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가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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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밤星夜
작품등록일 :
2024.10.01 10:28
최근연재일 :
2024.10.1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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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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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DUMMY

수모의 나날이었다.


악군위는 가문에서 줄곧 칭찬만 받았다. 위대한 무관이 될 자질이라는 평가가 항상 뒤따랐다. 의식하지 않아도 점차 거만해졌다.


그리고 바깥을 경험하며, 자신이 우물 안에서 좁은 세상만 바라보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하나 같이 만만찮았어. 배울 점이 많아.’


흑교방주와의 일전에서 수준 높은 기예와 노련미를 엿보았다.

금의위사에게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의, 교활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무엇보다 그 괴물.’


그리고 북방인은, 상식을 깨부수는 강함을 뇌리에 각인시켰다.


그들 앞에서 하염없이 작아진다.

뒤늦게 자각하게 된다.

현재 얻은 위명은 고작해야 후기지수라는 울타리에서 쟁취한 조숙의 칭송이라고.


‘할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려선 안 돼.’


최후로 조부가 손자에게 붙인 야망의 불. 기름을 만난 듯 악군위의 가슴을 맹렬하게 타도록 만들었다.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인한 의지가 굳혀졌다.


‘강해져야 해. 지금보다 훨씬.’


천하제일창이라고 불리는 조부는 가문과 중원 땅에서 견줄 자가 몇 없는 절세고수였다.


허나 매우 바쁘신 분이었고, 무엇보다 이미 실력을 인정받아 악군위를 가르치는 것이 허락된 자가 존재했다.


“교관님, 강해지고 싶습니다.”


훈련 시간과 별개의 개인적인 만남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류진도 옆에 따라붙었다. 똑같은 결심이 울려 퍼졌다.


“저도 강해지고 싶습니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교관은 슬그머니 말문을 뗐다.


“자네들은 이미 충분히 강하네. 직계 혈족인 악군위는 말할 것도 없고, 류진도 연배를 뛰어넘은 강함을 지녔지. 이만하면 만족해도 될 수준이지 않나.”


그 말에 악군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북방 이민족을 만났습니다.”

“···그래, 들었네.”


교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찰나에 그쳤지만,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또한 기밀에 부쳐진 금의위 사실은 제외하더라도, 북방 강호인의 존재까지 알다니. 과연 악군위의 훈련을 책임지는 자다. 막강한 정보 접근 권한이 있었다.


동요를 보아하니 이야기가 쉬워지리라. 악군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앞에서 한참이나 무력했습니다. 만전 상태에도 승리는커녕 도망칠 엄두조차 못 냈을 겁니다. 그저 그자의 오만한 자비 덕분에 겨우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금의위사에게 패배한 순간의 심경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만남이었다.


그때의 모멸감과 좌절, 마지막으로 공포. 그 유난한 감정의 격류를 한참이나 곱씹으며 악군위는 결연히 외쳤다.


“저는 꼭 강해져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수모를, 절망을 겪지 않을 만큼 빠르게!”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 뚫어질 듯한 시선을 피하지 않던 교관은 피로한 날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한테 해줄 이야기가 있네.”

“경청하겠습니다.”


악군위의 숨막히는 대답에 교관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주름진 눈매에 힘을 풀며 말했다.


“나는 촉망받는 기재였다네.”


익히 아는 바였다.


십이귀창. 산동악가를 대표하는 성명고수.


괜히 교관직을 맡은 게 아니었다. 부상으로 인한 은퇴 이전까지 범접할 수 없는 무력의 소유자였다.


“악군위 자네보다는 류진 쪽에 가까웠지. 나는 가난한 소작농 집안 출신이었거든. 출세를 한없이 갈망했지. 그래서 무작정 산동악가를 찾아가 시험을 봤고.”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네.


항상 수석을 거머쥔 우등생이었고,

악씨 성도 얻게 되며,

마침내 십이귀창의 자리까지 올랐다.


빛바랜 무용담은 즐거운 추억처럼 단란하게 들려왔다. 잠자코 듣던 악군위는 돌연 물었다.


“교관님께서는 군부로 곧장 종군하지 않으신 겁니까? 수료를 마치면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던데.”

“그래, 난 본가에 남았다네.”


의외였다.

