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
무림세가는 혈족 중심으로 운영한다. 그렇다고 전부 친인척으로 구성되어있진 않는다. 외부에서 유입된 무사들도 존재한다.
재질이 뛰어난 아이는 이따금 호적에 집어넣어 성씨를 부여하곤 했다.
“저 아이는 ‘진짜’다. 조만간 악씨 성을 얻겠군. 밑바닥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인가 독기마저 보여.”
악군위가 속한 집단은 수습무사 중에서 상위권만 모인 곳이다. 자연히 연배가 높아 동년배 아이는 찾아볼 수 없다.
헌데 파릇한 신참이 유입되었다.
그것도 열다섯 살. 같은 나이.
그만큼 우수한 실력을 보유했다는 뜻이다.
저절로 눈길이 갔다.
어쩌면 경쟁심일지도 몰랐다.
스윽.
“뭘 봐.”
얼떨결에 눈이 마주쳤다. 저쪽도 의식하는 걸까. 찌릿 째려보며 사납게 지껄였다. 저 날 선 반응에 괜히 기분 나빴다.
‘다음 비무에서 밟아줘야겠어.’
평소 별 감정 없이 훈련에 임하는 악군위였으나 오랜만에 호승심을 느꼈다. 그리고 기회는 며칠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월말 평가다. 순위가 정체된 놈, 떨어진 놈들은 지옥 훈련이 있을 줄 알아라!”
훈련 교관이 커다랗게 호통쳤다.
‘녀석의 제대로 된 실력을 볼 때인가.’
악군위는 늘 수석이었다.
자질과 무공은 연차를 따지지 않는 법. 나이가 스물이 넘은 이들, 수료를 앞둔 이들도 어린 소년을 넘어설 순 없었다.
동년배의 신참만이 유일한 흥밋거리였다. 그 바람대로 신참은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쿠우웅.
건장한 사내가 뒤로 나가떨어지며 땅바닥을 굴렀다. 훈련 교관이 기특하다는 듯 외쳤다.
“류진, 승리!”
류진(柳振). 신참의 이름이었다.
전투가 끝났음에도 독살스러운 기운이 잔뜩 일렁이고 있었다.
시궁창에서 끈질기게 구르며 출세를 갈망하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눈빛. 녀석의 성향이 대략 짐작 갔다.
“하, 이 자식들. 내 밑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나잇값도 못 하고 한참이나 어린 애송이들한테 지다니. 어디 가서 나한테 배웠다는 소리 하지 마라.”
교관은 전부 들으란 듯 큰 목소리로 불평했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더니 장난기 담긴 표정으로 악군위를 지목했다.
“악군위, 너와 동년이다. 붙으면 딱 좋은 그림이 되겠지? 그렇다고 추한 꼴을 보여선 안 돼. 태생부터가 한참이나 다르니까.”
“네, 알겠습니다.”
호명받은 악군위는 성큼 앞으로 나왔다. 앞서 두 번이나 비무를 치른 뒤였기에, 체력에 관한 공평성은 문제없었다.
두 명의 어린 무인이 서로를 마주 봤다.
산동악가에 와서 잘 먹기라도 한 걸까. 분명 하층민 출신이라고 들었건만, 눈높이는 류진이 악군위를 낮춰보는 수준이었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의 삼남이라고 했나? 꼴사납게 내동댕이쳐지는 걸 각오해야 할 거야. 명문가의 도련님.”
“글쎄. 건방진 신참의 기를 죽여주는 게 명문가 도련님 된 자로서 도리인 것 같기도 하고. 코피 흘리고 울면서 도망치지나 마라.”
도발은 고수의 소양이라고 배웠다. 항상 연습했는데 성격 때문일까. 영, 입에 달라붙진 않았다.
그렇지만 썩 먹힌 듯했다.
“본때를 보여주지!”
류진은 검파를 쥔 손에 힘을 잔뜩 주더니, 즉각 땅을 박찼다. 우악스러운 기운이 검격에 실렸다.
악군위는 어깨에 받치던 창을 움직였다. 기다란 창신이 바람을 가르며 반원을 그렸다. 짧은 굉음이 대기에 움텄다.
카앙!
창과 검의 대결.
이곳에서 어울리는 장면은 아니었다. 창법의 명가로 불리는 산동악가였기에, 악씨 혈족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창을 주 무장으로 뒀다.
─창이야말로 모든 병장기 중 제일이다.
창잡이라면 입이 닳도록 하는 말이었다.
강호에서 가장 흔한 무기가 도검이란 점에서 봤을 때, 그저 창객들이 자신들을 띄우는 말. 딱 그 정도로 치부하는 자들이 많았다.
