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인
금빛에 가까운 황색 옷자락이 휘날린다.
신분을 뒷받침하는 의복이다. 정보의 존재 탓인지 경건한 기품이 압도적으로 와닿았다.
‘저것이 금의위. 미래에 내가 소속될 수 있는 관부 집단의 일원.’
그리고 오늘의 적.
상상치도 못한 일이다. 아직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전혀 실감이 나지 않고 거북함도 들었다.
‘참 묘한 기분이군. 누구보다 황실에 충직한 내가 금의위와 맞붙게 된다니.’
승산은 몇이나 될까.
허도문 출신인 흑교방주와도 겨우 동수를 이뤘다. 그것이 악군위의 현 위치.
반면 저자는 흑교방주 따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금의위 무관, 그것도 중진 위계라 하면 응당 그 정도 무력은 지녀야 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격차다.
가문의 위광에도 기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흑교방주와 벌인 일전에서 소모한 체력과 부상도 미처 회복되지도 않았으니.
‘정말로 시험이 아니라면 어쩌지.’
식은땀이 목덜미를 흥건하게 적셨다. 포기하고 싶다는 욕구가 쿡쿡 가슴을 찔러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악군위는 창을 놓기는커녕 꽉 쥐었다. 투쟁심이 쥐어짜이듯 불타오른다.
“패기만만하군. 역시 폐기 처분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재능이야. 조금만 덜했으면 좋았으련만.”
조금이라도 숨을 더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악군위는 일부러 대화를 이어 나갔다.
“좀 의아하군요. 재능의 판단 기준이. 말에 치명적인 어폐가 있어요.”
“으음, 무엇이?”
눈썹이 치키며 들린 반문에 악군위는 씨익 웃으며 호기롭게 화답했다.
“고작 당신 따위한테 지면, 결국 제거할 가치도 없는 그저 그런 재능이란 뜻 아닌가요.”
“하.”
금의위사는 실소를 흘렸다. 동시에 눈웃음을 방긋하게 그렸다. 요것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감탄한다.
“타인을 오만하게 내려보는 그 성정도 마음에 들어. 역시 그자의 손자인 건가. 그야말로 석년의 멸마광창(滅魔狂槍)을 보는 듯해.”
“···그건 또 무슨 해괴한 별호죠. 설마 조부님을 말씀하시는 건?”
“자네 쪽이 좀 더 자제력과 예의가 있는 듯하지만, 그것도 조만간 사라졌을 테지. 역시 오늘 처리함이 맞다.”
스릉.
냉랭한 기류와 함께 검이 달빛에 비치며 뽑혔다. 강렬한 살의가 지면에 내리 앉는 걸음과 함께 사뭇 번졌다.
그러자 맞은편에서도 한층 정돈된 호흡이 차가운 날숨을 내뱉으며, 기묘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금의위가 제거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재능이라. 그렇다면 오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지요.”
샛노란 안광이 이무기의 시선처럼 번뜩였다.
“지학(志學)의 나이에 금의위사를 베어, 자질을 증명한다. 한 줄 넣기에 좋은 경력이로군요.”
그 패도적인 선언에, 갸륵하다는 듯 웃음 섞인 대답이 번졌다.
“재밌는 망상이군.”
팽팽한 형국이다. 살벌한 기류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 장내를 압제했다. 이내 무릎이 살짝 굽히며 하체에 무게 중심이 실리고.
파앗!
빛선이 휘어지게 엉키며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창칼이 맞붙으며 충격파가 커다랗게 터진다.
──카아앙!
일 합에 담긴 검력(劍力)이 몹시도 대단했다. 날붙이를 빠르게 지나며 팔 너머까지 순간에 도달. 강하게 저릿해서 창대를 놓칠 뻔했다.
‘제길, 앞선 전투에서 내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어. 상대도 내가중수법에 일가견이 있는 듯하고.’
무(武)의 극의를 추구하지도,
도(道)를 닦고 수양에 힘쓰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오직 대(對) 무인을 목적으로 둔 실전적 무공. 효율과 파괴를 중시하여 체계적인 성장을 이룩한 무력집단이 바로 금의위다.
스아앙!
낭비 없는 움직임이 직선적으로 뻗어왔다. 허(虛)가 존재하지 않아도 투로 하나하나가 맞대응하기 버거웠기에, 웬만한 환검보다 대처하는데 까다로웠다.
“벌써 이만한 실력이라니. 어쩌면 만전이었을시 졌을 수도 있겠군.”
카강, 캉!
간결한 궤도로 공격이 끊임없이 몰아쳐 왔다. 한없이 퇴보하던 악군위는 손에 점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너무나 지친 상태다.
그때 뒤편에서 고함이 들렸다.
“악군위!”
