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팽가
햇볕이 따스한 오후의 때이다.
후웅, 훙!
대기가 양옆으로 찢어진다. 기관진식처럼 반복적으로 번지는 울림. 란나찰이다.
‘확실히 거듭할수록 창끝이 정교해지는 게 느껴져. 이것이 기본기인가.’
머릿속 표상이 뚜렷해야 더욱 뛰어난 위력을 발휘한다.
교관이 가르쳐준 수련법은 아직도 미덥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의아스러웠다. 지금 얻어낸 성취도 각고의 노력과 시간을 쏟은 것에 비하면 다소 모자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악군위는 믿음을 갖고 란나찰 수련에 광열을 다하였다.
‘힘들고 따분해도 해야 해. 고작 몇 걸음 내디뎌놓고 천리(千里)를 지난 걸 바라선 안 되니까.’
상명하복의 태도가 기본 가풍인 가문이다. 의심과 반발이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가야 할 길을 인도받았으면 우선적으로 따르는 것이 옳았다.
몸을 적신 땀방울이 란나찰의 바람에 식었다가 다시 맺힌다. 단련에 몰두하던 악군위는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군위야, 열심히 수련하던 도중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급히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얼굴의 살가죽이 얄찍하다. 빼빼 마르기보다는 강건한 인상이 억세게 든다. 군인의 표본과도 같은 외양의 소유자.
악준휘.
악군위의 둘째 형이자 악가주의 차남이다.
현재는 기존 대공자를 대신하여 대공자로 승격했다. 그 역시 악군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할 뿐, 보기 드문 기재로 유력한 소가주 후보였다. 가문의 대소사에 늘 관여한다.
“무슨 일입니까, 작은 형님.”
언행에서 한 사람의 부재가 느껴졌다. 악준휘도 마냥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쓴웃음을 슬며시 질 뿐이었다.
“북경에서 팽씨 성을 단 이들이 찾아왔다. 수련은 관두고 조속히 단장하도록.”
“팽가 말입니까.”
하북팽가.
도(刀)를 주력으로 삼은, 북직례 땅에서 대대로 지방 호족으로 호령하는 가문이다. 현 왕조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이들. 다만 현재는 옛 영광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북경 천도 때문이다. 주 터전이 수도와 몹시 가깝다. 그 역사적인 순간으로 인해 가문 전체가 성장이 가로막혔다.
산동악가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군부의 가문이 되었다.
“팽가주와 그의 금지옥엽이 찾아왔다는군. 제길, 번잡스럽게시리. 하필 숙부님도 안 계시는 이때.”
“···그거 정말로 큰일이군요.”
무려 세가주의 방문이다.
별거 아닌 행차일지라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대문파의 수장이 친히 왕림해주셨으니 우리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줘야 하는데, 쯧. 일부러 본가를 욕보이고자 시비 거는 건가.”
타 문파의 인물이 방문하면 그에 마땅한 배분과 지위를 지닌 자가 맞이해주는 것이 예절이고 격식인 법이다.
그러나 현재 산동악가는 팽가주를 응대할 위계의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님은 북경에 계실 텐데.”
“알고 온 것이겠지. 아무리 북경일지라도 하북팽가의 텃밭이나 마찬가지니까.”
현 악가주는 지난 전장에서 양눈을 잃고 독방에 칩거한 상태다. 본디 가주 대리를 맡던 악군위의 숙부도 출가 중인 때.
하다못해 소가주라도 나서야 하는데 산동악가의 장남이 의무를 회피하고자 강호로 가출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사마외도에게 납치되었다는 것까지.
차남인 악준휘가 응접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가문의 명예에 흠집이 나는 상황이었다.
“팽가의 금지옥엽이 너보다 한 살 더 많다. 혹여나 비무를 하게 된다면 철저히 밟아버려라.”
“예, 형님.”
두 사람이 비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악준휘는 팽가주를 만나러 떠나고, 악군위는 빠르게 목욕을 마쳤다.
단정한 차림으로 접객실에 가는데, 그 길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기운이 살갗에 전달되었다. 본능적인 경고가 뇌리에 종을 울려댔다.
‘벌써부터 무슨 압박감이···!’
저벅.
힘겹게 발을 떼며 실내로 진입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조차 의식되지 않는다. 온 신경이 눈앞의 거인(巨人)에게 쏠렸다.
‘저자가 바로 한 무림세가의 수장.’
야수와 같이 위압적인 풍채였다. 과연 패도적인 도법을 무공으로 갈고닦은 자다웠다. 의복 너머 근육의 결이 몹시도 단단하면서도 날렵해 보였다.
거친 야성미도 숨길 수 없었다. 창만 한 길이의 태도(太刀)를 어깨에 비스듬히 세워뒀는데, 그 자신도 첨예한 칼날이 된 듯한 기세를 형성했다.
“오랜만이구나. 몰라보게 컸어.”
같은 군부에 종사하는 가문 특성상 악가와 팽가는 예전부터 교류가 많았다.