허나 의외로 검객들도 순순히 인정하곤 했다. 검보다 창이 훨씬 더 우수한 무기라는 것을.
카강, 캉!
격돌음이 울리며 뜨거운 불티가 튀었다. 뒤로 잠시 물러난 창은, 구붓하게 휘어지더니 공간을 단숨에 주파했다.
창날이 횡으로 휘둘리며 측면 머리를 노렸다. 류진은 호흡의 박자마저 잃으며 다급히 검을 치켜올렸다.
채앵!
막아낼 준비가 되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성공한 방어. 한 걸음 뒤편으로 밀려난다. 무시무시한 힘에 류진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자세가 불안정해진다. 흐름이 빼앗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창은 끊임없이 연격을 쏟아부었다.
간합(間合).
상대와의 남은 거리.
자신은 상대를 공격할 수 없는데,
상대는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
주도권은 간합이 더 긴 자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이 모든 병장기 중에서 제일이라고 불리는 이유.
‘물론 집안에 창잡이밖에 없어서 강제로 주입된 지식일 수도 있긴 한데···.’
수천 년 무(武)의 역사에서도 끝나지 않고 설왕설래가 오가는 논쟁.
그렇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승리의 요인 중 하나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악가의 직계인가. 그저 감탄만 나와. 간합을 저리 귀신같이 통제한다면 어찌 공략하라는 건가. 신참 입장에서는 절망적이겠군.”
삼척검(三尺劍).
강호에서 보편적인 검의 길이다.
저것을 십 척이나 되는 장창이 거리를 농락하며 파고들어 오는데, 심지어 회전력까지 실려 충돌 시 파괴력이 엄청났다.
이 격차에서 승기를 잡으려면 어떻게든 간합을 좁혀야 하는데, 악군위 정도의 고수라면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류진 역시 보기 드문 기재였다.
“치잇···.”
이를 악물더니 무언가 결심했다. 직후, 발바닥이 지면을 격하게 밀어내더니 창의 간격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스가가각!
창날이 왼팔을 베었다. 뜨거운 선혈이 바람에 휘날리며 꽃잎처럼 번졌다. 그럼에도 류진은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무모한 돌격이야. 실전이었으면 죽었어. 아닌가? 훈련이라서 잘 모르겠군.”
“악씨 직계 쪽이 손속을 어디까지 둬야 할지 결단을 못 내린 것 같은데···.”
구경하던 훈련생들이 반사적으로 교관을 바라봤다. 교관은 그저 웃음기만 보일 뿐, 별달리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찰나에 가까운 시간.
창이 점하는 거리의 경계에 류진이 들어섰다. 검이 수세와 함께 공세를 가했다.
스아앙, 스각!
이때 창의 궤적이 몇 번이고 더 신체를 난도질했는데, 관람하는 처지에선 끝을 못 낸 건지, 봐주는 것인지 도통 구별할 수 없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겠다는 과감함이었다.
──그리고 철통같았던 간합 통제가 끝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파앗.
칼날이 창을 쳐내더니 악군위의 손에 닿았다. 베이기 전에 서둘러 몸을 빼자, 류진이 안쪽으로 더 달려들었다.
퍼헉!
어깨로 창을 밀어낸다. 검의 파지법이 별안간 바뀌며, 빈손이 창대를 잡아내려고 한다. 그것에 신경을 쓰고자 하면 검을 짓치며 간합을 더 좁힌다.
거리를 잃은 창수(槍手)에겐 더할 나위 없이 불리한 상황. 그때 소곤거림이 번졌다.
“이미 끝난 대련. 기껏 더 봐줬더니 고작 이 정도냐?”
입술이 빠르게 달싹거리며 긴박한 교전 중에도 말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예였다.
콰악.
손이 창대를 확 당겨 잡는다. 줄어진 범위에 맞추는 대응. 세워진 창날이 섬뜩하게 옆을 견제한다.
그리고 거친 발길질이 복부를 대뜸 찼다.
콰앙!
막강한 거력이 담겼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 그럼에도 류진이 애써 버텨내 수비초를 준비했다.
그 순간, 한 호흡에 대여섯 번의 창격이 마구 찔러 들어왔다.
“······!”
타격 되기 막바지에 날을 비스듬히 기울여 위력을 줄였다. 류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교관이 개입했다.
“여기까지. 이 이상은 무의미하겠군.”
실력 전부를 확인하려고 했던 걸까. 매우 뒤늦은 비무 종료였다. 정신 차린 류진은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다들 오늘의 비무를 두고두고 기억하도록. 봐주지 않았더라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아마 임하는 태도 자체가 억척스러워서 그랬겠지.”
