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탐욕(3)

많은 양의 물과 얼음에 괴오공이 땅으로 찌그러지듯 눌렸고, 젖은 흙이 괴오공의 모양대로 파였다.
강철 같은 외골격에 금이 가면서도 멈추지 않는 비의 폭포에 괴오공은 땅에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다.
괴오공의 거대한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자, 빗줄기 또한 서서히 멈추었다.
“냄새가 지독하여 물을 부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진흙처럼 묽어진 땅을 더럽다는 듯 발아래로 안개를 깔아 밟아가던 이목은 괴오공이 묻힌 곳에 다다랐다.
하지만 괴오공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만 남아있었다.
괴오공이 보목을 쫓아갔다는 생각에 이목이 급히 고개를 돌리자, 괴오공이 등 뒤에서 솟구쳐 이목을 중심으로 여러 겹 똬리를 틀었다.
강철 같은 골격으로 이목을 완전히 감싼 그는 몸을 강하게 조이며 독니를 세웠다.
“나를 속이고 땅으로 기어들어 갔으면 그대로 도망치거나, 다른 녀석들을 쫓았어야지. 이제 더는 놓치지 않을 게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목은 괴오공의 외골격을 쥐어짜듯 잡았다.
똬리 안에서 쇠를 긁는 소리와 불꽃이 튀며 괴오공의 몸이 강제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괴오공이 똬리를 일부 풀어 이목의 목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네놈이 아니라 내가 잡은 것이다!”
흉포한 독니가 이목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이목의 손이 느슨해진 똬리 사이로 튀어나와 독니를 붙잡았다.
“이런 알량한 걸 믿고 설치는구나. 안개를 다루는 것도 그렇고, 벌레가 뭐라도 되는 양 구는 게 불쾌하구나.”
이목의 녹아내린 소매 너머로 힘줄이 도드라지며, 괴오공의 독니가 뜯겨 나갔다.
비명과 함께 터져 나오는 푸른 피를 이목은 물로 장막을 펼쳐 몸에 닿지 않게 막았다.
동백나무숲을 빠져나와 30분쯤 걸었을 때, 보목은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에 다다랐다.
바위 아래에 있는 아치형 동굴로 조심스레 들어서자, 보목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용문굴 내부는 복잡한 패턴의 석순들이 매끈한 금광석 천장에 매달려 있고, 벽에는 석영이 박혀 있어 햇빛이 입구에서부터 동굴 깊숙이 굴절되어 들어왔다.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인위적인 동굴을 둘러보던 보목에게 김태영이 재촉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제 아내도 있을 테니 어서 가죠.”
식은땀을 흘리며 동굴을 들어가는 김태영에게서 지금까지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초조함이 느껴졌다.
불안감을 느낀 보목은 조급해지는 그의 발걸음과 달리 속도를 늦췄다.
동굴 깊은 곳에는 넓은 평지가 있었다.
금가루를 뿌린 양 반짝이는 호수를 중앙에 두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굴들이 이어졌다.
깊이 들어왔음에도 바깥처럼 밝고, 값져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 찬 굴들을 보며, 보목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 뭔가 이상해요. 아내분이 정말 여기 계세요?”
불안에 휩싸인 보목이 뒷걸음질 치자, 김태영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땀이 흥건한 손으로 그는 가장 큰 굴을 향해 절규하듯 외쳤다.
“약속대로 새로운 여자를 데려왔으니, 이제 아내를 돌려줘!”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어요?”
얼굴에 땀이 맺힌 김태영은 보목의 원망 어린 시선에도 오직 굴을 향해 절박하게 아내를 돌려달라고 외쳤다.
그의 광기 어린 눈빛 끝, 가장 어둡고 깊은 동굴에서 경박하고 탐욕스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굴 전체를 진동시키며 다가오는 무거운 발걸음에 보목의 심장은 두려움으로 요동쳤다.
한편, 격렬한 전투 끝에 이목은 붉은 머리 여인의 목을 비틀 듯이 붙잡고 있었다.
이목의 손아귀가 조이자, 반라 차림으로 다리가 꺾여 축 늘어졌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올라오면서 흔적을 살피니, 들어온 사람들에 비해 나간 흔적이 턱없이 적더구나. 필시 네놈이 사람을 해친 탓이겠지. 말해라, 사람들을 어떻게 했느냐?”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목의 경멸 어린 목소리에, 괴오공이 의인화한 붉은 머리의 여인은 양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나도 몰라, 나도 그 녀석한테 협박당했단 말이야. 널 죽이고 여자를 잡아 오면 산을 돌려준다고 약조해서 덮친 게 전부야······”
“그 녀석이 누구냐?”
괴오공은 두려워 떨었지만, 이목의 눈은 더욱 매서워졌다.
목을 조이는 압박이 강해지자, 그녀는 괴로움에 신음하며 힘겹게 이름을 내뱉었다.
“······금돼지.”
이름을 듣자, 이목의 눈썹이 일순간 꿈틀거렸다가 다시 차갑게 굳었다.
그는 괴오공을 내팽개치고 보목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침하며 풀린 목을 부여잡던 괴오공이 소리쳤다.
“네가 찾는 여자애는 지금쯤 금돼지한테 잡혀있을 거야. 나랑 거래하자. 네가 금돼지를 잡고 내게 산을 돌려준다고 약속하면 내가 녀석의 위치를 알려줄게.”
바닥에 쓰러진 몸을 힘겹게 일으키는 괴오공의 제안에 이목은 그녀를 잠시 노려보더니, 보목이 김태영을 따라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필요 없다.”