류진이 악에 받친 채 달려들었다. 부당 당한 몸이었기에 평소보다 속도도 한참이나 느렸다. 기습의 이점도 취하지 않았다.
카아앙!
금의위사의 칼질에 십여 장 너머로 날아갔다. 겨우 막았음에도 강대한 검력을 못 버틴 것이다.
‘지금이다!’
친우가 벌여준 잠깐의 틈.
악군위는 눈을 빛낸 채 남은 내공을 일격에 전부 쏟아부었다. 나선의 기류가 고속으로 휘감기며, 이내 정방을 찌른다.
파아앗!
그리고 금의위사는 여유롭게 고개를 돌렸다.
“뻔한 공격이다.”
타닷.
간단한 보법이다. 그저 간합을 창출하는데 신경만 쓴 후퇴. 맞받아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절초의 위력이 현저히 감소했고.
퍼헉!
이어진 반격이 창대째로 악군위를 밀어냈다. 신체 내부까지 뒤흔드는 커다란 충격에 탈진한 상태가 겹치니, 악군위는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충성을 논했는가?”
저벅.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금의위사가 말문을 열었다. 몹시 무게감 있는 분위기였다.
“더 이상 한낱 무림세가가 군정에 간섭해 조국을 어지럽히는 걸 좌시할 수 없다. 오늘 너를 죽여 미래의 균형을 맞추겠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죽음이 코앞까지 닥쳐오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시험이 아니야.’
정말로 악군위를 죽이러 온 것이다.
‘황상의 뜻은 아니시겠고. 금의위를 포섭할 정도라면 배후는··· 저명한 고관대작, 혹은 황족.’
악군위는 핏물과 함께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정치 싸움이라. 어렵군.’
나라에 충성을 바친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려는 순간이었다.
───쿵!
육중한 착지가 마치 진각처럼 거대한 울림을 널따랗게 퍼트렸다. 돌연 시야 한복판에 나타난, 통나무처럼 두꺼운 대퇴근 근육.
지척까지 도달한 죽음을 몰아낼 정도로, 이목을 끄는 압도감을 선사했다.
‘누구지? 혹시 본가에서 보낸 암중 호위···?’
오답이었으나 정답에 근접했다.
전혀 상관없는 자였으나, 악군위를 살려줄 구원자였으니.
금의위사도 난데없는 이변에 황급히 경계하며 외쳤다.
“넌 누구냐!”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멧돼지와 곰을 양친으로 두기라도 한 걸까. 참으로 우락부락한 외관이다. 태산처럼 우직한 위압감과 맹호와 같은 패기가 위협적으로 있었다.
끝으로 거친 야성미가 군마의 갈기마냥 휘날리듯 번져온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등장.
“북방··· 오랑캐?”
경악스러운 중얼거림이 금의위사 입에서 흘러나왔다. 경계심과 배척감 이전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먼저였다.
그는 저자를 보며 공포에 잡아먹혔다.
‘북방 강호인이라고···? 정말?’
악군위도 당황함에서 벗어나 사태를 차분히 파악하고자 애를 썼다.
마침 임무를 처음 설명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셋째··· 이건 확실하지 않지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북방 오랑캐가 나타났다는 목격담이 있다. 너희도 잘 알다시피, 그들은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족속들이다. 아직 무공 수준을 모르니 각고히 주의할 것. 이상이다.’
금의위의 목표에는 북방인의 추살도 있었으리라. 허나 완전히 잘못된 계산이었다. 상정에서 벗어난 무력이, 그저 마주한 것만으로도 느껴졌다.
마침내 묵묵히 시선만 보내던 북방인이 입을 열었다.
[너, 남왕(南王)의 번견(番犬).]
곧장 알아들을 수 없는 호칭이었다.
악군위는 뇌리에서 한참이나 의미를 곱씹다가 겨우 연상 지었다.
‘설마 황상을 저리 부르는 건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불경스러웠다. 그럼에도 감히 따져들 수 없었다. 악군위는 어깨를 움츠린 채로 저 거구의 북방인이 하는 말에 집중했다.
[추레한 자다. 어찌 두렵다는 이유로, 귀한 재능을. 배제하는 어리석음. 역증이 난다.]
어눌한 한어(漢語)였다. 최소한의 의사소통만을 위해 터득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에도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지금 내 편을 드는 건가?’
고수가 분명했다. 그것도 현재 악군위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고강한 수준의 고수.
감각이 발달했기에 금의위사와 악군위의 관계를 파악한 지 애진작인 듯했다.
‘아니, 금의위를 먼저 처리하고 그다음 날 죽이려는 속셈이겠지. 이것도 아닌가? 날 바라보는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데.’
의문만이 맴도는 시각.
북방인이 걸음을 뗐다.
쿵, 쿵.
거암이 스스로 위치를 옮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반의 울림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제자리에서 모두 얼어붙는다.
