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버린 추억(4)
약 30분이 지난 후, 서울 성동구의 위치한 학원 앞에서 택시가 멈춰 섰다.
곧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와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학생들이 무리 지어 내려왔다.
그들 중 흰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 화사한 웃음으로 다른 학생들에게 인사하고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허리와 어깨를 단정히 펴고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청년은 당당한 걸음으로 이성재를 향해 다가왔다.
대조되는 멀끔한 외형 때문에 보목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인가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이목 쪽 이성재는 그가 자기로 둔갑한 쥐라고 확신했다.
“또 너냐? 넌 대체 뭐길래 자꾸 나타나서 얼쩡거리는 거야? 그리고 올 거면 제대로 준비해서 와. 어쭙잖게 따라 해서 불쾌하잖아.”
가까이서 보니, 멀끔하지만 닮은 외모의 이성재가 따지듯 화를 냈다. 이에 이목 쪽 이성재가 당황한 얼굴로 격분했다.
“거짓말하지 마! 넌 쥐새끼잖아. 지금 누가 누구보고 가짜라는 거야. 내가 진짜가 아니라면 왜 날마다 내 손톱이 검어지는 건데!”
답답한 마음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말을 쏟아내던 이목 쪽 이성재는 양 손톱을 멀끔한 이성재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멀끔한 이성재는 순간 움찔하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얼굴 앞에 내민 이목 쪽 이성재의 손을 쳐냈다.
“뭐야. 갑자기 손톱이 왜 이런가 했더니 이것도 네가 한 짓이었구나?”
멀끔한 이성재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당하게 손톱을 내밀었다. 그의 손톱도 이목 쪽 이성재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당황한 이목 쪽 이성재를 향해 손톱을 코앞까지 내밀었다.
“이게 뭔지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봐. 왜 말 못 하겠어? 말하면 네가 불리해지니까? 넌 이번에도 자기가 진짜라고 우기면서 내 자리를 뺏으려는 속셈이잖아. 안 그래?”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 멀끔한 이성재에게 이목 쪽 이성재가 달려들었으나, 그는 가볍게 밀쳐져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멀끔한 이성재를 올려다보던 이목 쪽 이성재는 곧 고개를 땅에 박으며 무언가 중얼거렸다.
멀끔한 이성재는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제 안 통하니까 그만두고 정신 차려.”
대꾸 없이 주저앉아 있는 이목 쪽 이성재에게서 멀끔한 이성재가 시선을 돌려 이목 일행을 노려봤다.
불쾌했던 그는 억지로 비웃듯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그리고 당신들도 눈이 있으면 잘 봐. 대체 누가 누구를 보고 쥐라는 거야. 애초에 저주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게 이상하지 않아? 나랑 당신들 위치를 단번에 찾아내는 걸 보고도 이 녀석이 정말 사람으로 보이냐고. 아니면 너희도 사람이 아니려나?”
조롱의 말투로 모두를 비웃던 그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목 쪽 이성재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낮게 속삭였다.
“네가 훔친 책이 뭔지는 몰라도 그냥 줄 테니까, 이제 가만히 있는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손톱이나 돌려놔.”
멀끔한 이성재는 토닥이듯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를 떠났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 뒤를 이목 쪽 이성재가 공격하려 일어났을 때, 이목이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이목은 멀끔한 이성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목덜미에서 손을 뗐다.
이목 쪽 이성재가 따지려 뒤돌아보자, 미에코와 보목이 의심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자기가 진짜라고 필사적으로 주장했지만, 그들의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행동할지 더 지켜보는 것도 좋겠지.”
이목의 차분한 말에 일행들은 멀끔한 이성재가 걸어간 방향을 토대로 그가 갈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동네 마트에서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든 멀끔한 이성재가 아주머니와 함께 걸어 나오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목 쪽 이성재는 그녀를 자기 어머니라고 설명했다.
“요즘 여자 친구라도 생겼니? 평소에는 엄마 일하는 곳에 얼씬도 하지 않던 애가 요즘에는 마중까지 나오고, 가출하고 나서 부쩍 어른스러워졌네.”
부드러운 주름을 따라 이성재 어머니가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띠자, 멀끔한 이성재가 그녀를 닮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철이 든 것 같아요. 연애 생각은 아직 없어요. 지금은 제게 기회를 주신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요. 계속 어머니랑 둘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의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안에는 걱정이나 근심 대신 기쁨과 쑥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남편을 잃고 철없던 아들을 돌보며 지내온 세월 끝에 이제야 느껴지는 아들의 듬직함이 그녀에게는 다소 낯설어 웃음이 나왔다.
“어휴, 요즘 얘가 왜 이래, 자꾸 그러지 마. 다 큰 애가 계속 이러면 징그러워. 한 번 혼난 걸로 이렇게 달라진 걸 보면 또 혼내면 손자라도 안고 오는 거 아니야?”
화목한 모자의 뒷모습을 이목 일행과 이목 쪽 이성재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목 쪽 이성재는 험상궂게 구겨진 얼굴로 자기가 진짜라고 중얼거렸다.
초조함이 느껴지는 끈질긴 주장에 이목은 혀를 찼다.
“이봐, 쓰레기. 저 둘 사이를 네가 갈라야겠느냐?”
“당연하지! 누가 뭐래도 내가 진짜고 쟤가 가짜니까,”
반말을 뱉으며 성질을 내던 이성재는 이목 일행의 시선에 주눅이 들면서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진짜고, 쟤가 가짜라니까요.”
