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의 숨결

오트롱과 내가 교대근무를 선지 어느덧 닷새째가 되었다. 닷새 동안 골렘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꼭 여덟 번씩 성으로 몰려왔고 그때마다 나 또는 오트롱에 손에 박살이 나버렸다. 해자 바깥은 부서진 바윗덩어리가 지천으로 깔려있었고, 골렘들이 오지 않는 시간에는 카르넬의 병사들은 성 밖에서 돌들을 정리하곤 했다.
“오트롱··· 이제 슬슬 유느이트가 올 때가 됐을 텐데···”
“흐헷··· 어서 왔으면 좋겠당!”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어, 나의 근무시간이 아니었지만 오트롱과 노닥거리는 중이었다. 골렘들을 상대하는 데에 완전히 도가 터버렸고, 놈들을 금세 처리한 후에는 천막에서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에 이제 교대근무는 체력적으로 크게 부담되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네 말대로··· 지금 생활이 뭐 힘들진 않긴 한데···”
지금의 상황은 일방적인 소모전이다. 우리는 인력을 동원해 적들은 막아내고 있지만, 우리가 쓰러뜨린 골렘은 바윗덩어리를 매개체로 한 소환물일 뿐이다. 아무리 골렘들을 박살 내도 적에게 피해를 줬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오트롱, 생각해봐. 적은 지금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소환물만 지속해서 보내고 있어.”
“그런데···?”
“그리고 원래는 하루에 두 번만 골렘들을 보냈지. 지금은 하루에 여덟 번이고 말이야.”
“그··· 그렇지?”
“지금은 우리가 여유 있지만, 놈들이 만약에 하루 열 번, 열두 번··· 아니 스무 번 정도 골렘들을 보낸다고 생각해봐!”
“에이 설마···”
“뭔가 이상해··· 하루에 여덟 번을 보낼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면 말이야. 카르넬은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함락됐을 거야. 아니 수도까지도 밀고 올라갔겠지.”
“우음··· 그러게···! 왜 처음부터 하루에 여덟 번씩 보내지 않은 거지··· 헤헤 잘 모루겠당”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은 놈들을 막아내는 데 문제가 없지만··· 언제든 상황은 변할 수 있단 말이야. 유느이트가 도착하면 최대한 빨리 갈리아 산으로 갈 거야.”
“헤헤··· 음! 전사들을 몰고 가서 거길 쑥대밭으로 만들면 되는 건가···!?”
“전사들은 여길 지키고 너와 내가 쳐들어가는 거지! 누군가는 여기를 지켜야 할 것 아냐”
“흐암······ 나도 꼭 가야 해···?”
성문 앞에서 오트롱과 대화하는 사이 티칸과 아린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라진! 전사들은 언제 오는가··· 전사는커녕 매일 돌덩이들만 몰려들고 있지 않나?”
그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골렘 전쟁을 종결짓고 싶어 했다.
“봉화를 올린 지 닷새입니다. 이제 슬슬 도착 할거에요. 전사들이 오면 골렘에 대한 방어선을 영지의 바깥으로 옮길 겁니다. 그러면 영지의 재건작업도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저기 오네요!”
“왔다고? 전사들 말인가? 아니면 골렘들 말인가?”
“둘 다요!”
카르넬의 남쪽에서는 골렘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움직이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유느이트가 이끄는 오크 전사들이 대열을 갖추어 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왔어···!’
“오트롱! 드디어 우리!! 교대근무가 끝났어!!”
기쁨에 겨워 오트롱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오트롱과 함께 유느이트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 주었다. 유느이트는 우리가 흔드는 손을 확인하고 자신의 손 역시 들어 올렸다. 그의 옆에는 핸더슨도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흐아!! 오트롱···!! 이제 우리 골렘 따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유느이트를 향해 골렘의 진격을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유느이트와 핸더슨 그리고 정예 오크 전사 모두가 골렘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적의 존재를 식별하자 핸더슨은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운 오크의 언어로 전사들에 명령을 내렸다.
“붉은 달의 전사들이여! 모두! 돌격하라!“
핸더슨의 명령에 전사들은 골렘들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핸더슨이 선두에 서서 달리고 있었지만, 어느새 전투에 굶주린 유느이트가 더 빠르게 치고 나갔다.
끼긱!! 끼기기긱!! 쓰컹!!
골렘 무리 속으로 뛰쳐 들어간 유느이트는 골렘들을 헤집으며 그들을 썰어대기 시작했다. 이어 핸더슨과 전사들 역시 골렘들 무리 충돌하여 난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핸더슨 사령관이··· 단단한 골렘을 박살 낼 수 있을까? 인간의 힘으론 무리라던데···”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핸더슨의 전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간결하고 날카로운 공격을 골렘에게 퍼부었지만, 그의 검이 골렘을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핸더슨 아저씨! 가슴팍··· 가슴팍이 약점이에요!!”
자신의 공격에 손해를 입지 않는 골렘 때문에 당황했던 핸더슨은 나의 외침을 듣고 다른 방식을 생각하는 듯했다.
‘인간의 힘으론··· 무리일 텐데···’
사실 전투는 핸더슨이 나서지 않더라도 다른 전사들이 골렘들을 모두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핸더슨은 전투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상대하는 골렘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며 놈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나는 핸더슨의 움직임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인간의 완력으로 공략 불가능한 골렘이라지만, 핸더슨이라면···
‘핸더슨 아저씨,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핸더슨은 이제 골렘의 공격패턴을 어느 정도 파악한 듯했다. 그는 골렘의 공격을 충분히 좌우로 피할 수 있음에도 살짝살짝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전장에서 빠지려는 건가···?’
