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국평천하
동이 막 튼 새벽 무렵이었다.
졸음기와 하품은 허락되지 않고, 묵직한 분위기가 훈련장에서 그지없이 돌았다. 보통 외부 출정에 나설 때 이르게 집결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임무가 배정되었다.”
교관은 엄격한 안색으로 외쳤다.
“산동성 청주부(青州府) 수광현(寿光県). 흑교방(黑鮫幇)이라는 사파 잡것들이 문제라는군. 수십의 양민을 죽여서 재물을 취했다고.”
근본 없는 신생 문파의 척결. 간만에 바람을 쐴 수 있어, 훈련생들에게는 호재인 임무였다.
다들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교관이 수상쩍게 웃으며 찬물을 끼얹었다.
“단, 이번에는 내가 동행하지 않는다. 저번에 오신 금의위 나리께서 감독하신다. 절대로 폐를 끼쳐선 안 된다. 그럼 난 이만.”
교관은 뒷짐 진 채로 장내를 벗어났다. 그리고 황색 비단옷의 사내가 교관과 교차하며 나타났다.
금의위에 걸맞은 몸가짐이었다. 고아한 기품이 물씬 풍기며 장엄한 음성이 번졌다.
“지금부터 임무가 끝날 때까지 내가 너희를 진두지휘한다. 임무는 총 세 가지다. 첫째, 민생을 어지럽히는 흑도 방파를 멸문시킬 것.”
여기까지는 몇 번 겪었던 일이다. 황실의 명령으로 산동성에서 준동하는 신규 흑도 무리를 없애왔으니까.
다만 금의위는 다른 걸까.
충격적인 내용이 이어졌다.
“둘째, 사파와 결탁한 전(前) 지현을 추문할 것. 지금은 은퇴했지만 가문 자체가 오래도록 영향을 끼쳐온 지역 유지이지.”
지현(知縣). 하나의 현(県)을 책임지는 정칠품 관리다. 설사 관직에서 물러났더라도 함부로 건드릴 순 없는 위치였다. 관할 지역은 물론, 중앙 정계에까지 끈이 있을 신분이니까.
몇몇 훈련생들이 질색했다.
아무리 금의위가 뒤를 봐준다고 해도, 한낱 훈련생의 신분이었다. 사악한 음모의 희생양으로써 언제든 버림받고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마 직계 혈족이 참여하니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되지만, 여하튼 무림인 신분으로 관과 얽혀 좋을 건 없었다.
“그리고 셋째··· 이건 확실하지 않지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여태껏 보지 못한 무게감이 잡혔다.
언급하기조차 극도로 꺼림칙해하는 기색이었다. 이내 소슬바람과 같은 음성이 번졌다.
“북방 오랑캐가 나타났다는 목격담이 있다. 너희도 잘 알다시피, 그들은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족속들이다. 아직 무공 수준을 모르니 각고히 주의할 것. 이상이다.”
북방 이민족의 출현.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짐작의 영역이다.
그러나, 단순 언급만으로도 훈련생 전부가 솜털을 찌릿 곧추세웠다. 북방 강호의 악명. 산동악가에도 공포감이 사무치게 각인될 만큼 굉장히 높았다.
“아, 그리고 질문받겠다.”
군부의 가문으로서 상명하복의 질서가 엄준한 산동악가다. 반문과 질문은 쉽사리 허락되지 않았는데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금의위사는 분위기를 환기하겠다는 듯 재잘거렸다.
“난 금의위 소속이다. 경직된 조직체계를 지닌 군부와 방식이 다르지. 독립적인 임무를 맡은 만큼 탐문 수색의 비중이 크다. 그러니 반문 없는 명령 수행보다는, 질문을 중시한다. 이 또한 평가의 일종이니 유심하도록.”
말이 끝나자 경쟁하듯 곳곳에서 손이 올려졌다. 금의위사는 질문자를 직접 지목하였다.
“저희가 군문이나 황립 방파도 아닌데 전직 지현을 추궁할 권한이 있습니까.”
“내 신분을 잊었나. 다시 말하지, 난 금의위다. 어사(御使)마냥 인근에서 너희를 임의로 징병한 거라고 보면 된다. 다음.”
누군가 패기롭게 입술을 뗐다.
“관은 무림에 협조를 구한다고 들었습니다. 사파 세력이 민정을 해칠 때까지 가만히 있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질문자는 류진이었다.
다소 불경한 발언으로 여겨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일단 정사(正邪)의 구분은 명문구파가 아닌 이상 무의미하다고 일러주지. 관(官)의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이다.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생긴 치안의 공백을 비집은 놈들. 똑같이 못마땅한 지방 무벌(武閥)이지. 그리고···.”
곧게 뻗친 손가락이 훈련생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너희가 가는 거 아니냐. 일손이 부족한 관 대신에 사문난적을 청소하라고 말이다.”