다만 늘 전장에 나가느라 바빠, 팽가주는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에 마주했다고 들은 것이 전부였다.
“악군위라고 합니다. 팽가의 주인을 뵙습니다.”
사지가 멀쩡하다. 동일한 전장에 섰을 텐데도. 그 사실만으로도 조금 못마땅했다. 그렇지만 포권례만큼은 공손했다.
“근래 너희 가문에 변고가 많았던 걸로 안다. 하필이면 시기도 좋지 않게 찾아왔구나. 더 각별히 신경 썼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팽가주는 정중히 사과했다. 그럼에도 절대자의 기품을 도저히 감출 수 없어, 오만한 어조로만 들렸다.
‘지금 돌려서 말하는 건가. 잘 모르겠군.’
형님의 우려와 달리 막상 마주하니 소인배의 기질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예의 바른 척 산동악가를 모독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잠자코 듣던 차남, 악준휘가 입을 열었다.
“무거운 몸이실 텐데 어인 용무로 방문하신 겁니까.”
“내 오랜 친우를 만나는데 특별히 이유가 있어야 하는가. 몸도 많이 상했을 텐데 더욱 신경 써줘야지.”
그 말에 두 형제의 이마가 동시적으로 구겨질 뻔했다.
‘저 망나니가?’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했다. 어쩌면 그조차 이미 읽혔을지 몰랐다. 절세고수의 눈썰미를 피할 수 없을 테니.
악가 형제의 애탄 속도 모르고 평이한 음성이 고저 없이 이어졌다.
“다음 원정을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이번에는 친우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군신의 목을 따고 와야 마땅하겠지. 그 전에 너희 부친을 만나고자 들렸다.”
말하는 문장마다 불편한 소재를 입에 담았다.
악군위는 이제야 확신했다. 저것은 분명 부친을 능멸하는 것이 맞다고. 그도 아니면 더럽게 눈치가 없거나.
“그래서 지금 만날 수 있겠나.”
“그건 조금 곤란할 것입니다.”
“곤란하다? 내가 직접 왔건만, 그이가?”
입매가 한번 세게 물린다. 악준휘는 거북해하며 말문을 뗐다.
“폐관에 들어선 상태입니다. 저희도 만나주지 않습니다. 삼 년 전 이후로 쭉 말입니다.”
심마(心魔)에 빠졌다는 사실을 전하는 건 불필요했다.
그러나 에둘러 말했어도 팽가주가 모를 일 없었다. 무인이 양 눈을 잃고 칩거했다면 당연히 실의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으니.
“으음,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군.”
침음을 앓던 팽가주는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차피 시간도 꽤 남은바. 친우가 힘낼 때까지 곁에 있어 힘이 되어줘야겠지. 잠깐 신세 좀 지내리라.”
“···무슨!”
악준휘가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결국 순간의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팽가주는 싱글싱글 눈꼬리를 풀었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명백한 악의고 분풀이였다.
“아버님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정말 죄송스럽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괜찮대도. 내가 있는 편이 더 힘이 될 거다.”
악준휘는 치를 떨며 거부의 뜻을 밝혔으나 팽가주는 완강했다.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저자가 감히. 이게 무슨 모욕인가. 할아버님께서 빨리 오셔야 할 텐데.’
무력적으로도 밀렸다. 상대는 절세고수.
일신의 위용으로 군단의 힘을 발휘하는 자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유사시 팽가주가 난동을 피웠을 때 지금 단신으로 막을 자는 없었다. 그대로 멸문에 준하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아버지를 일부러 약 올려 심마를 깊게 할 작정인가. 혹시나 있을 재기의 여지도 철저히 밟으려고.’
여러모로 좋게 봐줄 수 없었다. 아무리 군문에 발을 담가도 무림이란 이런 곳이다. 무슨 의도든 간에 우선 적대하고, 항상 경계해야 한다.
“아, 소개가 늦었군. 이 아이는 유연(幽燃)이라고 한다. 몹시 총명한 아이지. 내 딸이지만 미색도 훌륭하고. 다행히 날 안 닮았거든.”
“반갑습니다. 팽가의 삼녀 유연입니다.”
눈을 뺏길 것처럼 미려한 자태였다.
피부는 우윳빛 광택이 났고, 묶은 머리칼은 흑단처럼 부드럽게 늘어졌는데 언뜻 드러난 목덜미가 굉장히 어여뻐 보였다.
“삼남의 재지가 그리 출중하다고 자주 칭찬을 들었다. 한번 교분을 나눠보는 것도 좋겠지.”
눈앞에 차남을 두고 삼남을 먼저 언급했다. 또다시 비호감을 쌓았다. 그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도 모르고 쾌활한 웃음이 널따랗게 번졌다.
하하하하!
눈을 찌푸리던 악군위는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거 이제 보니 그냥 우둔한 것 같은데.’
이내 속생각을 날려 보냈다.
에이, 사람이 저렇게 눈치가 없을 리가.