손을 내밀어 궁중에서 무언가를 잡는 시늉을 한 이목은 그대로 괴오공을 방치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이목이 보목을 찾으려 움직이는 동안,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커다란 굴에서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웃음의 주인은 맞지 않는 면류관을 억지로 눌러쓰고, 황금용이 새겨진 검은 비단옷을 바닥에 끌며 걸어왔다.
돼지의 형상을 한 머리 아래로, 용포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몸은 금속처럼 광택이 났다.
거한은 금빛 몸과 돼지머리를 가진 금돼지였다.
“이 휴대전화라는 보물,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금돼지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자, 김태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보목은 다가오는 금돼지에게서 도망치려 했으나, 김태영의 떨리는 손은 그녀를 놓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시선 앞에 금돼지가 가까이 다가와서야 김태영은 그녀의 팔을 놓고 무릎을 꿇었다.
“제발, 약속대로 아내를 돌려줘. 원하는 만큼,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데려올 테니까. 제발 그 사람만은 풀어줘.”
무릎을 꿇고 마치 신에게 비는 신자처럼 땀에 젖은 얼굴로 손을 모아 애원하는 그의 모습을 금돼지는 잠시 음미하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기 턱을 슬었다.
역할 정도로 비열한 미소 끝에 금돼지의 두꺼운 혀가 날름거렸다.
“짐이 그런 약속을 했던가?”
금돼지가 뜸을 들여 말하자, 한 줄기 희망이 사라진 김태영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금돼지는 이를 즐기듯 탐욕적인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뭐, 크게 상관없겠지. 때마침 새로운 것도 들어왔으니, 그대 뜻대로 하라. 굳이 낡은 것을 들고 있어 봐야 자리만 좁아지지. 저리로 가서 조용히 가지고 가라.”
금돼지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젓자, 김태영은 흙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절을 했다.
치욕과 희망이 뒤섞인 그의 몸은 미약하게 떨렸다.
금돼지가 가리킨 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보목을 안쓰럽게 바라보았지만, 복잡한 심경으로 자기를 노려보는 보목의 눈빛에 금방 고개를 돌리고 굴로 뛰어갔다.
한편, 금돼지는 두툼한 손을 보목에게 내밀며 살이 오른 얼굴로 비열하게 웃었다.
“자, 새로운 여자여. 너는 짐에게 무엇을 바칠 수 있겠느냐?”
금돼지가 음흉한 욕망을 드러내며 보목에게 다가왔다.
소유물을 감상하는 끈적이는 눈빛이 보목을 훑는 그때, 절망에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김태영이 붉은 비단을 품에 안고 굴에서 뛰쳐나왔다.
조금 전까지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분노로 물든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광기에 휩싸인 채 비명을 지르며 금돼지에게 달려들었다.
“이 더러운 돼지 새끼야! 약속했잖아! 우리를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김태영의 처절한 발악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금돼지는 갑자기 민첩하게 앞으로 뛰어들었다.
육중한 몸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김태영의 머리를 움켜잡은 금돼지는 두꺼운 팔로 그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머리가 잡힌 상황에서도 김태영은 붉은 비단을 꼭 안은 채 필사적으로 발길질했다.
금돼지는 발길질에 언짢은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한순간에 강하게 쥐어진 악랄한 손아귀에서는 비명 대신 붉은 피가 쏟아졌다.
머리를 잃은 김태영의 몸이 바닥에 만들어진 피의 웅덩이로 붉은 비단을 안은 채 떨어졌다.
코를 찌르는 역한 쇳내가 동굴에 퍼졌고, 머리가 하얘진 보목은 구토를 참을 수 없었다.
“들고 가기 편하게 짐이 손수 포장해 줬거늘, 이리 은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참으로 인간들은 다루기가 어렵단 말이지.”
금돼지는 혀를 차며, 김태영의 품에서 비단을 잡아당겨 자기 손을 소중히 닦았다.
비단의 매듭이 풀리며 긴 머리칼을 가진 여인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끔찍한 광경에 보목의 몸은 굳어갔고, 심장은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고동쳤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금돼지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 뭐야? 네가 대체 뭐길래 사람 목숨을 이렇게 우습게 여겨.”
차갑게 가라앉은 보목의 목소리가 금돼지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금돼지는 초승달처럼 모양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보목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거창하게 몸짓했다.
“짐은 과거 천계의 은하수를 다스리던 천봉원수이자, 삼장법사에게 저오능(猪悟能)이라는 법명을 받은 정단사자(淨檀使者) 저팔계(豬八戒) 님이시다.”
과장된 몸짓으로 자기를 소개한 금돼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경멸로 구겨진 보목의 얼굴을 공포로 착각한 그는 최대한 자비로운 척하며 그녀에게 다가가 피를 닦은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겁낼 필요 없다. 짐은 신사이니, 여성에게는 나름의 예의를 차리는 편이지. 서로 즐길 수 있는 쾌락을 충분히 나눈 뒤에야 비로소 야들해진 육질을 음미하는 미식가거든. 그러니 한동안은 미천한 너도 짐의 황후가 되어 이 산을 누릴 기회를 주마.”
금돼지의 더러운 손길이 닿자, 보목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리며 그의 손을 내쳤다.
두려움이 스쳤지만, 그보다 더 깊은 역겨움이 그녀의 속을 뒤집었다.
“그럴 일은 없어. 곧 이목 님이 와서 널 없앨 테니까.”
보목의 결연한 목소리에 금돼지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보목을 내려다봤다.
“이목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이상하구나. 뭐, 어찌 됐든 짐의 황후가 되려면 절차를 거쳐야 하니 얌전히 있어라.”
금돼지는 빳빳이 버티는 보목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잡고 중앙의 호수 앞으로 끌고 갔다.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물결 위로 금돼지가 비치면서 호수가 한층 밝은 빛을 냈다.
- 작가의말
많이 모자란 글이라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선호작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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