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새풍
무림세가인 동시에 군부의 정체성을 가진 가문. 산동악가에서 가주란 직위는 실권과 다소 동떨어졌다.
군부에 전성기를 대부분 바치기 때문이다. 가문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북경 근처나 북방 전선에 나가 있는 날이 길었다.
‘형님의 소식을 듣고 싶은데···. 할아버님께 여쭈어선 안 되겠지? 노발대발하실 테니.’
태상가주는 완벽한 무관의 표상이다.
원리 원칙과 권위를 고수하는 고지식한 노인. 어린 악군위가 평소 지니는 조부의 인상은, 실종된 형의 행방을 선뜻 물을 수 없게 만들었다.
“숙부님.”
“음? 무슨 일로 찾아왔니, 군위야.”
중년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악군위를 응접했다. 초췌한 신색은 헌앙한 풍채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겪는 노고가 여실히 전달될 지경이었다.
가주 대리, 악진휘.
대장군으로 임관한 악가주를 대신하여 가문의 살림살이를 맡은 자였다.
명문세가의 실세라고 불릴 순 있지만, 군과 밀접하고 가규가 지엄하기에, 권력보다는 명예를 위해 봉사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편하게 물으렴. 가족끼리 꼭 허가받지 않아도 된단다.”
악군위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도 몇 번이고 망설였다. 혹여나 자신의 오점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교관님께 들었습니다. 큰형님께서 사파에 강제로 입문하였다고. 정말로 사실입니까. 제 머리로는 농담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숙부는 표정이 다채로운 자였다. 부친과 조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인간적인 친근감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가 무표정을 지어 감정을 숨기는 것만으로도,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네 눈은 못 속이겠구나. 아니, 내가 너무 무른 건가.”
“제겐 정보가 어느 선까지 허가되었습니까.”
“그건···.”
대답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인 걸까. 가주 대리가 곤혹스러워하며 말을 줄일 때였다.
불현듯 장엄한 기운이 지근거리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말이 맞다. 악가의 전(前) 후계자는 강호를 주유하던 도중, 멍청하게도 사마외도에게 잡혀 목숨을 빌미로 마공을 익혔지.”
“사실이었군요. 알겠습니다.”
절대적인 위엄의 노인, 태상가주였다.
악군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떠나려던 찰나, 눈치를 보더니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본가 차원에서 형님을 구할 순 없습니까.”
“불명예스러운 놈을? 우리가 왜.”
태상가주가 근엄하게 물었다. 기로에 놓인 순간이다. 조부가 만족할 답을 신중하게 도출해야 했다.
악군위는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외쳤다.
“우선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서오경을 떼며 천륜(天倫)의 중요성을 깨우쳤습니다. 동생이 된 도리로서 형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감정입니다.”
“그럼 집안 어른들은, 천륜을 무시하는 잘못을 벌였다는 거냐.”
괜한 꼬투리를 잡는 화법. 가슴이 철렁할 지경이었다. 묵직한 분위기까지 가세하니 압박감이 굉장했다.
가문의 특성상 상명하복은 안 된다. 가장 싫어하는 행위다.
동시에 태상가주의 성향이 떠올랐다.
조금 무모한 도박이지만 당돌함이 필요했다.
“그렇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낮고 명료한 목소리였다.
막상 내뱉으니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혔다.
‘나는 조부께서 대견해하는 손주야. 약간의 반항 정도는 귀염성으로 넘어갈 수 있어.’
물론 도박이 먹히리란 확신은 약 칠 할 정도.
불안한 감이 있었으나, 구부러지는 눈썹과 함께 입꼬리가 올라가며 설득이 먹혔다는 걸 깨달았다.
“오호. 더 지껄여보거라, 사랑스러운 손주야.”
기화가 찾아왔다. 저 벽창호가 납득할 만한 논리를 짜 맞추어야 한다. 다행히 평소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청산유수처럼 말이 일목요연하게 흘러나왔다.
“무려 산동악가의 핏줄입니다. 형님은 뛰어난 재능을 물려받았지요. 넓은 아량으로 포옹하여 두고두고 쓴다면, 언젠가 요긴할 몫을 해낼 겁니다. 또한 형님의 반항은 성장기에 으레 겪는 충동적인 선택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시간이 지나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면 해결될 문제이지요. 아직 개심의 여지가 있습니다.”
긴 설명이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눈빛이 사나우리만치 뚜렷했다.
“가문의 지원을 누린 주제에 의무에서 도망치는 건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허나 형님이 가문에 이바지하도록 충분히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엄준한 가규를 따르는 대신 융통성을 발휘해야 했던 것. 이를 하지 못한 건 조부님의 명백한 실책입니다.”
논리는 완성되었다.
기분이 언짢아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태상가주는 무작정 묵시할 수 없으리라.
악군위의 의견을 부정하는 건 진정성을 무시하는 것. 그렇기에 반감을 사고 만다. 장남이 떠난 마당에 태상가주는 유망한 손주 또한 배려없는 행위로 놓치고 싶어하진 않으리라.
다행히 기대대로 이루어졌다.
하하.
주름진 입매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경탄스러운 대답이로구나. 형제를 걱정하는 고운 마음씨도 장하다. 너는 못난 어른들은 상상도 못 할 관점을 지적해주었어.”
“아닙니다, 조부님. 제가 괜한 조급함에 버릇없이 굴었습니다.”
“녀석 겸손하긴. 곱씹을수록 네 말이 타당하다. 진영이를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 컸다.”