* * *
드넓고 아름답게 꾸며진 화원이다. 부친께서 모친과 함께 늘 산책하던 길이었다. 산들바람에 꽃내음이 향긋하게 다가온다. 정다움이 느껴지는 이곳은 악군위의 수련 장소였다.
불청객과 때아니게 동거를 시작했으나 하루 일과는 변함없었다.
후웅, 훙!
란나찰의 파공음이 계속 번진다. 자세히 들어보면 한 울림이 아니라 미묘하게 갈라졌다. 그 탓에 불협화음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시 란나찰은 나와 안 맞아. 교관님께 말씀드려서 삼재검법을 하겠다고 전할까.”
류진이 투덜거리며 목창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악군위는 도발하듯 뇌까렸다.
“강호에서는 검객보다 창객이 더 드물어. 그러니 대처를 위해서라도 미리 숙련하는 게 낫지 않을까. 좌수검객처럼 당황하면 안 되니까. 안 그러면 내 간합을 못 따라오고 허둥거릴걸.”
“검객이 더 많으면 검을 더 연마해야 하지 않나. 해괴한 논리야.”
가볍게 잡담을 나눌 때였다. 돌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란나찰이라, 기본 중에 기본이네요. 창객이라면 애진작에 다 뗐어야 하는데 수련하시다니. 특이한 분이시네요.”
여인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였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머리를 묶어 올려 활달해 보이면서도 고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팽가주의 딸, 팽유연이었다.
소년의 시선을 사로잡는 용모다. 악군위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엄준하게 외쳤다.
“여긴 외인들한테 허락되지 않은 곳입니다.”
“예···?”
팽유연이 순간 당황했다. 그녀는 멍하니 붉은 입술을 벌렸다가 뒤늦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알면 됐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류진이 멋쩍게 웃었다.
“군기가 장난 아니네. 좀 미친놈 같아.”
“뭐.”
악군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팽유연에게 말했다.
“그래서 언제 나가주시는 겁니까.”
“어, 그게···.”
“도(刀)는 또 뭡니까. 병장기를 패용한 채 본가 내부를 함부로 돌아다녀선 안 되는데.”
“음, 칼은 제게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당장 반납하십시오. 아니면 객실로 돌아가시던가요.”
겸연쩍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팽유연이었다. 그녀는 불현듯 결심했다는 듯 눈빛을 억척스럽게 바꾸었다.
“창이라니, 옛적부터 느꼈는데 참 신기한 병장기 선택이네요.”
“갑자기 말입니까.”
눌린 기세가 이제야 폈다는 듯, 팽유연은 당돌하게 외쳤다.
“백일창(百日槍), 천일검(千日劍), 만일도(萬日刀)라고 들어봤나요?”
“···뭐가 조금 이상한데요.”
“보통 만일검이지 않나?”
“병장기를 숙련하는데 각기 걸리는 시간이지요. 그중에서 도(刀)가 제일이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고요.”
금시초문인 논리였다. 악군위와 류진은 고개를 동시에 갸우뚱거렸다. 류진은 검을 무시받은 것에 조금 발끈한 듯했다.
그리고 낭창한 목소리가 울렸다.
“란나찰과 같은 시답잖은 일은 그만두고 저와 무기를 섞어보지 않겠나요.”
이쪽이 본 목적인 듯했다.
하지만 악군위는 엄한 곳에 딴지를 걸었다.
“란나찰이 시답잖다? 정말입니까.”
“기본기지 않나요. 상승무학에 시간을 할애해도 부족할 판국인-”
“저희 조부님께서 불철주야 하루 두 시진 이상씩 쏟는 것이 란나찰입니다. 설마 조부님을 모욕하시는 건가요.”
“···네? 조부라 하심은.”
전직 북방대장군, 현 금의위 대영반.
악가의 태상가주, 악귀마창(惡鬼魔槍).
“흐업···!”
팽유연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동시에 그녀의 중얼거림을 유심히 듣던 악군위도 얼굴을 찌푸렸다.
‘뭔 놈의 별호가 들을 때마다 추가되는···.’
한편 다소 넋이 나간 팽유연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화제를 돌려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 다급히 외쳤다.
“아무튼 비무입니다! 도와 창 중 어느 무기가 더 위인지 이 자리에서 겨뤄봅시다!”
쓰잘머리 없는 시비였다. 악군위는 혀를 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쯧. 창이야말로 병장기 중 제일인데, 굳이 길고 짧은 걸 대봐야 아나.’
그렇지만 현실을 너무 모질게 알려줘선 안 됐다. 악군위는 상대를 배려하고자 고개를 끄덕였다.
“어련하시겠어요.”
“···뭐라고요?”
툭.
묵직한 물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다.
“하수를 상대로 몇 수 물려주는 것이 고수 된 자의 도리이지요. 창과 도의 우열을 지금 나눌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연한 눈동자가 위압적인 기질을 내비쳤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건들, 허공을 내저었다.
“자, 빈손입니다. 들어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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