해산은 신속했다. 훈련생들은 노곤함이 짙은지 부랴부랴 흩어졌다. 그때까지도 패배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류진은 땅에 쓰러져 있었다.
처억.
“일어나.”
악군위가 아래로 손을 뻗었다.
빤히 바라보던 류진은 잡지 않고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저벅. 사람 민망하게시리 말없이 떠난다.
“너무하네. 성격 안 좋단 말 많이 듣지?”
그 말에 시큰둥한 대답이 들려왔다.
“너같이 귀하게 자란 도련님과 다르게, 난 험악하게 자라와서.”
“자꾸 그렇게 굴면 비호감이다.”
멀어져만 가던 류진은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돌리며 선언하듯 말했다.
“너는 평생 모를 거야.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척박한 환경에서 얼마나 악착같이 노력했는지. 지금은 패배했어도 조만간 뛰어넘겠어.”
작은 중얼거림이 거슬리게 들려왔다.
“좋은 가문에서 비호받은 주제에. 나도 너처럼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면, 아무런 시련 없이 무탈하게 성장했을 텐데. 아니, 더 강해졌을 거야.”
그때 갑작스러운 충격이 류진의 등허리를 강타했다.
퍼헉, 쿠당탕!
“뭔데 발차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
겨울바람처럼 스산한 목소리였다.
신음을 앓으며 신경질적으로 따지려 들던 류진은 행동을 멎었다. 오싹한 위압감에 온몸이 짓눌리는 감각이었다.
“그래, 너보다 비교적 더 나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을 수 있지. 하루하루 먹고살 걱정 없이 풍족하게 지원을 누리고, 영약도 복용하며 어린 나이 때부터 고수들에게서 지도받아 왔으니.”
평소의 엄숙함과 다른 진정성 있는 진지함이었다. 악군위는 쓰게 웃었다.
밑바닥에서부터 매섭게 기어 올라온 자.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네가 겪은 괴로움을 내가 전부 알 수 없듯, 각자의 고충이 있는 법이야. 나를 마음고생 하나 없이 자란 샌님처럼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어.”
얼굴에 드리운 음영이 거둬진다. 악군위는 애써 표정을 고치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쓰러진 류진에게 재차 손을 건넸다.
“서로 존중해줬으면 해.”
류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터억. 손이 잡혔다.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악군위는 류진을 끌어당기며 일으켜줬다. 동년배의 나이다. 친구끼리 화해는 금방 하는 법이었다.
“···다시는 함부로 말하지 않을게.”
“그래, 앞으로는 호적수로서 같이 선의의 경쟁을 하는 거야. 아니, 나와 맞먹기는 너무 차이가 나나.”
“두고 봐. 네 코를 꼭 납작하게 해줄 테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될 때였다.
돌연 멀리서 지켜보던 교관이 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그는 과장스럽게 감동을 표현했다.
“훌륭한 무관은 인간관계도 원만해야 하지. 전장은 홀로 나서는 자리가 아니니까 말이다.”
“교관님.”
“기약 없는 허상의 지원군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등을 맞댈 수 있는 한 명의 전우가 더 소중한 법이지.”
듣기 좋은 칭찬이었다.
하지만 밉상인 교관은 오늘도 초를 치듯 음흉한 낯빛으로 귓속말했다.
“하지만 명심하고 대비해라. 전우의 죽음이 불러올 심적 충격을. 그것을 극복하고, 희생에 무뎌지며 성장하는 것이다. 이는 불가피한 현실이란다.”
“···잔인한 말씀이시군요.”
“전우는 가까이하되, 언제든 떠나보낼 준비를 할 것. 군부에서 통용되는 격언이다.”
여러모로 심란함을 불러오는 말이었다.
이것이 군인의 삶이며 임해야 하는 태도란 말인가.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자꾸만 싫증이 날 지경이었다. 먼저 떠나간 첫째 형처럼 말이다.
고뇌하던 악군위는 말문을 뗐다.
“군인은 늘 패배를 곁에 두지만, 패배를 상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
“사기가 떨어져, 본분을 망각하는 순간 그대로 끝입니다. 희생과 공포. 결코 매몰되고 잡아먹혀선 아니 됩니다.”
엄정한 눈빛이 군(軍), 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형상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전우를 가까이하기에, 절대로 떠나보내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그것이 제가 바라는 군인의 기치(旗幟)입니다.”
하, 하하.
음산한 웃음이 속내를 도통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하게 울렸다. 교관은 소름 끼치게 눈매를 휘었다.
“역시 자네는 훌륭한 인재야.”
어째서인지 인정받기 싫은, 꺼림칙한 칭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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