태상가주는 가주 대리를 바라보며 입이 마르도록 긴 칭찬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다만 이 일은 네 아비가 전장에서 돌아오고 난 뒤 상의해야 할 듯싶다. 난 어디까지나 골방으로 물러난 노인에 불과하거든.”
가문에서 가장 발언권이 센 태상가주였다. 그가 결정하였으니 아무리 가주라도 반대할 리 없다.
악군위는 기쁜 마음으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호칭의 변경은 의도적이었다. 아무리 꽉 막힌 군인일지라도, 핏줄에게까지 마음을 완전히 닫을 순 없다.
조금 불온한 마음가짐이었지만, 먹혀들었는지 태상가주는 오랜만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다부진 용모와 썩 어울리진 않았다.
“우리 군위가 이번 월말 평가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낸다면, 이 할애비가 더 힘을 써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악군위는 우수한 자질을 지녔기에 동년배와 함께 훈련할 수준을 진작 넘어섰다. 훈련생들은 나이가 최소 다섯 살은 많은 이들이었다.
‘역시 조부님이야. 손주의 측은지심을 이용하여 동기부여 하다니.’
태상가주는 사람을 잘 다룰 줄 아는 자였다.
군 시절에도 병졸들에게 무공을 가르쳐주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내적 동기와 욕망을 끌어올리는데 타고난 감각과 수완이 있었다.
일신의 무위(武威) 이전에, 수하를 홀리게 하는 용인술(用人術)도 탁월하였다.
“소소한 소망이로군요. 부탁하지 않으셨어도 제가 당연히 얻어냈을 결과입니다.”
평상시와 달리 건방질 정도로 당찬 대답은 태상가주의 환심을 사는 데 효과적이었다.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단다, 악군위.”
* * *
어린 나이 때문에 발육이 상대적으로 더딘 상태였다. 스무 살이 넘은 근육질 장정들과 경쟁하여 이기긴 힘들었다.
그러나 악군위는 해내었다.
콰아앙!
강인한 발길질이 마지막으로 복부를 가격하였다. 내가중수법의 묘리가 섞여 철갑 너머 내장까지 진탕(震蕩).
족히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사내가 쪽도 못 쓰고 나뒹굴었다. 훈련 교관이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악군위, 승리!”
체급을 무시하는 결과는 경악스러웠다.
일대일 비무전, 월말 평가는 한참이나 어린 소년의 전승(全勝)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악군위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버지께서 늦게 오시네. 요즘 국경 지대에서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더니.’
북방은 마경(魔境)이나 다름없는 곳이라고 들었다.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절세고수조차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흉악의 전장이라고.
세 번의 월말 평가를 더 거치고 나서야 악군위의 부친, 산동악가의 가주는 가문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큰 중상은 없었다.
허나 기대를 짓밟는 목소리가, 악군위의 마음을 송두리째 무너트렸다.
“네 형을 용서해달라? 나약한 소리 하는군.”
원체 냉랭한 인간이었지만, 평시보다 신경질적이었다.
“잘 들어라, 아들아. 넌 모르겠지만 장남은 이미 몇 번이고 설득했다. 결국 몰래 가출까지 하였으니 이젠 절연인 관계지. 하등 신경 쓸 것 없다.”
“그래도, 아버지. 한 번만 용서를-”
“누군가는!”
불현듯 터진 고함. 말을 단호히 끊는다.
“가문의 누군가는, 저 빌어먹을 전장에 가서 외적과 싸우고 군대를 이끌고 끝내 살아남아야 한다. 그게 본가의 숙명이며 존재 이유이고, 대의를 위한 사명감이다.”
악에 받친 윽박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렇지만 허옇게 센 흑발의 머리칼이, 전신에 새겨진 수복 불가의 상흔이, 절뚝거리는 왼발이 저 마경의 참사를 처연(凄然)하고도 처연(悽然)히 대변하였다.
악군위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장남이 도망쳤다면 그 의무는 누가 대신 질 것 같으냐? 네 둘째 형이다. 그다음은 바로 군위 너고.”
“······.”
“가문에 억압되지 않고 자유를 누린다라. 참 낭만적인 행보지. 헌데 그 행동의 결과를, 끊기지 않을 사명의 연쇄를. 누가 책임질지 뻔히 알면서 그딴 짓을 벌여? 네 형은 말이다. 자신의 알량한 행복을 위해 동생들의 선택권리까지 빼앗은 거란다. 이기적이고 괘씸한 놈.”
악가주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는 한차례 감정을 폭발시킨 뒤에야, 이마를 쓸어 넘기며 마음을 진정했다. 그리고 제 아들에게 뒤늦은 용서를 구했다.
“미안하다. 이런 집안에 널 태어나게 해서···.”
몇 번이고 울부짖던 악가주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 * *
그날의 대담 이후, 폭풍전야와 같은 시간이 흘렀다. 악가주가 북방 전선으로 다시 복귀하고 그해 여름.
─난데없는 참변은 비보를 몰고 왔다.
“아버지···?”
양 눈을 잃은 채 돌아온 악가주.
폐인의 몸이 된 건 물론이고, 북방대장군의 직위는 박탈. 절망에 빠진 그는 가문에 홀연히 칩거하였다.
태상가주는 은퇴를 번복하고, 서둘러 금의위(錦衣衛) 최고 수장으로 임관하였다.
여러모로 소란스러웠던 북새풍의 반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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