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버린 추억(6)~드러난 탐욕(1)

이성재의 모습이 아닌 자기만의 인간 모습으로 변한 그는 하얀 와이셔츠에 회색 슬랙스를 입은 성인 남성의 모습이었다.
어색하게 눈치를 보며 따라오는 진가서를 보고 보목이 물었다.
“진가서 씨, 혹시 머물 곳이 없으신가요?”
보목의 질문에 초점 없는 눈을 깜빡이던 진가서는 갸름한 턱을 천천히 끄덕였다.
그의 침울하고 무기력한 얼굴에 보목은 연민을 느꼈다. 고민 끝에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였다.
“네가 가난과 병의 상징인 영물을 집에 들이겠다면 막지는 않으마. 스스로 부른 가난은 업신(業神)이 둘이라도 못 막겠지만, 젊은 나이에 다시 빚쟁이가 되는 것도 값진 경험이겠지.”
경고와 같은 이목의 말에 보목은 진가서에게 내밀던 손을 주저했다.
월급이 오르거나 투자에 성공해서가 아닌 요행으로 빚을 갚은 자신이, 오늘 처음 만난 진가서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란 쉽지 않았다.
자기 처지를 다시금 깨달은 보목이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 녀석이 걱정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러니 일단 휴대전화라는 것을 꺼내라.”
이목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보목은 얼떨떨해했다.
보목은 휴대전화를 꺼내 이목의 지시대로 전화를 걸면서도 이래도 되는지 고민했지만, 이목은 뻔뻔하리만큼 당당했다.
이후, 홍 회장이 보낸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운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어딘가 언짢은 기색이 있었다.
청운은 진가서가 왜 자기 집에 있는지 물었다.
사실, 이목이 제시한 해결책은 모든 문제를 홍 회장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즉, 보목과 이목은 진가서를 홍 회장의 집으로 데려다주고 그대로 내뺀 것이다.
청운의 불만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한 보목은 집에 도착해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제야 오늘 하루가 얼마나 길고 복잡했는지 실감이 났다. 눈을 감으며 이목과 진가서, 그리고 있었던 모든 일들을 되새겼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피로감이 밀려와 그녀를 잠에 빠뜨렸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뜬 보목은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드러난 탐욕
서울에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난 화요일 아침, 산림청 국장실 문 앞에서 보목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느 정도 일에 적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을 여는 알은 언제나 부담스러웠다.
매번 호출될 때마다 정 국장은 능글맞은 얼굴로 새로운 업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을 맡길지 걱정이 앞선 보목은 심호흡하고 문을 열었다.
정 국장은 그녀를 보자마자 준비라도 한 듯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여전히 서글서글한 인상 속에 능글맞은 눈이 번뜩였다.
“아, 어서 들어와요! 우리 부서의 열정적인 보목 주무관님.”
보목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한 정 국장은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우리 부서에 특별한 임무가 생겨서 불렀어요.”
정 국장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최근 도솔산에서 나무들이 한순간에 단체로 시들어버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2박 3일 정도 출장 가서 직접 원인을 파악해 주면 좋겠어요. 이미 나무의사랑 수목치료기술자 두 명이 먼저 나가 있으니까, 보목 주무관님이라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부탁드릴게요?”
능글맞은 웃음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는 정 국장의 태도는 여느 때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보목은 1시간 거리임에도 2박 3일 출장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저기, 대전에 있는 도솔산 말씀하시는 거 맞죠?”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보목을 보면서 정 국장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요. 거긴 너무 가깝잖아요. 출장 갈 곳은 전북 고창군에 있는 도솔산(兜率山)이에요. 선운사(禪雲寺)가 있는 곳이라 요즘에는 선운산(禪雲山)이라 부르기도 하네요. 휴가라 생각하고 일행을 데려가도 좋아요.”
처음 듣는 장소에 당황한 보목에게 정 국장은 손을 익살스레 흔들어 인사했다.