골렘은 핸더슨과의 거리가 멀어지자 우악스러운 주먹을 치켜들고 그를 향해 돌진해왔다. 그 순간 핸더슨 역시 골렘을 향해 뛰쳐나갔다. 골렘이 온몸을 날려 주먹을 뻗는 순간, 핸더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온몸을 비틀어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자신의 검을 골렘의 가슴팍에 힘차게 꽂아 버렸다.
끄끼기기으익!! 쩌적··· 팍!!!
‘와! 저걸 저렇게 한다고?’
골렘은 미스릴 소드에 가슴이 꿰뚫려 바닥에 고꾸라져버렸다. 핸더슨 역시 인간이기에 골렘을 공략하기에는 완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을 메꾸기 위하여 적의 힘, 골렘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힘을 이용했다. 엄청난 전투기술과 더불어 영리한 전략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 것이다.
“역시··· 핸더슨이군”
핸더슨이 붉은 달의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전사들과 유느이트의 검술 역시 한층 더 발전한 듯 보였다. 전사들은 강력한 힘과 숙련된 검술로 어렵지 않게 골렘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골렘을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진 오크 전사 스물이 이곳에 왔다. 오십의 골렘따윈 그들에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들을 마지막 남은 골렘까지 깔끔하게 해치워 버렸다.
전투를 마친 유느이트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라진··· 고작 이 정도도 인간들은 막아내지 못한다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뭐··· 극단적으로 방어력에 집중한 상대였으니까, 이런 돌덩이를 쪼갤 수 있는 건 어지간한 힘으론 불가능하거든.”
붉은 달의 전사들이 손쉽게 골렘들을 처리하자, 티칸이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좋아, 좋아!! 훌륭하구만! 라진! 이제 놈들의 근거지를 소탕해야겠지!!”
그의 말대로 한시라도 빨리 갈리아 산맥을 토벌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전사들이 왔어도, 앞으로 어느 정도 숫자의 골렘들이 진격해 올지는 알 길이 없다.
“유느이트! 잘 들어, 이제 나와 오트롱이 골렘들이 만들어지는 곳으로 갈 거야. 네가 전사들과 함께 영지를 방어해줘.”
유느이트는 나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 라진! 나도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네 놈보다는 내가 강하니깐 말이야.”
“이봐, 유느이트 자넨 족장이야. 전사들을 지휘해야지. 핸더슨 사령관과 영지를 방어해줘. 영지 외곽에 진을 치고 오는 족족 놈들을 없애버려. 그래야만 카르넬의 재건을 시작할 수 있어.”
유느이트는 족장으로서 전사들을 지휘하고 행정적인 부분을 처리하는 것 보다, 자신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원했다. 그는 골렘 본거지 공략에 자신이 갈 수 없음에 괴로워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라··· 라진, 족장 네가 할래? 난 아무래도···”
“시끄러! 쓸데없는 얘기할 시간 없어. 전사들이 왔으니 지금 바로 오트롱과 출발할게!”
나와 유느이트의 대화를 들은 오트롱은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라진··· 나 생각해봤는데··· 전사들이 왔으니, 나 이제 크타리아로··· 가볼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나의 사랑을··· 찾아 떠날 거야.”
이제는 방법이 없다. 오트롱에게 그녀는 서큐버스이며 그녀를 만난다면, 결국엔 죽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나는 아린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눈치를 주었다.
‘네가 말해야지. 난 도저히 말 못 하겠다고!’
나의 눈빛을 느낀 아린이 오트롱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오트롱, 지난번 만났던 그 여자는··· 인간이 아니야. 서큐버스라고··· 네 생명력을 빼앗기 위해, 방에 방문했었던 거야···”
오트롱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녀는 우리의 언어를 사용했어. 역시 인간이 아니었군”
“아니! 오트롱, 인간이고 말고가 아니라! 널 해치려고 접근했던 거야! 크타리아에서 그녀를 만나면 이번엔 정말 어떻게 될지 몰라”
나와 아린의 만류에도 오트롱은 흔들리지 않았다.
“상관없어. 그녀를 위해서라면!”
뜨악!?
“뭐가 상관없다는 거야! 너 죽어 이 자식아. 정신 차려!”
“그녀의 사랑을 얻는다면, 그녀는 날 죽이지 않겠지. 그렇지 못한다면, 죽어도 좋아···!”
오트롱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순정이다. 사나이 순정은 막을 길이 없다. 오트롱은 죽기를 각오하고 그녀에게 구애할 작정이었다. 혹시나··· 서큐버스가 오트롱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오트롱과 그녀가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게 말이 되나?
“유느이트! 뭐라고 말 좀 해봐”
유느이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트롱을··· 그를 어떻게든 말려달라고.
“라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사나이 순정 앞에 어찌 폭풍우 하나 없겠는가. 가라! 오트롱, 사랑을 찾아!”
“여··· 역시! 이해해주는군! 유느이트! 붉은 달의 사나이여!”
내 생각과 다르게 오크와 오우거 모두 사나이 순정을 가진 뜨거운 남자들이었다.
“좋아! 그럼 오트롱 대신, 골렘 근거지를 소탕하고 내가 만나러 갈 때까지 핸더슨 사령관과 함께 움직이도록 해. 오우거 혼자서 인간의 영지로 가는 것은 곤란해!”
핸더슨 역시 나의 말을 모두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트롱 역시 그것에는 동의했다. 오트롱이 골렘 근거지 소탕 작전에서 빠지게 되자, 유느이트가 다시 말했다.
“그럼! 오트롱이 빠졌으니, 하는 수 없이 내가 움직일 수밖에 없구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핸더슨 사령관도 없는데 네가 어디를 가!? 하루에 ”
유느이트는 다시 한번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린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거만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갈리아 산맥을 향해 바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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