“아, 그렇군요.”
류진은 멋쩍게 대답했다.
중앙 행정의 권위가 지방 곳곳에 닿지 못한다. 특히나 북방 외적이 날뛰어, 황군이 국경 지대에 몰린 상황이라면 더더욱.
‘생존을 위한 부패는 필연적이지.’
지방 관아조차 무림과 손을 합치는 식으로 자신만의 뒷배를 만들어야 했다. 간혹 흉악한 무뢰배가 관직 여하를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광현의 전대 지현도 그런 이유일 테다.
어쩌면 현직 지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군.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더 나누도록 하지. 부지런히 움직여라. 너희가 늦는 만큼 민초가 고통받는다.”
산동악가의 수습무사들은 청주부 수광현에 도착하였다. 금의위 무관은 흑도 방파가 존재하는 마을 외곽에서 낮게 말했다.
“조를 둘로 나눈다. 일부는 흑교방을 바로 친다. 나머지는 이가장(李家莊)으로 가서 장주를 심문한다.”
이가장주가 바로 수광현의 전직 지현이자, 대대로 관직을 맡고 군림해온 지역 유지였다.
“악군위. 넌 나와 함께 이가장으로 간다.”
훈련생 총 스무 명 중, 열다섯은 흑교방에 배정되었다. 그중에는 류진도 있었다.
류진의 실력을 보고 싶었지만, 상관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악군위는 군말 없이 이가장으로 가다가, 여전히 동행 중인 금의위사에게 물었다.
“전적으로 저희에게 맡기고 멀리서 지켜보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난 감독관으로 왔다. 다만 은퇴했어도 상대는 지현까지 지낸 인물. 한낱 무림세가에 처분을 맡길 순 없지. 내가 응대해야 함이 옳다.”
하긴 그것이 적법한 절차였다.
난데없이 무가의 인물이 전직 관리를 추궁해서는 안 되니까.
“단, 내 역할은 신분을 밝히고 협조를 얻는 것까지다. 제압부터 심문까지 나머지는 전부 너희의 몫이다.”
“예, 대인.”
어느덧 이가장이 보였다.
지역 유지라는 이름값답게 고풍스러운 외관의 장원이었다. 담장은 높고, 꽤 강해 보이는 경비 무사들까지 서 있었다.
“너희는 누구냐, 당장 멈춰라!”
관의 인가를 받은 합법적 행사다. 정당하고 떳떳한 입장. 저들이 납득하고 순순히 협조하게끔 친절하게 설명해줘야 한다.
“이가장주를 내놓아라, 간특한 잡것들아.”
“뭣, 습격이냐?!”
악군위를 필두로 수습무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고작 시골 무인들이 나가떨어지기까지 순간이었다.
───콰아앙!
발길질 한 번에 대문이 박살 났다.
“침입자다! 모두 경계 태세를 갖추어라!”
땅땅땅!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장원 무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모였다. 이내 악군위 일행을 잔뜩 경계하며 달려들었다.
“쳐라!”
“관의 정당한 행사다. 덤비면 반역이다, 쓰레기들아. 모두 멈춰라!”
“···헛소리! 이곳 장주 어르신이 누군지 아느냐? 그럴 리 없다!”
“말귀를 못 알아듣긴.”
극상의 철로 제작된 창대. 내력이 실리며 묵직하게 휘둘러졌다. 주제도 모르고 달려드는 무사의 어깨에 직격했다.
퍼허억──!
어마어마한 괴력이다. 단숨에 십여 장 바깥까지 날아가고 땅을 뒹굴었다. 즉사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피가 철철 흐른다.
“······.”
적막이 짙어졌다.
찰나에 이루어진 전의의 상실이었다.
“전부 제압해.”
악군위의 명령에 동기생들이 각기 산개하였다. 순조로운 포박 작업이었다. 일부는 반항하였으나 몇 번의 부딪힘 끝에 항복했다.
장원 안쪽 건물로 향하자,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보였다.
“무엄하다!”
그는 위풍당당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조부님의 대(代)부터 이곳의 민생을 다스려왔다. 대명제국에 극도의 헌신을 바쳐왔지. 지금 너희가 벌이는 행패는 역모와 다름없다. 내 아량을 보일 테니, 당장 악랄한 짓거리를 그만두도록!”
별 반응 없는 눈빛이 그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어쩌라는 거지 싶은 모양새였다.
이가장주가 슬슬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였다.
“악군위.”
“예, 대인.”
미리 맞춘 대로 즉각 행동했다.
휘리익─
가벼운 손짓에 따라 묵빛 피풍의가 벗겨졌다. 그러자 금빛 옷자락이 시야에 선명히 드러났다. 지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금의위!”
쿵.
