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 웨이브 (5)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그녀의 자태에 온몸이 타오르는 듯 달아올랐고, 심장은 요동쳤다.
“용사님··· 이제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 언제나··· 언제나 함께해요···”
그녀는 나의 손목을 잡고 내 손을 그녀의 몸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어느새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곧 다가올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려왔고, 요동치는 심장으로 이제 숨쉬기도 버거운 지경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져 오는 것이 느껴진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그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야아!! 야야야야야!!”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이 포개어지기 직전에 누군가 문밖에서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들렸다.
‘··· 무슨 소리지?’
벌컥!
문밖에서 소리를 내질렀던 이가 이내 방문을 거세게 열고 들이닥쳤다.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아름다운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고개를 돌려 방문을 연 낯선 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아··· 아린?!”
“라진···!!! 라진 이 나쁜 놈아!!”
아린이 소리를 지르자 내 온몸을 감싸고 있던 그녀의 향기가 빠르기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아린의 목소리가 내 귀를 날카롭게 후벼팠고, 몽롱하던 나의 정신이 점차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빠 정신 차려! 정말··· 실망이야!”
그녀의 고함에 나는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당연하게도 그녀를 드래곤으로 구해냈다는 것은 나의 망상이었다. 내 앞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확실한 사실은 그녀와 내가 한 침에 있을 이유 따윈 없었다.
“수상한 마력이 느껴져서 와봤더니! 고작··· 이 정도 수작에 정신이 팔려 헤벌쭉거리고 있었단 말이야?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수작이라고···?’
내가 뭔가에 홀렸던 것일까? 지금 내 앞의 이 여인이 나에게 유혹마법이라도 걸었다는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아린은 마력을 다스릴 줄 아는 아이다. 아린이 마력을 느끼고 왔다는 것은 분명히 이 여인이 나에게 무슨 수작을 걸었다는 의미일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누구이며,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나를 홀렸던 것일까?
“역시··· 내가 마법에··· 홀렸던 것이군···”
아린은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왔다. 아마 나에게 마법을 건 이 여인을 쫓아내려 할 것이다.
퍽퍽!!
‘응?’
퍽퍽퍽!!
“감히 한눈을 팔아? 내가 지척에 있는데?”
아린은 내 앞의 여인을 쫓지 않고 나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그 정도도 간파하지 못하고, 침이나 질질 흘리고 말이야. 너무해 정말! 그따위 정신으로 뭘 할 수 있겠냐고!”
‘침을 질질 흘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린! 진정해! 마법에 당했던 거야.”
퍽퍽!!
“왜 그래! 아프잖아!”
아린이 왜 이렇게나 화를 내는지 이해 가지 않았지만, 덕분에 유혹의 마법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나를 유혹한 그녀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린을 노려보았다.
“얘! 꼬마야···!! 너 뭐니? 갑자기 나타나서는!”
“너야말로 뭐야! 아니지! 뭐긴 뭐야···넌 분명 서큐버스일거야! 남자들을 홀려서 생명력을 빼앗는! 감히 누굴 홀려!”
‘서큐버스? 역시 인간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녀는 나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려고 일부러 나에게 접근해 유혹마법을 시전했다. 내가 그녀에게 생명력을 빼앗기기 전에 아린이 날 구하러 왔던 것이다.
“하하··· 제법 똑똑한 꼬마로구나? 맞아 나는 벨라, 서큐버스들의 여왕이지. 크타리아에 잘생긴 남자가 있다고 해서 와봤지···!”
서큐버스 퀸··· 벨라의 대답에 아린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흥! 뻔뻔하기도 하네! 네 뜻대로 될 건 없으니, 이제 그만 나가주지 그래?”
“흐응··· 싫은데? 나는 저 라진이란 녀석이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네가 오지 않았으면 우린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을 텐데··· 방해꾼이 정말 말이 많구나”
“흥! 헛소리하지마. 저 라진이란 멍청이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걸랑”
“꺄하핫··· 설마 네가 저 라진의 신부라도 된단 말이니?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없어 내가 빼앗아 버리면 그만이거든!”
“그런 일은 절대로! 절대로 없어. 우린 이제 여길 떠날 거야! 그러니까 얼른 나가라고!”
두 여자의 신경전은 치열했다. 아린의 성화에도 벨라는 배시시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다시 한번 애틋하게 바라보고는 말했다.
“라진··· 나의 용사님··· 언젠가 크타리아에 다시 온다면, 그땐 함께해요. 저 벨라는 용사님의 신부가 되겠어요···”
신부고 뭐고 우선은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벨라는 씩씩대는 아린은 빙긋 웃으며 한번 쳐다보고는 또 한 번 약 올렸다.
“얘! 어디 두고 보자고. 라진은 또 크타리아에 오게 될거야. 날 신부로 맞이하려고 말이지. 그럼 분발해보렴. 꼬마야! 그럼 안녕···!”
그녀는 그렇게 우리를 떠나갔다. 나는 여전히 뭐가 뭔지 어안이 벙벙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서큐버스라면··· 음··· 남자를 홀려서 정기를 빼앗는 그··· 악마같은 존재라던데··· 악마라고 하기엔 굉장한 미인···”
퍼억!
“몰라! 바보야!”
아린이 그만 좀 화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끄응··· 이곳 크타리아 영지는 서큐버스들이 표적으로 삼은 곳인가 봐. 그래서 선술집에 있던 남자들이··· 하나같이 퀭한 모습이었나 봐. 얼른 떠나야겠어. 아린.”
“흥! 그래야지. 난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고 싶다고!”
“음··· 그래도 일단 조금이라도 자두자. 우리에겐 체력을 충전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니까···”
“그나저나··· 오트롱···”
“응?”