교관은 늘 훈련 중에 군대에서 세운 공훈을 늘 자랑스럽게 떠들었으니까.


이윽고 허심탄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바란 건 출세였지, 명예도 조국의 충성도 아니었다네. 그 당시에도 북방은 마경이었지. 난 악착 같이 얻어낸 힘과 지위를, 그딴 전장에서 허무한 죽음으로 잃고 싶지 않았어.”


몹시 노곤해 보였다. 말하는 것조차 고욕인 듯했다. 악군위는 무의식적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군대에 종사했다는 건···?”

“기껏 십이귀창의 자리까지 오르니 강요당하더군. 너무 잘난 것도 탈이지. 그렇게 십 년을 마경에서 살아남았다.”


전혀 원하지 않은 일인 듯했다.

북방 전장은 고수 하나라도 아쉬운 상황. 십이귀창 정도라면 강제로 징병될 수밖에 없었다.


“못 볼 꼴을 다 봤지. 혹한은 지독했고, 죽음의 공포는 그것보다 더 스산했지. 동료들의 비명이 늘 귀곡성처럼 울렸어. 아비규환과 같은 참경이었지. 아직도 선명해.”


평소 볼 수 없는 약한 면모였다.

질긴 사슴 고기를 뜯어먹고, 얼어붙은 강가에서 잠수했다는, 그가 종종 들려줬던 활기찬 무용담과 완전히 대비되었다.


“내가 그곳에서 깨우친 게 뭔지 아나?”


스르륵.


교관은 대뜸 탈의했다. 그러자 맨몸이 보였다. 아니, 맨몸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온갖 상흔이 붓질처럼 여러 겹으로 칠해져 있었다.


“전쟁은,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주먹 자국이었다. 흉부 부근에 새겨진, 아직도 불그스름한 기운이 선명한 주먹질 흔적.


“소림의 백보신권 같은 경파 발출이었다. 직격이 아닌 진기의 여파만으로도 막강한 부상을 입어야 했지. 갈빗대가 으깨지듯 부러지고 몇 달간 사경을 헤맸어.”

“······.”


악군위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교관이 겪었을 고통이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동시에 며칠 전 봤던 북방 강호인의 무위가 소름 끼치게 뇌리에서 겹쳐졌다.


결연했던 성장의 의지가 무색하게,

거센 거부감이 들었다.


“북방, 그곳은 그런 괴물들 상비하는 곳이다. 자네가 무력했던 건 어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네.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벌써 조급할 필요가 없으니.”


정신이 확 깨워졌다.

저 말이 도발이라도 된 듯, 잠깐 심장을 좀먹었던 공포가 물리쳐졌다.


“전 그들을 이겨야 합니다. 하루빨리.”

“다시 말하지. 조급하지 말게나.”


교관은 만류하듯 말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북방 이민족. 그중에서 투귀(鬪鬼) 일족은 하늘이 내린 듯한 육체를 타고났네. 천하장사와 같은 용력. 도검불침과 같은 근골. 태어난 순간부터 외공의 고수인 이들이지.”

“하지만······!”


반문은 즉각 묵살되었다.


“달걀이 바위를 깨부술 수 없듯, 기본적인 체급의 차이가 있다네. 그것을 극복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기술을 익혀도 무용하지. 최소한 상승고수는 되어야 하는데 그쯤만 되어도 내공과 육체가 크게 진일보했을 거라네.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지.”


그럼에도 심각하게 듣던 악군위는 다시 한번 반발했다.


“시간이라. 허울 좋은 가정이군요. 그것을 온전히 부여받아, 완전히 성장한 이들이 천하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저만해도 당장 변덕 한 번에 죽을 뻔했습니다.”

“고집도 세군.”


잠시 고민하던 교관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 안 된다면, 최소한 저항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줘야겠지.”


연무장이었다. 대련으로 시범을 보이려는 모양인 듯했다. 교관은 멀뚱히 서 있는 악군위와 류진에게 손짓했다.


“일단 들어오게나.”

“예.”


악군위가 먼저 나서려는 참이었다. 교관은 즉각 제지했다.


“아니 둘 다 한꺼번에.”


그 말에 악군위는 호기롭게 맞받아쳤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교관님의 위엄에 흠집이 날 수도 있는데.”


