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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다섯별
작품등록일 :
2024.10.01 10:51
최근연재일 :
2024.11.0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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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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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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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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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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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흘려버린 추억(3)

DUMMY

“너희가 찾는 물건이 이거지? 부탁 하나만 들어줘. 그럼 이걸 돌려줄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칙칙한 검은색 옷을 입고, 하얀색 로고가 박힌 검은 모자를 쓴 남성이 주먹 쥔 손을 미에코 앞으로 내밀었다.

모자의 그림자로 경직된 표정을 가린 그가 손을 펼치자, 겹겹이 감싼 부적 뭉치가 드러났다.

안에서 익숙한 방울 소리가 울리자, 미에코가 즉시 반응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녀의 손이 부적에 닿자, 거대한 불꽃이 폭발했다.

뒤로 물러선 미에코는 검게 그을린 손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뭐야? 뭔데 그걸 네가 가지고 있어? 당장 돌려줘. 안 그러면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여유를 잃은 미에코의 목소리는 단순한 위협이 아닌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녹색 홍채가 흰자위를 덮을 정도로 커지고, 검은 동공은 날카로운 세로 동공으로 변했다.

남성은 몸을 움츠리며, 서둘러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이목의 냉소 어린 웃음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피를 매개로 만든 수호부를 저리 덕지덕지 붙여놨으니, 웬만한 놈들이 감당할 리 없지. 그런데 도사치고는 나이도 재능도 부족해 보이는 네가 어떻게 그 정도의 위력을 냈지?”

어느새 장발로 돌아온 이목이 비아냥거리며 다가오자, 남성은 등 뒤에 숨겨온 나무칼을 꺼내 이목에게 겨눴다.

엉성한 자세와 조잡한 칼의 모양새가 우스웠지만, 남성의 표정은 진지했다.

“다가오지 마! 난 현학도사 이태화의 후손, 이성재(李成才)다. 내가 들고 있는 칼은 너희 귀신들이 두려워하는 복숭아나무칼이야. 그러니까 강제로 뺏을 생각 말고,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나 대답해!”

조금 전 부적의 위력을 몸소 체험한 미에코는 사냥감을 노리는 사나운 눈빛으로 이성재를 주시했지만, 쉽게 덤벼들지는 못했다.

한편,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칼을 들이대는 이성재에게 이목은 계속 다가갔다.

두려움이 한계에 달한 이성재가 이목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나무가 비틀리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비늘도 꺼내지 않은 이목의 맨손이 나뭇조각을 들고 있었다.

손잡이만 덩그러니 남은 칼을 쥔 이성재의 다리가 바들거렸다.

독 안에 든 쥐를 본 뱀처럼 이성재를 내려 보는 이목의 시선이 차갑게 빛났다. 그때 보목이 놀라면서 휴대전화를 내보였다.

“어? 현학도사 이태화가 실제로 있었네요.”


- 조선시대 경종 시절, 스스로를 현학도사라 칭하던 이태화라는 도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리산 석굴에서 도를 닦은 도사라 거문고를 타면 검은 두루미가 와서 따른다고 소개했다.

당시 속리산은 호랑이가 출몰하는 장소였기에 사람들은 이태화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나아가 그는 자기가 ‘둔갑술에 능하고 천리안을 가졌으며, 귀신도 부리는 현학도사.’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현혹했다.

따르는 무리가 늘어난 이태화는 자기를 따르던 종8품 종사에게 “귀신을 부려 은화를 얻으려면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가 필요하다.” 말했다.

충성심이 강했던 종사는 이를 믿고 자신의 붉은 도장을 찍은 종이 십여 장을 만들어 바쳤다.

이태화는 그걸로 ‘공명첩’을 만들어 돈을 모아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따르던 사람의 배신으로 무리 60명과 같이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


“사기꾼이군.”

“사기꾼이네.”

“다들 시끄러워! 그래서 부탁 들어줄 거야? 말 거야? 그거나 빨리 말해.”

