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교대

오트롱은 여전히 쿨쿨 자고 있을 것이고··· 카르넬의 병사들 역시 내가 억지를 부려 해산시켰다. 아린은 한동안 뱀을 소환할 수 없으니, 저 흉악스러운 놈들을 막을 사람은 나뿐이었다. 성 밖을 나와 해자를 다시 한번 건너니 골렘의 물결이 넘실대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불평해봐야 소용없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조금 전 나에게 나가라고 면박을 주던 아린이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한눈팔지 말라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사지로 잘도 밀어 넣는군··· 나 참···’
그녀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골렘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놈들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없애고 최대한 간결한 공격으로 골렘을 하나씩 격파해야만 체력소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조금 전 있었던 골렘들과의 전투 덕분에 약간의 요령이 생겼다는 점이다. 놈들이 움직이는 방식과 퍼붓는 모든 공격궤적이 머릿속에 분명히 남아 있다. 더 적은 움직임과 체력소모로 놈들을 쓰러뜨릴 자신이 생겼다.
“다 덤벼!! 이 자식들아!!”
놈들을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쳐나갔다.
끼기기익!! 쿵!! 끼긱! 쿵 !! 쿠웅! ·········
◆ ◆
“헥헥··· 제기랄··· 피곤해서 미쳐버릴 지경이군!”
두 번째 물결··· 쉰 마리의 골렘을 또 한 번 다 쓰러뜨렸다. 피로가 밀려들었다. 더는 무리다.
‘제발··· 이제는 더 오지 마라. 이 자식들아! 그만 좀 오라고!’
해자를 건너서 성문 앞에 드리누워 버렸다. 성 벽 위의 병사가 내가 뻗은 것은 지켜보고 있었다.
“이봐요! 저 여기서 좀 누워 잘 테니까···! 잘 지켜보고 있다가! 놈들이 또!! 몰려오면 깨워줘요!!”
병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다. 아니 외쳤다.
“뭐··· 뭐라고!!??”
“또 오면!! 깨우라고!!! 나 자야돼!!!”
병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아직은 여름이 한창이기에 그래도 입이 돌아가거나··· 얼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재빨리 숙소로 들어가 조금이라도 자둘까 생각했지만, 언제 또 골렘들이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이곳에 자리를 깔고 누워버렸다.
“오지 마라··· 골렘···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오트롱··· 아이 정말··· 도와줘 이 자식아··· ”
몇 마디 중얼거리고 있자니,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 ◆
“······나라고!!!”
땡땡땡땡!!!
카르넬 성에서 울린 날카로운 종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뭐야! 웬 종소리!!“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왔어!! 왔다고!! 지금 코앞이야!! 피해!!”
성벽 위의 병사가 필사적으로 고함치고 있었다. 서둘러 몸을 일으켜 전방을 바라보았다. 골렘이 나의 지척에 접근해 주먹을 날리려 하고 있었다. 황급히 몸을 뒤틀어 녀석의 주먹을 피했다.
“이 자식이!!”
끼기이익!! 쯔아악!
미스릴 검을 강하게 휘둘러 녀석의 가슴팍을 찢어버렸다. 골렘이 보였을 때부터 병사는 필사적으로 소리쳤을 것이다. 선두에 있는 녀석을 쓰러뜨리니 녀석을 뒤따르던 몇 마리가 이미 다리를 통해 해자를 건너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달려나가 다리 위에 녀석들을 박살 내고, 다리를 건너 해자 바깥쪽으로 뛰쳐나왔다. 벌써 해자 근처로 접근한 골렘 무리 한가운데로 달려들어 갔다.
“그래!! 끝까지 해보자! 온종일 할 수도 있어! 이 자식들아!!”
얼마간 잠을 잔 것 같았지만, 나의 움직임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은 놈들을 단숨에 박살 내고 성문 앞에 다시 드러눕는 모습만을 상상하고 있었다.
찌르고, 베고, 찌르고 또 찌르고
끊임없이 몰려오는 녀석들에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전사들이 올 때까지 며칠을 이렇게 보내야 할지 겁이 났다.
“으아!!!!!! 개운하다!!!!!!!!!!”
전투에 한창인 와중에 성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이고! 잘 잤당!!!!!!!”
