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1)

“라진!!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네 놈이 말한 공생이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이냐!!”
분노한 핸더슨이 소리쳤다. 그 역시 어쩌면··· 이곳 알트란에서 오크와 인간이 공생하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도 있다고 믿었던 듯했다. 지금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크으···”
“라진!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이놈···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단 거냐!?”
범죄자 오크는 험악해진 분위기에 어쩔 줄 모르는 듯하더니, 유느이트를 향해 말했다.
“유··· 유느이트···! 벼··· 별일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쿠마! 네 놈에게 물은 게 아니야! 라진 이야기해봐! 쿠마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단 거야!?”
유느이트의 호통에 쿠마는 입을 닫고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유느이트··· 이 쿠마란 놈이··· 인간 여인 하나를 겁탈했대··· 이 미친··· 개새끼···!”
“겁탈이라면··· 강간을 했다는 것인가···”
유느이트의 물음에 내가 작게 끄덕이자마자, 그는 쿠마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감히··· 족장의 명을 거역하다니··· 내가 인간들을 해치지 말라고 일렀거늘···!”
딱히 그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피터 같은 새끼··· 놈은 죽어 마땅하다. 이놈의 범죄 하나 때문에 지금껏 인간과 화합하려는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유느이트, 쿠마··· 이놈은 모두가 보는 곳에서 처형할 거야. 혹시 다른 생각 있어?”
유느이트는 반대하지 않았다. 흠씬 두들겨 패고는 나에게 대답했다.
“아니··· 놈의 목은 잘릴 것이다. 족장의 말을 거역한 자는··· 목숨으로 대가를 치른다!”
구타가 멎자 핸더슨이 내게 말했다.
“실망스럽군,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의 큰 반대가 없다면, 너희를 산맥으로 돌아가게 할 생각이다. 우선 놈을 우리에게 넘겨라···”
‘순조롭게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제기랄···!’
“우리의 거취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시죠. 우선 저놈은 인간을 해치지 말라는 족장과 사령관인 저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놈은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를 겁니다. 모두가 보는 곳에서, 놈의 목을 뜯어낼 작정입니다.”
나의 대답에 핸더슨은 잠시 고민했다. 쿠마를 처형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듯했지만, 알트란 인에게 해를 끼친 오크를 우리에게 인도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고박사가 입을 열었다.
“라진! 그리고 족장님! 잠시만요··· 흐음···”
고박사는 우리를 부르고는 골똘히 고민했다. 그리고 유느이트에게 말했다.
“족장님! 이곳은 알트란입니다. 우리가 인간을 존중한다면··· 범죄자를 경비대에 인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놈은··· 나의 명령을 거역했다! 놈은 죽어야 한다. 내가 목을 벨 것이야! 붉은 달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물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피해를 본 것은 인간들입니다. 놈에 대한 처분은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고박사 뭐라는 거야! 이놈은 우리 붉은 달의 전사라고! 아니 전사였지! 놈의 목은 내가 자른다!”
“잠깐! 유느이트··· 고박사의 말이 맞아. 이곳은 우리의 식민지가 아니야. 인간들이 우리에게 복속된 존재도 아니지. 우리가 인간들을 존중한다면, 인간들에게 놈의 처분을 먼저 맡기는 것이 어떻겠어?”
유느이트는 고민했다. 붉은 달 전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지만, 고박사의 말처럼 피해를 본 것은 인간 쪽이다.
“핸더슨 경, 우리는 놈의 죽음을 원합니다. 하지만··· 피해를 본 것은 인간 측입니다. 알트란의 방식에 맞게 놈의 처분을 결정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핸더슨은 대답했다.
“물론··· 범죄자는 우리가 인도받도록 하지. 선처를 바라지 마라!”
“잠깐만!”
쿠마를 핸더슨에게 넘겨주려던 차에 아린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와 핸더슨을 보며 말했다.
