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자(3)

“두 분은 여의주를 고칠 목적으로 덕을 쌓는 중이라고 들었어요. 앞으로 산림과 관련된 업무는 국장 재량으로 출장으로 처리해 드리고, 필요하다면 비공식적으로 정리된 신령의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또한 업무 처리에서도 최대한 자율적 권한을 드릴 생각입니다.”
대의를 위한 명분으로 포장된 제안이었지만, 뜯어보면 서로의 이득을 위한 거래였다.
지금 나온 조건이 정 국장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특혜라는 것을 보목도 알고 있었다.
이목에게서 벗어나려면 애석하게도 덕을 쌓아야 했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일단 해볼게요. 그런데 정감록이 대체 뭐고, 어디에 있는 거죠?”
보목의 결정을 확인한 동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 화면에 계룡산 지도를 띄웠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팔도의 산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려 다닌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 소금장수가 그에게 ‘당신의 제사는 부정하여 산신들이 받지 않고, 새로운 나라는 아기장수의 손에 무너질 것이다.’라며 예언서 한 권을 건넸는데, 그게 바로 정감록(鄭鑑錄)의 원본이랍니다. 이후 다시 팔도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계룡산을 신도안(新都安)이라 부르며 계룡산신에게 호국백(護國伯)의 칭호와 정감록을 바쳤어요. 덕분에 오백 년간 계룡산에서 일어난 모든 반란은 진압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설화에 따르면, 정감록은 아직도 계룡산에 남아있을 거예요. 두 분께서는 계룡산신을 모시는 신원사로 가서 정감록을 찾아와 주세요.”
귀문(鬼門)이 열릴 축시(丑時)인 새벽 2시, 계룡산 연천봉 아래 자리한 등운암(騰雲庵)은 달빛만이 어둠 속에서 수백 년을 견뎌온 기와와 주변 숲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스님들의 기상이 한 시간 남았을 무렵, 깊어진 정적은 달빛에 외면받은 북동쪽 숲속에서부터 서서히 깨져갔다.
등산로가 아닌 숲과 암벽으로 이어진 험한 길을 뚫고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을 헤치고 달빛 아래로 나온 것은 금돼지를 죽였던 칼이었다.
손잡이 끝 둥근 고리에 오색실이 더해진 칼은 그날처럼 붉은 날을 빛내며 흉흉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 칼을 쥔 자는 부네탈을 쓴 여인이었다.
그녀는 암벽에 칼을 박아 흔적을 남기면서 천천히 등운암을 기어올랐다.
탈 아래 번뜩이는 눈빛은 짐승처럼 어둠을 꿰뚫었고, 그녀의 뒤를 따르는 장정들은 붉은 나무로 만든 초랭이탈을 쓰고 묵묵히 탁자와 보자기를 등에 지고 있었다.
암벽에 새겨진 칼자국을 밟으며 하나둘씩 줄지어 오르는 장정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검은 깃발을 좌우로 꽂아나갔다.
암자에 도달한 부네탈과 장정들은 암자 앞에 탁자를 펴고 제사 음식으로 마늘, 부추, 파, 달래, 생강을 정성스레 올렸다.
곧이어 등운암 주변으로 초와 횃불이 환하게 켜지면서 이질적인 기운이 암자를 휘감았다.
유난히 환하고 요란한 바깥 상황에 이상함을 느낀 암자의 주지스님은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초랭이탈을 쓴 장정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의 입과 손발을 묶었다.
부네탈을 쓴 여인이 방울을 흔들며 축문(祝文)을 읊조리자, 잠잠했던 숲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북동쪽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꽂혀있던 검은 깃발들이 일제히 절을 향해 펄럭였다.
봄바람이라기에는 이상하리만치 차가운 바람에 오싹함을 느낀 암자의 주지스님은 입이 묶인 채로 신음했으나,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의식이 진행될수록 거세지는 바람에 결국 촛불과 횃불이 꺼져 사방이 어둠에 휩싸이자 요란하던 방울 소리도 멎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부네탈이 칼을 들어 자기 팔을 그었다.
선명한 붉은 피가 제사상 위로 떨어졌고, 제물을 피로 물들인 그녀는 이내 암자에 올랐다.
암자에 오른 부네탈은 주지스님의 겁에 질린 얼굴을 마주한 채, 묶여있는 그의 볼을 피 묻은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피와 공포로 물든 그를 보며 부네탈은 품에서 금강저와 책 한 권을 꺼냈다.
피로 얼룩진 책의 표지에 ‘鄭鑑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책과 금강저를 주지스님의 품에 넣은 그녀는 불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계단을 오르듯 제단을 밟고 올라간 그녀는 불상을 끌어안으며 불상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가 오늘 찾아오겠네요. 제가 원한을 풀 힘을 줄 테니, 슬슬 손님맞이 할 준비를 하세요.”
암자가 갑자기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벽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부네탈을 쓴 여인은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제단 위 향로에 불도 붙이지 않은 향을 세 개 꽂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붉은 배꽃을 올린 뒤, 암자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암자를 담당하는 주지스님 외에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 암자에서, 이른 새벽부터 무당의 방울 소리가 들려온 것이 이상했던 신원사(新元寺)의 젊은 스님들이 기상 시간이 되기 전에 서둘러 암자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사상도 깃발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스님들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암자의 주지스님 안부를 확인하고자 암자의 문을 열자, 지독하게 비린 쇳내를 머금은 붉은 연기가 그들을 덮치듯 뿜어져 나왔다.
눈이 저리게 고약한 향에 코를 찔린 스님들은 연신 기침하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한참 후, 연기가 빠지고 나서야 암자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암자의 내부는 충격적일 정도로 처참했다.