“오, 오지 마라! 역겨운 오랑캐!”
줄곧 대장부와 같은 위용을 과시하던 자가, 추악한 모습을 보였다. 방금과 완전히 딴판이었기에 인지가 부조화를 이루었다.
우웅.
뒤늦게 공력이 발치까지 내려앉는다. 보신경의 전조. 가까스로 공포를 이겨내고 도망칠 용기를 얻어냈다.
허나 무용한 시도로 그쳤다.
[등을 보이다니, 수치로 여겨라.]
북방인이 싱겁게 조소했다. 그리고 장딴지 근육이 부풀어 오르더니 순간에 지면을 박찼다.
쿠우웅!
저돌맹진(豬突猛進)의 질주다. 땅을 긁은 산돼지가 힘차게 뛰쳐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느리다고 결코 둔하지 않았다.
도리어 파괴에 가까웠다.
단숨에 거리가 좁히고,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만개한 꽃처럼 펼쳐졌다. 황급히 뒤를 돈 금의위사가 필사적으로 검격을 휘둘렀다.
어깨를 시작으로 심장까지.
정확히 직격한다.
까앙!
비장한 각오를 확 식게 만드는 울림. 실감이 안 난 듯 금의위사는 멍하니 앞을 바라봤고, 북방인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간지럽다. 남방인. 실로 가소로운 칼질.]
꽈악.
금의위사의 뒷덜미가 들고양이처럼 잡힌다. 무척 처량했다. 그리고 거인의 손이 위로 올려졌다.
주먹을 가볍게 쥐었는데도 산자락이 무너지는 소리가 크고도 낮게 번졌다.
구구궁!
굉장한 거력이 한 점에 압축되어 실렸다.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핏줄이 한 차례 맥동하더니, 이내 주먹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혔다.
정수리부터.
꾸그그극!
계란 노른자가 터지듯 으깨지며, 그대로 유유히 목뼈를 지나 갈빗대까지 뭉개듯 주먹이 떨어졌다.
“···어? 내가 뭘 보고 있는.”
실로 허망한 죽음이도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악군위는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되찾았다.
시선.
북방인이 악군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의위사를 먼저 처리했으니 그다음은 나인가? 난 싹수가 좋아 보이니.’
휘릭.
그러나 예상과 달리 북방인은 몸을 돌려 그대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잠깐의 관심 이후로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악군위는 그 모습에 황급히 소리쳤다.
“잠깐!”
뚝, 북방인이 멈춰 섰다.
“넌 내 정체를 대충 짐작한 듯해. 헌데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는 거지?”
죽음을 간신히 넘긴 직후다.
구태여 북방인의 관심을 끌 이유도, 심기를 거스를 필요도 없다. 그저 지나가기만 하면 됐다.
[죽일 이유가 있나?]
북방인이 다시 떠난다. 그러나 악군위는 재차 그를 멈춰 세웠다.
“왜 죽이지 않고 떠나냐고, 빌어처먹을 북방 오랑캐 잡것아!”
평소 성격과 확연히 다른, 그저 악에 받친 고함. 류진이 의아하게 쳐다볼 때였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다. 창창한 소년의 미래를 거둘 필요도 없다.]
그 말을 남기고 재차 떠나려고 한다.
악군위는 분을 삭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북방. 우리의 적.’
저들의 손에 아버지가 두 눈을 잃었다.
저들의 횡포에 군대가 징집되고, 산동악가의 가주와 후계자들은 군역을 치러야 했다.
저들로 인해 죽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가문의 원수.
지독한 원망의 대상이다. 악군위는 북방인을 노려봤다. 마지막 자존심을 짜내어, 호기롭게 말했다.
“같잖은 동정이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북방인의 등에 쏘아졌다.
“오늘 네가 남긴 자비는 후환이 되어, 언젠가 네 목을 거둘 테다. 나는 대명제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니까!”
감사를 표하긴커녕 보내는 짙은 적대.
이대로 북방인이 변덕스럽게 돌아와서 악군위를 죽여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었다.
북방은 적이다.
그것이 악군위가 세뇌되듯 받은 문장이었으므로.
[어린 남방인. 넌 군인이 아니다.]
이 진실한 각오가 북방인에게 전달되었을까.
돌연 북방인은 몸을 돌리며 외쳤다.
[몹시도 호방한 성정을 지녔다. 마치 별밤이 가득한 초원 위를 뛰어다니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속박도, 두려움도 없이 떳떳하구나.]
절로 흠칫해지는 말이었다.
‘악군위, 넌 훌륭한 무관이 될 거다.’
한평생 군인이 될 것이라고 줄곧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소년이여, 넌 위대한 전사가 될 거다.]
정체성을 부정당했다.
헌데도 거부감보다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지워지지 않은 채 오래도록 여운으로써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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