“우리 붉은 달은 알트란에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범죄자 쿠마를 넘겨드립니다. 우리가 인간들을 존중하듯이, 경비대 역시··· 범죄자 쿠마를 인간 범죄자와 똑같이 대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똑같은 대한 다라···? 무슨 의미지?”
“물론 우리는 놈이 죽음으로서 대가를 치르길 원하지만, 즉결처형은 안 됩니다. 오크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이 놈 역시 인간 범죄자들처럼 재판을 통해 처분을 결정해주십시오.”
‘재판···?’
“아린, 어차피 놈은 죽을 목숨이야. 굳이 뭐··· 그런···”
“오빠! 이 멍청아, 놈의 목숨 때문이 아니야. 나도 저런 놈은 죽어버리는 게 좋아. 하지만, 오크와 인간은 이제 동등하다며?! 인간과 똑같은 절차를 거쳐야 해!”
“흐음···”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오크와 인간은 동등하다. 우리가 쿠마를 경비대에 인도한 이상, 경비대 역시 오크를 인간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오크에 대한 존중의 의미이다. 인간 범죄자는 재판의 기회를 주고, 오크는 주지 않고 즉결처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좋아··· 핸더슨 경! 저놈의 목숨 따윈 관심 없습니다. 오히려 놈이 죽음을 맞길 원합니다. 하지만, 경비대에서는 오크와 인간을 동등하게 처리해주길 요청합니다.”
핸더슨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거절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좋다. 다만, 재판은 두 시간 후 여기에서 바로 실시한다. 이곳에 있는 알트란 인들이 배심원 임무를 수행하며, 판결은 내가 내린다. 원한다면 변호할 사람을 붙여주지. 물론 변호인 역시 인간이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좋습니다. 참고로··· 우리도 재판에서 발언할 것이며, 놈에 대한 처분으로 사형을 주장하겠습니다.”
“사울! 변호인을 한 명 섭외하고 이놈을 심문 하도록 해! 아린··· 자네는 사울과 함께 가서 통역을 좀 도와주겠니.”
◆ ◆
아침의 소동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졌다. 어제의 즐거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고 발생한 범죄에 대한 안타까움, 오크에 대한 불신 또한 소문과 함께 퍼져나갔다.
유느이트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선 읊조렸다.
“재판이라니··· 웃기는군. 그냥 목을 자르면 될 것을”
“유느이트··· 우린 인간에게 오크를 넘겨줬어. 비록 범죄자이지만, 그런데 그들이 오크를 인간과 다르게 차별적인 대우를 한다면, 그것 역시 우리에게 기분 나쁜 일이야. 경비대는 오크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재판을 여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자고!”
유느이트는 이내 투덜거림을 그만두었다. 쿠마에 대한 심문이 끝나고 재판 시간이 다가오자 멀리서 아린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아··· 여긴 나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네. 정말 피곤하다니깐!”
“아린! 심문은 잘 끝났어? 그··· 파렴치한 놈이 뭐래?”
“하핫··· 이 재판 말이야··· 생각보다 꽤 재밌을지도 모르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변호인이라는 사람. 생각보다 열정이 대단하던걸?”
변호인은 인간이다. 오크가 인간 여인을 강제로 범했는데··· 열심히 변호해 줄 리가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쿠마는··· 아주 질 나쁜 범죄자라고”
“물론 그렇지! 근데 말이야··· 알트란에서도 그런 사건들은 일어날 거잖아?”
범죄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영지는 없다. 그것은 강력한 경비대를 보유한 알트란 역시 마찬가지다. 빈번하진 않지만, 절도사건도 일어나고, 치정에 의한 살인 사건도 발생한 적이 있다. 물론 성범죄 또한 마찬가지.
“물론 이런 사건이 전혀 없진 않지.”
“오빠, 그럼, 말이야. 알트란에서 강간범은 모두 사형이야?”
물론 그것은 강력범죄다. 아주 무거운 처벌이 내려진다. 하지만 사형까지는···
“글쎄··· 그건···”
“그리고 그거 알아? 쿠마의 변호인은 우리가 사형을 주장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갑자기 열정이 생겼다나?”
