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
삭풍과 같이 차가우면서도 건조하다.
저 목소리에는 상대의 기를 짓누르는 무형의 힘이 서려 있었다. 팽유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별뜻 없는 언행에도 무슨 위압감이...!'
무심코 굴종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뒤늦게 깨닫는다. 창피를 감추려는지 팽유연은 더욱 강하게 나갔다.
“하, 적수공권으로 대적하겠다? 제가 그리 얕보였나요. 저를 무시하는 언사도 정도껏이어야 하지.”
커다란 성량부터 힘 있는 어조까지.
평소의 그녀였다. 패도적인 기질을 지닌 팽가의 여식답게 고개를 쉽게 숙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오늘따라 행동이 유난히 어색했다.
“당신이 맨손으로 상대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제가 순순히 예라고 말해줄 것 같습니까?”
툭.
흑색의 직도가 돌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팽유연의 소맷자락이 한번 가볍게 털어졌다. 어떤 물체도 쥐지 않은 새하얀 섬섬옥수가 훤히 드러났다.
조금이라도 지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누구의 수가 더 위인지 아직 판가름도 나지 않았습니다. 오만한 언행을 내비치실 거면 먼저 제게 인정받아야 할 겁니다.”
소기의 목적과 조금 달라진 형태다.
그렇지만 맨손 박투도 나쁘진 않았다. 팽유연은 시건방진 소년의 코를 납작 눌러줄 생각만 가득했다.
그때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저께서는 안법 공부에 미진하셨나봅니다. 더 열중하시지요.”
“뭐라고요?”
팽유연이 얼굴을 구기며 되물었다. 그러자 조곤조곤한 음성이 호흡조차 잊고 빠르게 이어졌다.
“세상 섭리가 전부 규정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손을 맞대지 않아도 알 수 있지요. 본디 고수란 특유의 눈썰미만으로도 하수의 전력을 간파하는 법입니다.”
요컨대 말하길,
'당신 허접하잖아. 그것도 몰라?'
다음과 같은 의미였다.
'하, 저 꼬맹이가.'
말을 구태여 고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팽유연은 사납게 웃었다. 보드라운 이마에 골이 잠깐 지어지기도 했다.
“격장지계가 아주 청산유수네요. 기껏 자리를 마련했더니 입담으로 비무하실 셈인가요.”
주먹이 가볍게 쥐어지며 상체를 살짝 가로막는다. 권법의 기수식이었다. 당돌한 선언이 울려 퍼졌다.
“근접 박투에는 저도 일가견이 있거든요. 팽가의 무공은 칼날 한 자루에 기댈 만큼 얄팍하지 않습니다. 인간 자체가 강함을 지녔지요.”
팽유연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가 수상쩍게 그려졌다.
“아,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음?”
영문 모를 말에 고개가 절로 기울여졌다. 그리고 악군위는 무릎을 천천히 들어올였다.
그리고.
쿵.
가벼운 진각이 내리 찍혔다. 땅이 수면처럼 잠시 물결치고, 응축된 진동이 위로 폭파했다. 그에 따라 떨어졌던 창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콱, 휘릭.
악군위의 손에 잡힌 뒤, 사뿐하게 대기를 몇 바퀴 회전했다. 현란한 손놀림이었다. 절도 된 동작을 끝으로 창날이 팽유연을 가리켰다.
“그토록 대단하신 분이라면 몇 수 양보받아야겠지요. 저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잠깐?!”
팽유연이 당황하며 소리치려는 때였다.
그녀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죽신이 지면을 힘차게 밀어냈다. 이내 상체가 살짝 숙어지며 화살처럼 정방으로 튀어나갔다.
파앗!
서너 장 안팎의 거리다. 둘 사이의 간격이 단숨에 좁혀진다. 발이 도달하기 앞서, 기다란 창날이 먼저 뻗친다면 더욱 이르다.
위에서 아래로 가속을 머금으며, 자비 없는 출수가 비무장 상태의 팽유연에게 향했다.
카아앙!
“아니... 흡!”
날붙이가 살갗을 파고드는 소리가 아니다.
피부의 경질화다. 순간에 살결을 뒤덮은 내공이 철과 같은 굳기를 형성했다. 권법가가 아닌데도 이 정도 기예를 선보인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머, 멈춰”
팽유연은 허둥지둥하며 비무의 중지를 제안했다. 그 절박한 목소리를 악군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스아앙!
기다란 창대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쳤다. 하체를 낮춘 팽유연은 밑으로 손을 뻗었다. 바닥에 떨궈둔 도를 재빨리 잡기 위함이었다.
“어딜.”
“칼 좀 줍자!”
파공음이 요란했다. 각법이 매섭게 안면부를 직격으로 노려 들어왔다. 머리가 무조건 으깨지리라. 잡는 걸 포기해야 했다.
후웅, 스앗!
대신 팽유연은 굽힌 자세로 팔을 잠시 늘어뜨렸다. 일종의 허초였다. 표홀한 신법이 절묘하게 발길질을 흘리고, 반격의 태세까지 형성시켰다.
