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자(5)
“승낙해라. 본디 마고할미가 보살피던 산을, 고작 인간 출신의 신령이 대신 맡고 있는 처지다. 하물며 공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힘이 여러 곳으로 분산된 산신이 귀불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원래 이곳에 있어야 할 정감록과 산신도를 훔친 자가 이번 사건과 연관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으냐?”
이목이 던진 추측에 여전히 산신도를 바라보고 있던 계룡산신이 시선을 돌려 보목과 눈을 맞췄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이목의 말에 동의했다.
깊은 고민 끝에 보목은 주지스님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녁 전까지 준비를 마쳐 오늘 밤 중악단에서 묵으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소박한 자리지만, 귀한 손님을 모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낯빛이 한결 밝아진 주지스님은 짧게 염불을 외우고는 몇몇 스님들에게 중악단에 보목이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깨끗한 요와 이불이 바닥에 깔리고, 작은 탁자 위에는 차와 간단한 간식이 준비되었다.
보목이 침구를 하나 더 요청하자, 주지스님은 의아해하면서도 군말 없이 하나를 더 가져와 주었다.
저녁 공양을 마친 절의 정적을 깨는 금속제 종소리와 염불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종소리는 명료했지만, 서글프고 애절한 염불이 뒤에 더해지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리가 메아리치는 착각을 일으켰다.
절이 순식간에 어수선해지자, 중악단에서 쉬던 보목도 놀라 이목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낮에 봤던 계룡산신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걱정이 어린 표정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계룡산신의 떨리는 눈에서 깊은 염려가 전해졌다.
보목은 멈칫했으나, 이목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는 책임감에 발걸음을 다시 밖으로 내디뎠다.
사찰 밖에서 올려본 하늘은 검은 먹구름으로 빼곡히 덮여 달이 가려져 있었다.
달빛이 사라진 계룡산은 어둠 속에 잠겼고, 젊은 스님들은 신원사의 희미한 등불에 의지해 술렁였다.
몇몇 노승들만이 불길한 기운에 대항하듯 가부좌를 틀고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혼란 속에서 이목은 주변을 살피다, 연천봉 아래의 암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선의 태조가 계룡산을 신도안이라 부르고 명당이라 칭송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나. 처음부터 칭송이 아니라, 이곳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한 방책이었던 게다. 특히 저곳은 기운이 막히다 못해 곪아 썩어가고 있구나.”
이목이 가리킨 암자는 조선 말기에 왕실이 예언 속 정도령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압정사(壓鄭寺)’라 불렀던 등운암(騰雲庵)이었다.
그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이목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고, 보목도 그의 뒤를 바삐 따랐다.
달빛 하나 없는 어두운 산길에서 보목은 이목의 발걸음에 뒤처지지 않으려 숨을 고르며 최선을 다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이 가팔라질수록, 발밑의 돌들이 늘어나고 울리는 종과 염불 소리에 올빼미와 같은 야행성 조류의 울음이 뒤섞였다.
소리에 비례해서 보목의 두려움도 덩달아 커졌다.
연천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이르자,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소리의 끝에는 3층 석탑이 있었고, 그 옆으로 등운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등운암에 가까워질수록 강렬해진 소리는 마치 귀를 파고들어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 보목이 석탑 뒤로 다가가던 중, 발소리와 함께 수상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따라가자, 그림자는 어느 순간 멈춰 서더니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림자가 먼저 달려들기 직전, 이목이 재빨리 그림자를 제압해 바닥에 넘어뜨렸다.
넘어지며 그는 능숙한 일본어로 다급히 무언가를 외치다가. 이내 어눌한 한국어로 사죄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보목은 낮에 봤던 남자를 떠올리고 급히 이목을 말렸다.
“잠깐만요. 이 사람, 오늘 낮에 봤던 사람이에요.”
수상한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낮에 본 양복 남성이었다.
이목의 손에서 풀려난 그는 후들거리는 팔다리로 겨우 몸을 일으키며, 이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빠르게 깜빡이는 그의 눈은 이목의 냉랭한 눈빛과 그가 입고 있는 복장을 살피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겁내지 마세요, 보기에는 이래도 귀신이 아니라 신령이에요. 그보다, 왜 지금 여기 계신 거죠? 단순히 궁금해서 왔다는 변명 말고, 진짜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보목은 이번 사건에서 가장 수상하게 느껴지는 그를 차분하게 추궁했다.