“우리가 사형을 주장하는 거랑 놈의 열정이 무슨 상관인데?”
“음··· 놈의 무죄를 주장하진 않지만, 적어도 변호인으로서 과도한 처벌을 받게 하진 않을 거라던데?”
“그는 인간이잖아. 뭘 잘못 먹은 거 아냐?”
“그가 말하길 변호사란 직업은 피고인을 위해 대변하는 사람이래. 그게 오크라 하더라도 말이지. 그는 자신의 직업윤리를 따를 거래! 너무 흥미진진하지 않아 오빠?”
혼란스러웠다. 오크들의 족장인 유니으트와 사령관인 나는 놈의 죽음을 원했지만, 놈의 변호인은 인간임에도 그것이 과도한 처벌이라 주장하는 상황. 즉, 범죄 오크에 대한 처분으로 오크 측은 강력한 처벌을 원하고 인간인 변호인이 그것을 말리려 하는 상황인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이번 재판이 인간과 오크와의 갈등을 봉합해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오빠! 혹시 모르지! 이번 재판으로 우리가 조금은 인간들에게 신뢰를 줄지도? 하하! 얼른 가보자 곧 시작이야.”
철부지 같은 아린이지만, 마치 나의 마음을 읽는 듯했다. 그녀는 내가 힘든 상황이 놓일 때마다, 일을 해결해주거나, 실마리를 주는 듯했다. 뭐 우연이겠지만···!
◆ ◆
재판이 시작될 때가 되자 이곳은 어젯밤 축제 때 보다 더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재판을 위해 통나무를 잘라 만든 간이의자에는 모두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앉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의자 뒤에 서서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용의자 쿠마와 그의 변호사, 핸더슨과 경비대원 몇 그리고 우리가 자리를 잡았다.
알트란에서 이루어지는 오크에 대한 첫 재판이니 영지 사람들의 관심을 꽤 많이 끈 듯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쉼 없이 오늘의 재판에 관해 이야기했다.
“인간이고 오크고! 강간범 새끼들은 모조리 다 죽여버려야 해!”
“그럼! 흉악스러운 놈. 죽어 마땅한 자식 같으니!”
“아니··· 그런데 말이야. 어젯밤 함께 어울려 참 즐거웠는데··· 안타깝게 됐구먼···”
“본성을 숨길 순 없는 거지! 음흉한 자식들!”
“정말··· 애석하군,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가 싶었는데 말일세!”
“크흠··· 그러게 말이야, 이런 사건이 발생한다면··· 아무래도 함께 알트란에서 지내는 건··· 영 불안한데···”
우려한 대로 한 놈의 범죄행위로 오크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이 커져 나가는 듯했다. 범죄자를 응당 처벌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사람들이 우리 모두를 불신하려 하는 점에 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쳇··· 쿠마 저놈 때문에··· 우리 모두의 입장이 곤란해졌구만···”
“흠··· 오빠 혹시라도 경비대가 저놈 때문에 우리를 영지에서 쫓아내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좀 부당한 것 같은데. 그거야말로 연좌제 아냐?”
‘연좌제라···’
물론 연좌제는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막 영지에 정착하려는 우리에게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경비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우리가 떠날 것을 충분히 요구할 수 있다.
“글쎄··· 경비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
우리 대화에 유느이트와 오트롱이 끼어들었다.
“아··· 아린! 토··· 통역!! 우리도 재판 듣고 싶다!”
“음··· 재판이 시작되면, 내가 간간이 통역해줄게. 아린은 이번에도 쿠마를 통역해줘야 할 거야.”
이윽고 재판의 시작을 위해 판결을 맡은 핸더슨가 모두를 바라보고 외쳤다.
“곧! 강간 용의자··· 오크 쿠마에 대한 재판이 시작됩니다. 모두 정숙해 주시고, 제가 발언 기회를 드리는 분들만 발언하시기 바랍니다. 아린은 용의자의 발언에 통역을 부탁하겠네”
아린은 쿠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트란 최초의 오크 범죄자 재판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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