그리고 연격이 창대를 후려쳤다.
탁, 타닥, 퍽!
울림과 파괴력이 강맹했다. 동심원의 충격파가 선명하게 터질 지경이었다. 이내 가까스로 거리가 좁혀졌다. 악군위가 봐준 탓도 있었다.
바스슥, 콱.
순간적으로 하중을 실어 눕듯이 몸을 지나쳤다. 마찰열에 땅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흙길을 지어내며 직도도 빠르게 회수했다.
'이제야 좀 제대로 된 비무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속으로 투덜거릴 때였다. 허리를 돌리며 자세를 바르게 갖춰야 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며 창격이 쾌속으로 짓쳐 왔다.
캉!
겨우 막아냈으나 불안정한 수비초였다. 충격을 온전히 감내해야 했다. 잇새로 짧은 신음을 터트리며 팽유연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대로 끝이 아니었다.
난격이 몰아쳐왔다.
신체 하부를 굳건히 유지하며, 도를 끊임없이 움직였다.
카가가강!
치열한 공방의 연속이었다. 어지러운 공세를 전부 받아내는 팽유연이 몹시 대단했다.
다만 도는 공격적인 병장기가 아니었다. 방어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그 특성이 불리한 형국과 맞물렸고-
쿠앙!
좌측에서 후려친 창격이 도를 세게 강타했다. 손잡이 부근이었다. 힘에 부친 팽유연이 끝내 무기를 놓쳤다. 하늘로 허망하게 몇 바퀴 솟구치다가 추락한다.
투둥.
비무의 끝이었다.
일반적으로 유린만 당한 꼴이었다.
허나 팽유연은 승복할 수 없다는 듯 눈가에 힘을 줬다. 불만이 사납게 터져나왔다.
“비겁한 거 아니야?! 먼저 무기를 내려놓아서 응수했더니, 혼자서 창을 쥐고.”
“본인 선택 아닙니까.”
“뭐?”
공손하면서도 퉁명스러운 대꾸였다. 얕잡아보는 심리도 느껴졌다. 팽유연은 기가 막혀 반사적으로 되묻고 말았다.
듣기에 터무니없는 논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규칙을 따로 정해두기라도 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제 도발에 본인이 넘어가 놓고, 이제 와 남 탓을 하는 겁니까. 설사 조금 늦었다고 한들 도를 다시 쥐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대처 능력과 반사신경이 굼벵이처럼 느린 탓이지요.”
“아, 아니...”
기세에 완전히 짓눌렸다.
팽유연은 별다른 반박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한 음성이 쏘아졌다.
“하잘것없는 실력입니다.”
쾌속의 공격초와 같았다.
곧장 가슴으로 직격했다.
“자기 역량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한순간의 호승심에 이끌려 과오를 범하다니. 전형적인 하수의 실책이군요.”
“윽...”
“이래 놓고 창과 도의 우열을 가린다? 자신만만하게 들이대기 이전에 본인의 수준부터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게 중요할 듯합니다.”
존대하고 있으나 전혀 와닿지 않았다. 촌철살인이 비수처럼 치명적으로 자꾸만 찔려온다.
팽유연은 정신적 타격을 입은 듯 휘청거렸다. 눈매에 물기가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비열하게-”
재차 반박하려 들 때였다.
“공자의 말이 옳다.”
절 벼려진 칼처럼 무시무시한 기운이 준엄하게 느껴졌다. 커다란 존재감과 다르게 가까이 다가오고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언제 온 거지. 언제부터 지켜봤고.'
고고한 절대자의 품격, 팽가주였다.
과연 절세경지에 이른 고수다. 몸 전체가 활짝 트인 천리안이라고 봐도 좋다. 단지 기감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산동악가의 장원 전역 따위 손아귀에 둘 수 있다.
그런 존귀한 존재가 판정을 내렸다.
“유연아, 네 패배가 맞다.”
“아닙니다, 아버지. 저런 치졸한 수법을 사용해놓고 어찌 승패를 가름할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준비된 상태에서 붙었다면...”
푸념이 중간에 끊겼다.
“아직도 모르느냐."
“예...?"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가의 삼공자한테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전혀 공정하지가...!"
납득하지 못하고 또다시 말에 토를 단다.
악군위는 새삼 핏줄이 대단하다는 게 느껴졌다. 자신은 그저 존재감만으로 압박당하는 처지였다. 어쩌면 타인에 비친 조부와 자신의 모습도 마찬가지리라.
“정당하고 공정한 비무? 좋지. 서로 무공을 견주며 얻어가는 것도 있을 테니.”
혼자서 중얼거리는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말이다. 어떤 규칙이 있고 불공평한 차이가 있었던 간에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단다.”
“...무엇인가요. ”
눈이 억세게 뜨이며 안광이 맹렬히 타올랐다. 팽가주는 혈기 가득한 기백을 뿜어냈다.
