다시 말했다.
“북부에 맞서려면 우리에게도 강력한 리더가 필요합니다, 썩어빠진 귀족들의 공화정이 아니라, 남부에도 서민들을 대변할 강력한 수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설마?
진짜 그자인가.
“우리의 목적은 공화국을 지키면서 혁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치명적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기력합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광장은 우렁찬 박수와 함성으로 가득했다.
로월아스가 군중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저 사람 이름이 뭐죠?”
“로베스피에르 몰라요?”
이런 젠장.
만약 그자가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몸으로 여기 나타난 것이면?
벨페고르가 말해준 힌트가 다시 생각났다.
선동가?
면접 당시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물었다.
“사람들이 때때로 허구나 이상을 통해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려 한다는 것은 아십니까?”
“알죠.”
“이런 허구적인 믿음은 사람들에게 큰 힘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이나 극단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아시죠?”
“그런가요?”
“니체가 이런 말을 했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라고요.”
거짓말이 들통난 것을 알고 그는 이전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김수오가 물었다.
“니체요?”
“니체는 사람들의 불만족과 좌절이 르상티망을 만든다고 했죠.”
“르상티망이요?”
“원망, 복수심 뭐 그런 것이요.”
“아 원망.”
“르상티망을 품은 사람들은 강한 지도자에게 끌리고, 그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런가요?”
“독일인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안은 그들의 좌절과 불만으로 나타났고, 강력한 나치의 기반이 되었죠.”
“음?”
“그리고 러시아 혁명도 마찬가지죠, 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레닌을 따르게 된 이유도 그런 이유였죠.”
김수오가 물었다.
“니체는 약자들의 르상티망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강자인 초인은 그런 마음 자체를 품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 아닌가요?”
그의 표정이 변했다.
“음?”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가 물었다.
“아내를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뭔가 계속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제 아내 이야기는 사적인 것인데 어떻게 아시는 거죠?”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거짓말 그만하시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저는 반드시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합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잖아요, 그런 분을 어떻게 믿고 프로젝트에 참가시킵니까?”
그가 말했다.
“거짓도 계속 말하면 진실이 되죠.”
말이 안 통하는 상대에게는 말이 안 되게 말하면 된다.
“개인이 느끼는 원한과 불만족을 F이라고 하고, 그 값을 0에서 1까지라고 가정해보세요.”
“불만족 F?”
“리더십의 강도는 L이라고 하죠, 이건 리더의 영향력이니까 이것도 0에서 1까지라고 하죠.”
“음?”
“르상티망에 빠진 대중이 리더의 의견에 동참할 확률은 P라고 해보죠, 역시 0에서 1까지 값을 가진다고 하고요.”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P는 F 곱하기 L이라고 볼 수 있죠.”
“대체 뭐야?”
김수오가 차분하게 말했다.
“불만족도 F가 높을수록 개인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니까 리더에게 동조할 확률이 높습니다.”
“음?”
“리더십의 강도 L이 높을수록, 그러니까 강력한 리더십이 있을수록 사람들이 리더에게 더 끌리게 됩니다.”
“그래서요?”
“예를 들어서 개인이 느끼는 불만족도 F가 0.8이고, 리더십 L이 0.9라고 가정하면, 곱해서 0.72, 그러니까 그 개인은 72%의 확률로 리더를 지지하겠죠.”
“그런데요?”
“본인에게 그런 매력과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네?”
“우리나라 교육열이 다른 나라보다 높은 건 아시죠?”
“아 알죠.”
“자기보다 학력 낮은 사람을 누가 따르겠어요.”
“음?”
“중세시대도 아니고, L 값이 사람 자체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학벌과 배경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하지만 나는 달라요.”
“물론 그런 카리스마를 타고난 사람도 있죠, 하지만 그런 카리스마도 학력이 있어야 하죠.”
“저를 프로젝트에 참여만 시켜 주시면 모든 것들이 바뀔 겁니다.”
“그럴까요?”
예전 기억에서 깨어난 로월아스가 다시 단상을 쳐다봤다.
분명히 프로젝트에서 배제된 그 지원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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