부상으로 인해 은퇴하고 교관직을 맡은 자다. 무위를 다소 잃은 상태. 물론 이길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악군위와 류진의 조합이라면 꽤나 난감하게 몰아붙일 순 있으리라.


그러자 교관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하, 격장지계도 많이 늘었군. 헌데 가소로워. 본디 위압은 말하는 자의 권위에서 비롯되는 법.”


사나운 웃음이 장내에 번졌다.


“차륜전도, 합공도. 최소한의 격은 맞아야 성립된다네. 지금은 그저 하수의 재롱에 어울려 주는 거지.”


살갗 위 솜털이 쭈뼛 곤두세워졌다.

동시에 호승심이 가슴을 들끓였다.

과연 교관은 격장지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가자.”

“그래.”


악군위와 류진은 서로 한 차례 마주본 뒤, 즉각 땅을 박찼다. 날렵함이 장기인 이들이다. 바람줄기가 장내를 경쾌하게 지나쳤다.


휘우웅─


그리고 창칼이 양방향에서 교관을 압박했다.


카가강!


금속음이 시끄러웠다. 뜨거운 불티가 공중에서 타올랐다. 단숨에 쓰러트릴 요량으로 벌인 쾌속의 공격초다.


헌데 교관은 동시적인 공세를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폐부를 들숨으로 가득 채운 두 사람이, 호흡조차 잊을 정도로 빠르게 연격을 쏟아붓는 순간에도 말이다.


챙, 채앵, 째애앵!


악군위가 창으로 공간을 장악하면, 측면에서 류진이 거리를 좁혀 일격을 찌른다.


종종 비무를 벌였던 두 사람이다. 합격술은 훈련에서 몇 번 연마한 적이 있지만, 연습 이상의 실력이 튀어나왔다.


마치 몇 년은 짜맞추기라도 한 듯 공세의 박자가 척척 맞는다. 이것이 어린 천재들의 역량.


스아앙, 캉!


헌데 왜일까.

악군위는 뭔가 잘못됨을 깨달았다.


가가각, 채앵!


분명 몰아붙이고 있다. 숫자의 이점을 살리고자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압박한다. 그 탓에 교관은 끊임없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반격할 겨를도 없도록 더욱 조인다.


그러다 마침내 깨닫는다.

소리 없는 경악이 번졌다.


‘단 한 번도 교관님의 품 안으로 파고들 수 없었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다.

귀신 같은 후퇴가 상시 거리를 조절한다.


그걸 무시하고 억지로 들어간다?

생사의 경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마치 이 이상 선을 넘으면 치명상을 입고 만다는 듯이.


‘저것이 바로 악가의 귀창(鬼槍)···!’


꽈악.


괜히 분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걸 쏟아부을 생각으로 돌격할까 고민했건만, 이내 접게 되었다.


───!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강제로 움직임을 멎게 했다. 진땀이 절로 나오고, 이내 탈력감이 전신을 압제해 왔다.


스륵.


창이 거두어진다. 비무가 잠시 중지되었다.

교관은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무엇을 깨달았나.”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거리의 이점. 창이 최고의 병장기로 불리는 이유지.”


고개를 끄덕인 교관은 진중한 눈빛을 보내며 장엄하게 외쳤다.


“간합을 지배하는 자가, 승패를 결정한다. 강호에서 자주 내려오는 말이라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한번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숨을 빼앗아 가듯 공간을 짓눌렀다. 본능적인 경고가 살갗에 선명히 와닿았다. 무심코 거리 간격을 재보게 된다.


‘절대로 다가갈 수 없어.’


일 장(약 3미터).


약 열댓 걸음 남짓. 창 하나가 차지하는 공간.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사람을 상대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저 거리가 바로 교관의 통제 하에 놓인 권역이었다.


“너희는 이 안으로 한 걸음이라도 내디딜 수 없다. 내가 그리 정했으니.”


이것이 바로 첫 번째 과제.

북방 마경이니 초고수니,

일단 저 간격부터 뚫지 못한다면 결단코 논할 수 없으리라.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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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약 24.10.02 242 5 12쪽
5 증명 24.10.01 275 9 13쪽
4 전우 24.10.01 321 10 13쪽
3 북새풍 24.10.01 381 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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