분명 선술집의 여급이 오트롱의 성별을 물어봤었다. 수컷··· 이냐고··· 설마···
“오빠! 오트롱이 위험에 처했는지 몰라! 저 요망한 악마들이 설마 오트롱까지··· 공격했을 수도 있다고!”
“어··· 어서 가보자!”
아린과 나는 오트롱의 방으로 뛰쳐나갔다. 문 앞에 다가서자 방 안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인기척은 문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곧 또 다른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방문을 나온 여인은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오트롱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자기! 오늘은 이만 가볼게. 내일 또 올 테니까 푹 자둬.”
오트롱을 향해 인사를 건넨 낯선 여인이 문밖에 서 있는 우리를 발견했다.
“어머··· 너희 뭐니···?”
아린은 다시 한번 날카로운 눈빛을 그녀에게 쏘아붙이며 말했다.
“또 올 생각하지 말고 얼른 가버려!”
그녀는 아린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짓고는 대답했다.
“우리 자기 힘이 너무 좋아서··· 난 내일 또 올 건데!? 하핫”
“다··· 당신도 서큐버스 인가요? 오트롱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나의 외침에 그녀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고, 복도에 있는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 아린 오트롱이··· 당했나 봐!”
아린은 오트롱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오··· 오트롱!! 괜찮아?”
“무슨일이 있었던 거야!? 저 여자가 혹시 네 생명력을···”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오트롱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오늘 선술집에서 보았던 남자들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눈 밑에는 검은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트롱!! 임마! 너 코··· 코피가!”
나의 외침에 오트롱은 정신이 든 듯 코피를 손으로 대충 훔쳐내었다.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왠지 오트롱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 라진··· 나··· 나는 여기에··· 남아도 괜찮을까?”
“무슨 소리야!”
“아니··· 그··· 내일 또 만나기로 해가지고···”
“정신 차려 이 자식아! 또 저 여자를 만나면 너 죽어!!”
간밤에 얼마나 많은 정기를 약탈당했는지 오트롱은 온몸에 힘이 빠져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와 함께 카르넬로 떠나는 것보다 이 곳에 남고 싶다는··· 그런 소리를 해댔다.
“이곳··· 이곳은 정말 위험해. 오트롱 동이 트는 대로 바로 떠나자고··· 우선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도록···”
우리 모두 조금이라도 더 자둬야 한다고 말을 하려던 차에 창밖에 천천히 환해지는 것이 보였다.
“버··· 벌써 아침인가···”
“뭐야··· 오빠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라··· 라진 나··· 나는 내일··· 카르넬로 합류··· 합류할게”
“무슨 소리야! 이 자식, 뭐에 이렇게 홀려버린 거야.”
“내··· 내일 밤에도 그··· 그녀를···”
쿵!
오트롱은 극한의 피로와 서큐버스에게 정기를 빼앗긴 탓인지 그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다시 침대 위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이제 어떡할 거야. 오빠!”
“···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가야지. 동이 텄으니··· 지금 바로 출발하자!”
오트롱을 들쳐 엎고 힘겹게 걸음을 옮겨 1층으로 내려왔다. 영약으로 오크의 완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거대한 오트롱을 메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오! 일찍 일어나셨네요?”
1층에는 선술집의 여급 역시 일어나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힘겹게 그녀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곳··· 혹시 서큐버스의 공격을 받고 있나요···?”
“설마··· 간밤에 무슨 일 있었나요? 방 안에 우유를 두고 주무셨으면 그럴 리가 없는데···”
오트롱은 자신의 우유를 방에 들어가자마자 마셔버렸고, 나의 우유는 아린이 빼앗아 가 버렸었다.
“우유를 두고 자면··· 서큐버스에게 공격당하지 않나 보죠?”
“음··· 서큐버스의 방문을 막을 순 없지만, 서큐버스는 남성의··· 정기와 우유를 구분하지 못해요. 우유가 가득 담긴 잔을 보면, 그 우유만 가지고 떠나버리거든요.”
“그래서··· 남자 손님에겐 우유를 주시는 거였군요···”
“네··· 맞아요···”
그녀가 왜 우리에게 우유를 주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는 아린을 한 번 쏘아보았다. 그녀는 못 본 척하고 있었지만···
선술집을 빠져나와 겨우겨우 마구간으로 이동에 성공했다. 여전히 오트롱은 잠들어 있었고, 나와 아린은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마차를 되찾긴 했으나, 카르넬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오빠··· 괜찮을까. 우린 너무 지쳐있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지금 반드시 출발해야 하지만, 거기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머리를 쓴다면 언제든 방법은 있으니까.
“카르넬까지 마차를 몰아주실 분! 모십니다! 카르넬에서 50파운드를 바로 드리겠습니다!”
왜 이 방법을 이제야 생각해 냈을까···!? 누군가 마차를 몰아줄 사람만 있다면··· 우리 모두 마차에 곯아떨어져 있으면 된다! 마차 짐칸에는 짐이랄 것도 없다. 다소 좁을 순 있지만, 우리 셋 모두 누워갈 수 있을 것이다.
“뭐···?! 50파운드?!”
“이봐! 꼬마야 정말이냐?”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너무 많이 불렀나···? 하지만, 지금은 돈보다 무사히 카르넬로 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선착순 1명입니다!”
내가 소리치자마자 근처에 있던 청년 하나가 쏜살같이 내 앞으로 달려와 외쳤다.
“제가 1등입니다! 하핫”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마차에 올라 출발 준비를 했다.
“아린! 됐다! 가자!”
또 한 번 위기를 극복했다는 뿌듯함이 차오르려 할 때, 아린이 퉁명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은 거냐고!!”
오트롱, 아린, 그리고 나 선발대를 짐칸에 실은 마차가 다시 한번 카르넬로 힘차게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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