드디어··· 드디어!!!
오트롱이 거대한 미스릴 대검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카르넬 동쪽 언덕에서 반가운 태양이 고개를 들려 하고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나의 친구가 나를 구하러 힘차게 걸어오고 있었다.
오트롱을 향해 힘차게 고함쳤다.
“야!!! 이 새끼야!! 잘 잤냐!!”
오트롱은 씨익 웃고 있었다. 나는 골렘 무리에서 빠져나와 멀찍이 뒤로 물러서 버렸다.
“으갸아아아악!!!”
오트롱은 거대한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며 골렘들을 향해 돌진했다.
“오트롱! 놈들의 약점은 가슴팍이야! 가슴팍을 노려!”
오트롱은 그의 대검을 횡으로 크게 골렘들을 향해 휘둘렀다.
빠가가각 쩌억!! 쯔어억!! 쩍!!
단숨에 세 마리 골렘의 가슴팍이 갈라져 버렸다. 가슴을 기준으로 세 마리의 골렘은 두 동강이 났으며 바닥에 나뒹굴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 압도적인 힘이다!‘
오트롱은 쉬지 않고 그의 대검을 휘둘러댔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두세 마리의 골렘들이 동강 나 나뒹굴어 버렸다. 검에 힘을 집중하여 가슴팍을 찔러넣어 한 마리 한 마리 정성스럽게 쓰러뜨리던 나와는 전혀 다른 전투형국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오트롱은 모든 골렘을 처리해버렸다.
’맙소사··· 이렇게나 빨리···‘
기쁜 감정에 앞서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이놈들을 처리하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고생했는데, 오트롱은 이렇게나 쉽고···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일을 끝마쳐 버렸다.
“라진! 더 없어···? 이게 다야? 으캬갸갹”
“오트롱! 해가 질 때까지 방어를 부탁해. 전사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놈들을 막아내야 할 거야”
“라··· 라진! 이제 해가 떴는데··· 해가 질 때까지···?”
“응··· 해가 지면 교대해 줄게. 해가 뜰 때까지··· 그때 쉬면 될 거야”
“아아··· 그럼 하루를 반으로 갈라서 반은 내가, 반은 라진이··· 여길 지켜야 한다는 건가···?!”
“맞아··· 정확해. 보통은 2교대라고 부르지!”
“흐암 좋아! 다음번엔 언제 와?”
“음··· 이번 공격을 빠르게 정리했으니, 시간이 좀 있을 수도 있겠지. 우선 돌아가자”
오트롱과 나는 해자를 다시 건너 성문 앞에 다다랐다.
’이제야 잘 수 있겠구만!‘
이제 막 동이 텄으니 해가 질 때까지 늘어지게 잠들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체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뒤를 돌아보니 오트롱도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얌마! 넌 왜와. 넌 지켜야 한다니깐?”
오트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 밖에 있으라고?”
“그래! 언제 놈들이 올지 모른다고. 나가! 나가라고!”
나의 성화에 오트롱은 뒷걸음질 쳤다.
“농땡이 피우면 안 돼. 내가 잠들면 이제 이곳을 방어할 수 있는 자는 너뿐이라고. 뚫리면 끝장이야. 알겠지?”
오트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부탁한다. 해가 지면 교대해 줄게! 좀 이따가 봐!”
성벽 위를 바라보니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 하나가 손짓으로 우리가 지낼 숙소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숙소에는 아린만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그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조용히 비어있는 침대 하나에 몸을 뉘었다. 아린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 ◆
“오빠 뭐해! 곧 해가 떨어질 거라고!!”
아린의 외침이 귀속을 후벼팠다.
“으으응··· 흐아암··· 내가 얼마나··· 잔 거지···?”
“뭘 얼마나 자! 곧 해가 질 거라니까. 해 뜨자마자 잠들어서는 해질 때까진 잔 거지 뭐!”
창밖을 바라보니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오랜만에 침대에서의 숙면으로 이전보다 몸은 훨씬 더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몸이 가벼워진 만큼 머릿속도 맑아진 것 같았다. 카르넬에서의 지금까지 일을 정리하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냈다.
“좋아. 나가자! 아린! 오트롱이 기다리겠어!”