“변변찮고 한심하게 휘둘리기만 한 것. ”
표현만 다르지 아까와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의 무게감이 남달랐다. 뒤바뀐 기세만으로도 의미가 전달된다. 팽유연과 악군위, 둘 다 한번에 납득했다.
“매사가 공정하며 준비될 수 없다. 실전에도 변명이 통용될 것 같나. 물론 삼공자의 변덕스러운 행동에 불쾌할 순 있지. 하지만 차분히 대처하지 못하고 의도대로 무력히 당한 넌, 그저 볼썽사나울 뿐이다. ”
“...알겠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기세와 주도권, 발빠른 대응.
비단 군대와 지휘관에 한정 짓지 않아도 몹시 중요한 역량이었다. 타의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이끌어야 한다.
조언을 마친 팽가주는 이번엔 악군위를 바라봤다. 흐뭇하고 탐내하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눈부신 준재로다. 아들 자랑이 메마르지 않는데 다 이유가 있군.”
“감사합니다. 칭찬에 몸둘 바 모르겠습니다.”
악군위는 겸손하게 칭찬을 받아냈다.
그리고 잠시, 갑작스러운 제안이 이어졌다.
“유연이와 백년가약을 맺을 생각이 없냐. 자네와 같이 출중한 사위라면 서방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한데.”
정략혼을 논했다. 예사스러운 일이었다. 악가와 팽가 같은 명문가라면 태중(胎中)의 약혼도 흔했다. 오히려 아직까지 짝이 안배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아버지? 제 뜻을 존중한다고 약조하셨잖아요.”
“왜, 너도 꽤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던데 아니더냐. 다른 놈팡이가 채 가는 것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데.”
“제가 언제!”
반발을 무시하고 주접이 작게 들려왔다.
“악가놈한테는 미안하지만 네 귀중한 아들, 내가 감사히 받아가-”
불현듯 이변이 재앙처럼 다가왔다.
콰아앙!
섬전과 같은 빛살이었다.
무시무시한 충격을 뒤로, 유성이 땅거죽을 뒤집은 것마냥 커다란 구덩이가 돌연 생성되었다. 하늘이 진노하여 천벌을 내린 듯한 광경이다.
파인 땅 위로 깃발처럼 꽂힌 건, 한 자루의 창.
창두부터 창대까지 통째로 만년한철이었다. 저것을 팔아 땅을 산다면 남부럽지 않고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단순 책정된 재룟값만 해도 그 정도다.
허나 더 경악스러운 건 신병이기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창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강호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신물.
고아한 물결무늬가 찬란하게 새겨져 있다.
명백한 산동악가의 상징이다.
악군위는 저 창의 주인을 나직이 읊조렸다.
“아버지...?”
그때 방위를 알 수 없는 울림이 번졌다.
[아둔하고 막된놈.]
실로 거룩했다. 불가의 혜광심어를 연상케하듯 신령스러운 힘의 목소리였다. 그 주인의 현 위치를 안다면 더더욱 놀랍다.
[기껏 찾아와놓고 한다는 것이 잡스러운 짓이더냐.]
그 말에 팽가주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굉장히 미소가 선명했다.
“예상보다 상태가 꽤 괜찮아보이는군.”
팽가주가 비무를 곧장 알아차리고 관전했듯, 악가주 역시 줄곧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물론 여전히 양 눈을 잃은 채이리라.
[추태는 적당히 부리고 내게로 오라. 친히 축객령을 내려야 떠날 듯하니.]
“좋지. 오래간만에 대작이라도 할까.”
쿵, 쿵.
묵직한 진동이 발걸음에서 번져나왔다. 그러자 길을 안내해주겠다는 듯 방금 생긴 구덩이에서 들썩거림이 번졌다.
우우웅.
창이 대기 중으로 떠오른다.
이기어창술(以氣御槍術).
고도의 내가조종 기예이다. 병장기만 다를 뿐 어검술과 동급의 자격이 요구되었다.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는 허공섭물과 차원이 다른 격.
창을 별 힘 없이 뜻대로 부린다.
처음의 운석 같은 충돌도 저 기술에 기반하였다.
우웅.
그리고 움직이던 창이 돌연 멈춰 섰다.
마치 저것을 매개로 시선을 보내기라도 한 듯 조금 돌려졌다.
이내 전음 경유 탓에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한 인상의 목소리가 악군위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반사적으로 그리운 호칭을 불렀다.
그러자 머뭇거리는 듯 잠시 침묵이 일었다가 그쳤다.
[...삼남도 함께 오거라.]
긴히 할 얘기가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북방 마경에서 폐인이 된 부친이시다.
절망에 빠졌던 그가 오랜만에 아들을 불렀다.
악군위는 기꺼이 대답했다.
“예!”
전에 없을 정도로 활기 찬 목소리였다.
- 작가의말
집 밖에서 휴대폰으로 쓰는 중이라서 추후 따옴표 수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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