등 떠밀리듯 국장실을 나온 보목은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를 꺼내 내일 자기가 갈 곳을 검색했다.
무려 4시간에 걸쳐 네 번을 환승해야 도착하는 거리였다.
화면을 바라보던 그녀의 손은 정 국장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미세하게 떨렸다.
뜬금없게 잡힌 출장에 기분이 가라앉은 보목은 퇴근 후 집 근처 미용실 ‘여인천하’로 발길을 돌렸다.
촌스러운 이름과 달리 20대 또래의 친절한 여성이 운영하는 미용실로, 보목이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자주 찾는 휴식처였다.
미용실 문을 열자, 사장이 환한 미소로 반겼다.
“누군가 했더니 우리 예쁜 단골이시네요. 어서 와요. 오늘은 어떤 스타일로 해드릴까요?”
“회사 일 때문에 기분 전환 좀 하려고요.”
미용 의자에 앉은 보목의 머리를 사장이 살며시 만지며 이해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은 조금 색다르게 해볼까요?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거예요.”
편안히 의자에 기대어 영양분 클리닉을 받고 있던 보목의 눈에 앞 손님이 두고 간 패션 잡지가 들어왔다.
표지에는 ‘仙學(선학)’이라는 한자와 한복을 입은 모델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보목은 그 브랜드가 최근에 홍 회장이 자기에게 선물한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선학이라는 브랜드, 생각보다 유명한가 봐요?”
보목의 질문에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고 멋을 내기 좋아하던 사장이 눈을 반짝였다.
“네, 특히 한류 열풍과 맞물려서 해외에서 더 인기를 끌고 있어요. 한복을 현대적으로 개량해 실용성을 높이면서도 고유의 특징을 살린 점이 대중에게 호감을 사고 있죠.”
사장은 흥미로운 주제를 찾은 듯 신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보니, 보목은 어느새 출장에 대한 걱정을 잊고 있었다.
간만에 또래와 평범한 대화를 나눈 보목은 머리를 다 마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미용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놀이터에서 그네가 움직이며 나는 사슬 소리가 들렸다.
이미 해가 저문 놀이터로 자연스레 고개를 돌린 보목은 그네에 앉아 있는 사미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누나, 여기야, 여기.”
여전히 탁한 눈에 어딘가 음침한 분위기였지만, 살갑게 구는 사미의 모습에 보목은 그에게 다가가 옆 그네에 앉았다.
“오랜만이야. 여기 혼자 있었어?”
주변을 둘러보며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보목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방금까지 살갑던 사미는 그저 고개만 저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곤란하던 보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나가 집까지 데려다줄까?”
“나 여기서 누나가 오기를 계속 기다렸어.”
무표정하게 자기를 바라보며 나온 사미의 엉뚱한 대답에 보목은 순간 당황했다.
‘언제부터 기다렸던 걸까?’라는 의문에 그녀가 잠깐 멈칫하는 사이, 사미가 붉은 천으로 짠 주머니를 건넸다.
보목이 그것을 받아 열어보니, 가죽으로 정교하게 짠 팔찌가 들어있었다.
“그게 이번 여행에서 누나를 지켜줄 거야.”
보목은 재빨리 사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미가 이미 자기의 출장을 알고 있는 듯 말하는 태도에 살짝 의심이 스쳤지만, 이내 별일 아닐 거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그녀는 사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온 예언같이 진지한 말을 마냥 어린아이의 장난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보목은 팔찌를 손에 차며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하던 사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말로 고마우면 나중에 내가 필요로 할 때 단 한 번, 한 발짝만 더 나아가 손을 내밀어줘. 난 그거면 충분해.”
정말로 즐거운 듯 웃는 사미를 바라보며, 보목은 처음 만났을 때의 말이 떠올랐다.
‘누나는 상냥해서 마치 진짜 엄마 같으니까 내가 도와줄게.’