수그린 채 상체가 땅바닥에 꿇렸다. 즉각 이루어진 배복(拜伏)이었다. 상황 파악이 빠른 듯했다.
“자, 이제 누가 반역자지?”
“죽,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잘 아는군. 그럼 죽어야지.”
금의위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가장주가 벌벌 떨며 눈치를 살폈다.
“저, 저기··· 대인.”
“흑교방과 붙어먹은 건 잘 알고 있다. 한때나마 나라의 녹봉을 먹었던 자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쯧. 현직 지현도 엮였겠지? 감찰에 들어가야겠군.”
“송, 송구하옵니다!”
금의위는 고관대작에 있어서 사신과 같은 존재다. 다행히 조사는 순조로울 듯 보였다.
다만 이가장주와 흑교방을 향한 조치는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금의위가 개입한 본 목적이 지금 드러났다.
“흑교방. 평범한 사파 무리가 아닌 줄로 안다. 뒷배를 조사 중인데··· 아는 바가 있다면 소상히 밝혀라.”
산동은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북경(北京)과 가까운 편이었다. 거대 무림세가만 해도 산동악가와 황보세가로 둘.
흑도와 한통속일 순 있다.
그러나 얻는 이점이 매우 적었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악군위는 상념에 빠졌다.
‘모종의 협박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군.’
현 강호에서 그럴 만한 존재들은 몇 없었다.
금의위사가 눈짓하자 악군위가 앞으로 나섰다. 심문까지 시험 평가 중 일부다.
“이가장주. 흑교방의 배후가 누구냐.”
그 물음에 이가장주는 기겁하였다.
“저,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아, 아니. 전부 제가 주도한 짓입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서···.”
“살인 협박을 받았나?”
“흡···!”
이가장주가 크게 동요하였다.
“크윽···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놈들의 정체를 대라. 그러는 것이 네게 이로울 테다.”
허나 완고한 뜻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정체를 알리면 그들이 저를 죽일 겁니다. 절대로, 절대로 입을 열 순-”
“정체를 말하면.”
겨울바람처럼 스산한 기질이, 섬뜩한 눈동자와 함께 감정을 압제해왔다.
“내가 그를 죽인다.”
정적 없이, 눈동자만 천천히 굴러갔다.
너무나 압도적인 분위기여서, 단번에 마음이 설득될 지경이었다. 동시에 저 공포감에 몸이 얼어붙어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이가장주는 겨우 입을 열었다.
“허, 허도문. 흑교방주가 그곳 출신입니다!”
사도 십흑군(十黑群).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마외도 대방파. 무림 정세에 관여를 자제하는 편인 황실조차 유심히 주시하는 대상이었다.
그중 허도문(虛道門)이라 하면, 비교적 잠잠한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몰래 암약하는 듯했다.
“대인.”
악군위와 금의위사가 눈빛을 나눴다.
“십흑군의 고수라면 흑교방으로 간 동기들이 위험합니다.”
“그래, 서둘러 가야겠지.”
급히 장원을 떠나려는 참이었다.
돌연 금의위사가 멈춰 섰다.
“잠깐.”
안심하던 이가장주가 고개를 돌린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오싹한 눈동자였다. 금의위사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낮게 뇌까렸다.
“대명제국을 어지럽히는 악한(惡漢)이다.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하도록.”
의미심장한 말은 곧장 해석된다.
연장(延杖).
부패한 관료를 즉결 처분하는 금의위의 권한이다. 그것을 논하고 있다. 정확히는 전직 관료지만.
“네놈!”
이가장주는 눈썹을 사납게 치켜올렸다. 목에 핏대가 세워지며, 분노의 음성이 쩌렁 울렸다.
“이씨문중의 친인척이 북경에서 요직을 꿰차고 있다! 나라의 녹을 먹고 있다면 신중히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너희는 절대로 나를 해쳐선-”
“예, 알겠습니다.”
말이 단호히 끊겼다.
스릉.
악군위는 허리춤에 부무장으로 찬 비수(匕首)를 꺼냈다. 시퍼런 칼날이 달빛에 비쳐 예기를 세웠다.
이가장주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자, 잠깐. 살려주시오! 도찰원을 불러주시오! 정식으로 감찰받겠소. 제발, 제발!”
“민생을 보살펴, 나라의 안위에 보탬 해도 모자를 판국이다. 헌데 사마외도와 결탁하고 수탈을 도왔다?”
콰앙!
자비 없는 발길질이 이가장주를 걷어찼다. 찰나에 점혈까지 이루어졌다. 차가운 날붙이가 주름진 목에 닿았다.
“천자께 네 목을 바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기치를 세우겠노라.”
──스각.
이 땅에서 민생의 고혈을 빨아 재물을 축적한 자다. 그 업보를 고스란히 돌려받듯, 대지가 그의 핏물을 게걸스럽게 마셨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