보목의 설명에 모두가 자기를 한심하게 바라보자, 이성재는 이목과 거리를 벌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진 그를 바라보던 미에코가 의아해했다.

“근데 옛날의 한국에서는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의 후손을 살려줬어?”

“찾아보니까 그분이 여색을 밝혔다는 얘기도 있어요. 아마 사생아가······.”

보목이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를 근거로 추측을 이어가던 중, 이성재가 객기를 부리며 고함을 질러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격한 어조로 다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딴 거는 알 필요 없으니까, 빨리 내 저주나 풀어달라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보목이 붉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내뱉는 이성재를 진정시키려 다가갔다.

“저주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래, 저주야. 이걸 보라고.”

이성재가 자기 양 손등을 들어 보였다.

왼손에 다섯 개, 오른손 엄지 하나, 총 여섯 개의 손톱이 멍든 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얼마 전부터 나랑 똑같이 생긴 놈한테 내 자리를 빼앗겼어. 분명 조상님이 쓰신 태화서(泰華書)에 나오는 천년 묵은 쥐가 내 손톱을 먹고 둔갑한 거야. 제발 살려줘. 책에 따르면 손톱이 먹히고 열흘째 되는 날, 모든 손톱이 검게 변해 죽는다고 했어. 오늘 아침에도 또 하나가 늘었어. 이대로 두면 난 정말 죽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가 대신 녀석을 없애줘.”

이성재가 ‘泰華書’라고 적힌 낡은 책을 품에서 꺼내 펼쳤다.

고통에 찬 인간의 손톱을 커다란 쥐가 물어뜯고 있는 기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실감 나는 그림 옆에 쓰인 한자를 살피던 보목에게 이성재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보목이 경계심으로 눈을 찌푸리며 피했다.

“그러니까 성재 씨 말은, 그림 속 커다란 쥐가 사람으로 둔갑해서 진짜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다니까! 빨리 가야 해. 지금 그 녀석이 우리 집에서 엄마랑 같이 있어. 언제 돌변해 엄마를 잡아먹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되면 나도 죽고, 엄마도 죽을 텐데. 너희는 이걸 그냥 두고 볼 거야?”

평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일이 많지 않던 이성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를 내듯 소리쳤다.

이목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전에 확실히 해야 할 게 있지. 저기 저 녀석은 저래 봬도 신령이다. 그런데 신령을 막을 정도의 부적을 쓴 네가 왜 직접 나서지 않고 우리에게 부탁을 하지?”

손가락으로 미에코를 가리키는 이목을 이성재는 마주 보지 못하고 초조하게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손가락 끝이 떨리며 몸이 경직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너한테는 안 통할 것 같으니까 솔직히 털어놓을게. 사실 부적은 인터넷 보고 베낀 거야. 태화서는 괴물을 설명하는 책이지 퇴치 방법은 적혀있지 않아. 부적이 통하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았고······.”

말은 멈춘 이성재가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들고 미에코와 이목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엇보다 너희는 용이랑 고양이잖아.”

이성재의 눈에는 이목과 미에코의 뒤로 용과 커다란 고양이의 형상이 어렴풋이 비쳤다.

사기꾼이었지만, 도사였던 이태화에게 물려받은 실체를 보는 눈 덕분이었다.

그것은 그가 세상이 두려워 등지게 만든 원인이자, 이번 문제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근거였다.

“확실히 단순한 사기꾼은 아니었나 보구나.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니? 내가 방울을 돌려준다고 말했잖아.”

이목의 추가 조건에 이성재가 목소리를 높이며 반발하자, 미에코가 뒤에서 하악질을 했다.

“그건 원래 내 물건이잖아.”

“그래, 그 방울은 원래 저 고양이 녀석의 것이니 거래 조건이 될 수 없지. 부탁을 하려면 적어도 네놈이 가진 걸 걸어야 맞지 않겠느냐? 아마 네놈이 가진 것 중 그나마 가치 있는 건 그 도사의 피 정도겠지.”