사미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지 생각하던 중, 쌀쌀한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사미의 얇은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보풀이 진 낡은 옷을 입을 보며 보목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사미야, 날씨가 아직 쌀쌀한데 집에서는 잘 지내고 있지?”
보목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사미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얼굴에는 경계심이 떠올랐다.
딱딱해진 말투로 그가 말했다.
“아직은 말할 때가 아냐. 하지만 곧 전부 말해줄게. 그게 내가 누나를 찾아온 이유니까. 대신 이것만 약속해 줘. 내가 정말 필요로 할 때,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손 내밀어 줄 거라고.”
진지해진 사미의 부탁에 보목은 자기가 너무 성급하게 물었던 것 같아 미안해졌다.
확신을 주고 싶었던 그녀는 사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반드시 손 내밀어주겠다고 말이야.”
이후 보목은 사미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사미가 사는 곳은 고즈넉한 한옥이었는데, 입구에는 보살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당(堂)집이었다.
보목은 대문에서 사미와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미는 멀어지는 그녀를 무표정하게 지켜보더니, 천천히 당집의 대문을 닫았다.
문이 열리고 보목이 들어왔다.
평소보다도 늦은 귀가였음에도 이목은 타이밍 좋게 현관에 나와 있었다.
“나갈 때나 들어올 때마다 도축장 끌려가는 소 같더니, 오늘은 얼굴이 밝구나. 무엇이 그리 좋으냐?”
의아해하는 이목에게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보목이 의기양양하게 선물 받은 가죽 팔찌를 자랑했다.
“어때요, 예쁘죠? 오늘 회사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선물로 받았어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미간을 살짝 찌푸린 이목은 보목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팔목을 잡아 팔찌를 유심히 살피는 눈매에 의심이 어렸다.
“꺼림직하구나. 다른 이도 아닌 너에게 굳이 선물이라니, 취향이 독특하거나 다른 목적이 있는 자겠지. 다음부터 이런 건 받지 말거라. 향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도깨비와 함께 사는 것도 불쾌한데, 새로운 놈이라도 끌어들일 셈인 게냐.”
보목이 팔찌에 코를 가까이 대니, 희미한 향냄새가 풍겼다.
아마도 사미를 데려다주었던 당집의 냄새라고 짐작하는 사이, 이목이 그녀의 팔에서 팔찌를 빼갔다.
“적당한 물건이 필요했는데 잘됐구나.”
팔찌를 손에 올린 이목이 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냈다.
그가 그것을 응시하니, 붉은 액체가 유리병을 벗어나 공중으로 치솟았다.
허공에서 울렁이던 액체는 검붉은 빛을 띠며 팔찌 위로 떨어졌다.
가죽 특유의 갈색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가 검붉은 빛으로 변하며 팔찌에는 신비로운 문양이 하나둘 새겨졌다.
보목은 팔찌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놀라며 이목에게서 팔찌를 재빨리 낚아채며 눈을 부라렸다.
“이거 선물 받은 건데, 마음대로 바꾸시면 어떡해요? 그리고 그 액체는 뭐예요?”
“전에 본 쓰레기의 피다. 불쾌하더라도 효능은 확실하니 차고 다녀라. 자꾸 이상한 것들을 끌어당기는 네게는 필요한 물건이다.”
보목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자기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느껴졌지만, 사미가 팔찌의 변화를 알아챘을 때의 곤란함, 사람의 피인 것도 꺼림직한데 하필이면 이성재의 피가 스며들었다는 사실, 그리고 선물 받은 물건을 의견도 묻지 않고 바꾸는 이목의 행동이 주는 불쾌함까지.
감정이 뒤엉킨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는 이목을 바라보며 홀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 작가의말
능력이 부족해서 모두에게 사랑받지는 못하더라도 포기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로 현재 '드러난 탐욕' 에피소드 속 계절은 늦겨울에서 초봄으로 가는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추천과 선호작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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