끈질긴 이성재에게 보목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미에코는 고개를 저으며 충고했다.
“아직도 네가 진짜라고 우길 생각이야?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 그러면 방울만 돌려받고 끝내줄게. 지금 누가 봐도 네가 가짜야. 혹시 삼류 영화처럼 사실은 네가 흑막이었다는 전개를 꿈꿨다면, 이미 실패했으니까 여기서 그만둬.”
미에코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성재는 어머니라면 자기를 진짜로 알아볼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집에만 가면 모든 진실이 드러날 거라며 집까지 동행해 달라고 계속해서 떼를 썼다.
간곡한 부탁에 이목 일행이 찾아간 곳은 서울 성동구의 위치한 아파트였다.
어깨높이의 작은 아파트 울타리 안으로 시간의 흔적이 묻어난 외벽과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로 가는 잠깐 풍겨오는 진한 꽃과 나무의 향기는 주변의 고층 건물과는 다른 편안함을 주었다.
5층에 도착한 이목 일행은 좌우로 나뉜 두 개의 현관문 중 오른쪽으로 향했다.
이성재는 전자식 도어락에 손을 올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러나 마지막 숫자에서 도어락이 불쾌한 경고음과 진동을 울렸다.
당황한 이성재가 다시 번호를 입력하려 하자, 이목이 그를 밀치고 문고리를 잡았다.
“네놈이라면 번호를 그대로 두겠느냐? 잘 봐라, 잠긴 문은 이리 여는 것이다.”
자기 집 번호가 자기도 모르게 바뀐 사실에 충격을 받아 말문을 잃은 이성재를 두고, 이목은 문고리에 힘을 줬다.
쇠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철로 된 문이 이목의 손에 미닫이처럼 옆으로 구겨지며 열렸다.
이 특이한 문 여는 방식에 놀란 것은 이목 일행만이 아니었다.
집 안에 있던 멀끔한 이성재와 어머니 역시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목은 무심한 듯 자기 쪽의 이성재를 밀어 넣고는 신발을 신은 채 당당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제 뒤로 오세요! 저 괴물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요. 봐요, 문까지 뜯어내고 옛날의 저랑 닮은 가짜까지 앞세운 걸 보면 작정하고 온 게 틀림없어요.”
어머니를 뒤로 숨기며 이목을 경계하는 멀끔한 이성재는 손가락으로 이목 일행을 가리키며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난데없이 아들이 둘이 되어버린 상황에 어머니의 얼굴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두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희미한 기대와 불안이 두 아들 사이를 오가자, 이목은 조소를 머금었다.
“생각이 많겠구나. 잘나진 아들과 여전히 못나 아들 중 택하기란 어려울 만하지.”
두 아들을 오가던 어머니의 시선이 이목에게로 고정되었다.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이목은 삼십 대 중반의 남성과 함께 찍힌 과거의 가족사진과 현재의 가족사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현재의 가족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는 멀끔한 이성재의 등 뒤로 숨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선심 쓰듯 말했다.
“슬슬 시간이 됐구나. 네 입으로 말해봐라. 잘나진 아들과 쓰레기 같은 아들 중에 누가 진짜 네 아들인지 말이다. 결정에 따라 한 놈을 잡아주마.”
이목의 강압적인 태도에 압박감을 느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약간 벌린 채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려 두 아들을 훑었다.
순간적으로 깊어진 주름 사이로 식은땀이 맺혔다. 그 긴장된 상황에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윽박질렀다.
“뭘 망설이는 거야! 엄마는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제대로 구별 못 해? 누가 봐도 내가 진짜잖아. 대체 뭘 고민하는 거야!”
자기 선택으로 아들을 해칠 수도 있다는 부담감에 움츠러들었던 그녀의 어깨가 일순간 펴졌었다.
어두워진 낯빛에 굳게 다문 입술이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보여줬다.
자기를 보호하는 등 뒤에서 자기를 위협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눈빛은 경멸로 탁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목이 자기 쪽 이성재의 뒷덜미를 순식간에 움켜잡았다.
“이미 결론이 났구나.”
“무슨 소리야! 엄마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잖아. 당신이 뭔데 멋대로 결정해? 내가 진짜야! 그래, 저년도 가짜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보는 어미가 어디 있겠어?”
이목의 날카로운 손톱이 목에 닿자, 이성재는 어머니를 향해 더 크게 윽박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녀를 제외한 주위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절박하게 이목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냐! 난 진짜 인간이야. 내가 이성재라고! 정말이야, 제발 믿어줘.”
“괜히 움직여서 일을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이목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의 손톱이 이성재의 떨리는 목을 파고들었다.
칼에 베인 듯 찢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 이목의 손톱을 붉게 물들였다.
극심한 두려움에 이성재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동시에 이목의 손아귀가 풀리자, 이성재는 요란을 떨면서 재빠르게 구석으로 기어 도망쳤다.
그의 목에는 붉게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분위기와 달리 이목이 얕은 상처만 낸 이유를 몰라 주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갑자기 이목이 손을 재빠르게 휘둘렀다.
손톱 끝에 맺힌 핏방울이 공중으로 튕기며 날아가 멀끔한 이성재의 흰 셔츠와 얼굴에 닿았다.
그 순간, 미에코가 부적을 만졌을 때처럼 불꽃이 일어났다.
- 작가의말
너무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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