여유롭게 미소 짓는 이목과 달리, 이성재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자신의 검어진 손톱을 내려다봤다.

죽음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한 이성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목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성동구에 위치한 학원으로 향하는 택시 뒷좌석에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보목이 가운데 앉아 있고, 이성재와 미에코는 각각 양옆에 떨어져 앉아 있었다.

이성재는 조수석에 탄 이목과 미에코의 눈치를 살폈다.

떨리는 시선으로 이리저리 살피던 그가 남들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보목을 불렀다.

“넌 무섭지 않아? 따지고 보면 저 녀석들 모두 인간으로 둔갑한 괴물이잖아. 아까도 봤잖아, 피를 대가로 달라니, 그게 말이 돼? 언제 본성을 드러낼지 모르는 괴물들이랑 넌 어떻게 웃으며 지내는 거야?”

보목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릴 적 이목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본능적인 두려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성재의 반응이 정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기가 언제부터 이들과 같은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잊었는지 고민했다.

그들의 대화는 조용했지만, 사람보다 뛰어난 청력을 가진 미에코와 이목은 대화 내용을 또렷하게 들렸다.

보목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던 미에코와는 달리, 이목은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헛소리. 영물보다 못한 인간으로 둔갑한 적 없다. 그저 너희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에 그리 보일 뿐이다. 원한다면 네 두려움의 원천을 대가로 대신 받아줄 수도 있으니, 그저 한마디만 더 뱉어라.”

내부용 백미러를 통해 노려보는 이목의 눈을 피해 이성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두 손을 주먹 쥔 채 경직되어 떠는 그를 안쓰럽게 여긴 보목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쥐를 잡는다면서 왜 집이 아니라 학원으로 가는 거예요?”

이성재가 땅에 박혀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조수석을 힐끔 봤다.

이목의 시선이 자기를 향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근데 얼마 전부터 그놈이 재수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 어쩌면 엄마를 해치운 다음, 학생들을 꾀어 잡아먹을 계획일지도 몰라.”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는 생각도 들었던 보목이지만, 두려워하는 이성재에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보목이 만났던 영물이나 신령은 인간과 사고방식이 많이 달랐다.

그녀는 조수석에 앉은 이목이 사람을 해치는 모습을 상상했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보목은 이성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성재 씨 나이에 재수 학원은 이해가 어렵네요.”

머릿속에 남은 상상을 떨쳐내기 위해 재수 학원 주제로 돌아온 보목의 말에 이성재의 얼굴이 붉어졌고, 경직된 입술이 떨렸다. 그가 욱하며 더듬거렸다.

“뭐, 뭐가 어때서! 표정이 어두워서 그렇지, 난 아직 스물하나라고!”

억울해하는 이성재의 반응에 보목의 표정이 굳었다.

초면인데도 자연스럽게 반말하고 세상 근심을 혼자 짊어진 어두운 얼굴 탓에 보목은 당연히 그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진실을 알게 된 보목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야, 내가 누나니까 반말하지 마.”

갑자기 나온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이성재가 멍하니 보목을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덧붙였다.

“다시 말해, 나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그리고 이목 님이랑 미에코 언니에게도 마찬가지야.”

이성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붉어진 얼굴을 다시 숙였다.

말없이 분노를 삼키는 그를 옆에서 보고 있던 미에코는 의외라는 듯 놀라워했지만, 이목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작가의말

다음 편은 진짜 가짜를 찾는 재미를 위해서 이성재에 대한 호칭이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98 sy****
    작성일
    24.10.31 20:25
    No. 1

    헐 작가님 힘내세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 다섯별
    작성일
    24.10.31 21:53
    No. 2

    능력은 부족하지만, 다양한 재미를 드리고 싶어 욕심을 내봤어요.
    부디 재밌으시면 좋겠네요.
    부족한 글을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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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드러난 탐욕(4) 24.10.19 33 0 12쪽
19 드러난 탐욕(3) 24.10.18 2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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