불상을 두고 놓인 향로에는 타다 남은 향과 검게 타버린 꽃이 재가 되어 쌓여 있었고, 밧줄에서 풀려난 주지스님은 불상을 향해 기이한 자세로 절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등까지 바싹 꺾은채 눈과 귀, 그리고 입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그의 모습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처참할 지경이었다.
젊은 스님들이 일제히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계룡산 사방으로 메아리치는 그들의 비명에 맞춰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무당의 방울 소리, 그리고 서글픈 염불 소리까지 동시에 울려 퍼졌다.
난데없이 불길한 화음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스님들은 두려움에 빠져 신원사로 달려갔다.
그들은 신원사의 주지스님에게 암자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보목은 아침부터 이목과 함께 계룡산을 올랐다.
전날의 앙금이 가시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발걸음 소리,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나 새소리처럼 자연스럽게 나는 소리만이 주변에 들리니, 어색한 정적이 더욱 부각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나온 풍경만큼이나 보목의 불편함도 쌓여갔다.
보목은 길어지는 침묵에 먼저 말을 걸어볼지 고민했지만, 전날처럼 이목이 퉁명스럽게 대화를 끊어버릴까 싶어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상황은 이목이 감정적으로 행동한 탓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번만은 먼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의 사과나 설명을 듣고 싶었던 그녀는 이목을 곁눈질로 쳐다봤지만, 그의 무덤덤한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산을 계속 오르던 중, 멀리서 신원사의 사천왕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원사의 입구가 선명해질수록 고민을 거듭하던 보목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덕을 쌓아야 한다면서 매번 투덜거리시면, 대체 덕은 언제 쌓아서 여의주를 채우나요?”
빈정거리는 보목의 말투에 입꼬리가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보목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덕이라면 꾸준히 쌓지 않았느냐? 죽은 숲을 살리고, 사람을 해친 이들을 회개시키고, 잃어버린 물건과 사람을 찾아줬다. 하물며 귀한 영약으로 노인도 살린 것이 덕이 아니라면 무엇이 덕이겠느냐? 설마 일만 벌이고 수습은 나에게 떠넘기는 네가 쌓은 덕이라고 착각하는 게냐?”
냉랭해진 눈빛만큼이나 이목의 말투에서는 보목을 향한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다는 듯 다시 산을 오르려 했다.
그러나 이유를 몰라 마냥 억울하기만 했던 보목은 그가 발을 내딛기 전에 앞을 막아섰다.
“그때마다 힘으로 협박하거나 보상을 받았잖아요.”
“사사로이 생명을 해치던 이를 말로 회개시킬 수 있었다면 내가 부처를 했지, 신령을 했겠느냐? 그리고 은인에게 감사의 의미로 전하는 선물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몇 번이고 목숨을 구해준 내 체면을 깎으려 드는 자신부터 돌아보는 게 좋겠구나.”
원래 가벼운 심술로 끝내려 했던 보목은 사소한 말 하나도 지지 않으려는 이목의 태도에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자기를 두고 다시 산을 오르는 이목의 등 뒤로 목소리를 높였다.
“어제도 그래서 화내신 거예요? 제가 고마워하지 않아서요? 애초에 평범하게 살던 제 인생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꼬였는데요!”
울분을 담은 보목의 외침에 이목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표정에는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속에 깃든 감정이 불쾌감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내 탓이라는 게냐?”
이목의 질문이 다소 뻔뻔하게 느껴진 보목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그녀에게 이목이 다가와 몸을 낮추고 눈높이를 맞췄다.
평소보다 더 반항적인 시선으로 무언가 말하려던 보목을 이목은 단호하게 끊어냈다.
“아니, 틀렸다. 이번 생도, 저번 생도 언제나 시작은 너였다.”
명백히 적의를 담은 이목의 말에 보목은 다시 억울함을 토로하려 했지만, 계단 위쪽에서 목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며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계단 끝에는 두꺼운 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사천왕문이 우뚝 서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남성이 문을 두드리며 어눌한 말투로 외치고 있었다.
“스님, 문을 열어주세요. 오늘 물건을 내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들여보내 주지도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원래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할 절의 문은 오늘따라 굳게 닫혀 있었다.
남성의 목소리는 특유의 억양과 발음에서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의 절박한 외침에 묵직한 사천왕문 너머에서 젊은 스님의 대답이 들려왔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사정이 있어 출입이 어렵다고 일찍이 연락을 드리고 사죄를 드렸는데, 이리 찾아오셔 생떼를 부리시다니요. 상황이 정리되면 다시 연락을 드릴 테니, 이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젊은 스님은 차분한 어조로 사과했지만. 확고한 거부 의사가 담겨 있었다.
양복 남성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가더니, 더욱 다급히 외쳤다.
“수개월 전부터 오늘만을 기다렸습니다. 주지스님께서도 불상 한 점으로 조선의 문화재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 모두가 만족하리라 기뻐하셨는데, 당일에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고 문까지 걸어 잠그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박하던 양복 차림의 남성은 억울한 심정이 점차 변해갔다.
분노를 억누르듯 격앙된 그의 말투는 어느새 명확한 해명을 요구했다.
사천왕문을 사이에 두고 양복 차림의 남성과 젊은 스님 간의 신경전이 팽팽해지던 그때,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어냈다.
“멀리서 온 손님을 얼굴도 보지 않고 대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이제 그만 대문을 열어주시지요.”
연륜이 묻어나는 몇 마디에 무겁게 잠긴 빗장이 둔탁하게 울리고, 사천왕문은 마치 수면에 띄운 나뭇잎이 바람에 밀리듯 가볍게 좌우로 열렸다.
문틈 사이로 회색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친 주지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 작가의말
아직도 모기가 있네요.
다들 물리지 않게 조심하시고 추천과 선호작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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