오트롱은 지금까지 줄곧 골렘들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왕국의 어떤 누구보다 강하지만 오랜 전투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숙소를 빠져나와 성문에 다다르니 병사들의 대장 역시 성문을 서성이고 있었다.
“여어! 라진··· 간밤에는 고생이 많았네. 자네들 덕분에··· 이곳이 함락당하지 않았어!”
“흐암··· 네 별말씀을요. 그보다 이제 골렘··· 골렘은 하루에 몇 번이나 진격해오는 건가요?”
“음! 해가 떠 있는 동안 네 번의 공격이 있었어. 지난밤에도 네 번 정도 왔으니··· 하루 여덟 번의 골렘의 공격이 있는 셈이지···”
’하루에 여덟 번이라··· 그럼 내가 지키는 동안 네 번의 골렘 물결을 박살 내면 된다는 것이군. ‘
골렘들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할 수 도 있는 간격이었다. 이 정도라면 오트롱과의 2교대로도 며칠간은 이곳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티칸 장군께서 놈들의 근거지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어, 골렘들은 남쪽 갈리아 석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 같더군··· 그곳에는··· ’바위의 숨결‘이라는 마법 길드가 있는 곳이지.”
’마법사들의 짓이란 건가···‘
대륙에 극소수 남아있는 마법사들··· 그리고 마법길드는 인간들의 사회에 극도로 관여하지 않는다. 갈리아 석산의 마법사들이 무슨 이유로 이런짓을 하는지는 도무지 이해가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알아내면 그 뿐이니까.
“좋아요. 며칠 내로 우리 전사들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저와 오트롱이 이곳을 방어하겠습니다. 전사들이 오면··· 그때는 반격의 시간입니다.”
대장은 흡족한 듯 웃음 지었다. 우리가 도착한 이후로 병사들은 쉴 수 있었고, 인간 하나와 오우거··· 하나가 골렘들을 오는 족족 박살 내고 있으니 그에게도 마음의 평온이 생긴 듯했다.
성문을 빠져나와 오트롱의 상태를 확인했다. 오트롱은···
“오트롱··· 뭐··· 뭐야 이건?”
“여어 라진! 왔어? 교대 시간인가 보군! 흐헤헤”
성문 앞에는 커다란 천막이 하나 펼쳐져 있었고, 천막 아래 침대 하나와 식탁으로 사용될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음식들이 그득했고, 오트롱은 게걸스럽게 그것들을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내가 자는 동안··· 교대 근무자에 대한 복지가 많이 개선됐나 보네!?”
“하하! 천막이 쳐진 후로 아주 좋아졌어. 골렘들이 오면 단숨에 해치워 버리고, 여기서 잠을 자거나 하면 돼. 라진!”
천막의 처마에는 종이 하나 매달려있었다. 매달린 종에는 끈이 달려있었고, 그 끈은 성벽 위로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성벽 위의 병사가 줄을 당기면 이곳의 종이 울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네가 잠들더라도 놈들이 보이면, 이 종이 울릴 거야. 그때 나가서 처리하면 돼!”
아주 훌륭한 체계가 구축되어있었다. 골렘을 처치하는 오트롱의 속도를 고려할 때, 오트롱은 근무시간 대부분을 침대 아래에서 보냈을 것이다.
“라진! 그럼 수고해. 나는 아린이랑 좀 놀아야겠어! 헤헷.”
“그··· 그래 고생했어. 오트롱, 내일 아침에 보자고···”
“그리고 라진··· 나······”
“응? 왜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크타리아로 갈 거야··· 그때 그 인간 여인에게 청혼할 생각이거든!”
오트롱은 크타리아에서 만났던 그녀가 서큐버스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떡하지···‘
오트롱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듯했다. 지금은 그의 순정을 짓밟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서큐버스이며 너의 생명력을 갉아먹기 위해 접근했다··· 이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하하··· 정말 불같은 친구로구먼! 오트롱···! 어떻게 한번 본 여인과 결혼을 한단 말인가 자네! 우리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을 좀 해보세···”
“흐음··· 그런가···”
오트롱은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더니 이내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오늘의 교대근무가 시작되었다. 갈리아의 마법사들이 골렘들을 도대체 왜 보내고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전사들이 오면···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무슨 더러운 의도로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죗값을 치르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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