양복 남성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굳게 다물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보목은 당황했고, 이목은 그를 예의주시했다.
흥건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그는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않다가,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문을 열었다.
그의 눈은 더는 깜빡이지 않았고,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했다.
“제 이름은 하야시 쇼우지(林翔慈)입니다. 그리고 제 조부의 이름은 하야시 세이조(林省三)로 일본제국 시절, 그러니까 조선에서 강제노역을 통해 안면송이라는 적송(赤松)의 송진을 채취해 태평양전쟁에 송탄유(松炭油)를 제공했던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요란하게 울리던 종과 염불 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싸늘해진 밤공기 속에서 다시 고개 숙인 하야시의 고백만이 무겁게 이어졌다.
“조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가문의 죄를 청산하려면 조선의 등운암에 숨겨둔 신불(神佛)을 일본으로 모셔 와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조부께서 모은 조선의 유물들과 신불을 교환하기 위해 이리 찾아왔습니다.”
하야시의 말이 끝나고 이목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보목은 충격에 말문이 막혔다.
싸늘한 밤공기가 내려앉은 가운데, 그녀의 일자로 앙다문 입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니까, 절에서 거절당하자 공양을 핑계로 몰래 숨어들어 불상을 훔치려 했다는 말인가요?”
기가 차다는 듯 보목의 닫혀 있던 입가로 창백한 쓴웃음이 지어졌다.
하야시는 그녀의 직설적인 반응에 움츠러들며, 다시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떨렸다.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조부 이후 우리 가문이 누리던 번영과 안녕은 이미 모두 깨졌고, 여러 가지 불행도 잇따랐습니다. 지금 남은 가족들만이라도 지키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신불을 꼭 모셔가야만 합니다.”
석탑 아래에서 털어놓은 하야시의 간절한 고백은 깊은 밤공기를 무겁게 메아리쳤다.
그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목은 복잡한 심경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때, 등운암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며 잠잠했던 종과 염불 소리가 아까보다도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진 이목은 신속하게 등운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목을 따라 보목이 등운암 앞에 섰을 때, 열린 문 너머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가운데 놓인 불상이었다.
불상은 격렬하게 떨리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불상의 눈에서 흘러나온 피눈물은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제단 아래로 흘러내려 붉게 물들였다.
소름이 끼치는 광경에 보목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이목은 조용히 그녀의 옆에 서서 불상을 마주했다.
“저러니 이곳의 산신이 힘을 쓰지 못할 수밖에. 조심해라, 예사로운 귀불이 아니다.”
이목의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요란하던 종과 염불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정적 속에서 공기를 가르는 한마디 음성이 울려 퍼졌다.
‘흑운사(黑雲沙)’
달을 가렸던 검은 먹구름이 등운암을 중심에 두고 나선형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변을 느낀 산짐승들은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먹이를 찾던 올빼미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누구보다도 계룡산의 하늘과 가까워진 올빼미 머리로 검은 비가 내렸다.
검은 먹구름에서 내린 비에 맞은 올빼미는 공중에서 연기를 내뿜더니 그대로 추락했다.
이목은 급히 등운암 아래에 위치한 경천저수지의 물을 끌어 올려 장막을 만들어 모두를 감쌌다.
장막 밖으로 반쯤 타버린 올빼미 사체가 떨어지더니, 검은 비에 타들어 가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건 단순한 비가 아니다. 지옥의 모래를 어떻게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인간이 닿으면 저것처럼 골수까지 타버릴 게다.”
이목이 흔적만 남은 올빼미 사체를 가리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흑운사가 멈추면서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땅이 울부짖듯 진동하던 그때, 또다시 한마디 음성이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회하(灰河)’
음성을 들은 이목은 즉시 바닥에 구름 같은 연기를 두껍게 깔아 모두를 공중에 띄웠다.
그 직후, 울부짖던 땅이 갈라지면서 회색의 잿물이 온천처럼 솟구쳐 올랐다.
잿물은 곧 호수를 이뤄 끓어오르며 거품을 토해냈다.
이어서 날이 선 쇠가시들이 바닥 곳곳에서 솟아나 숲을 이루고, 그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개들의 소리와 까마귀의 울음이 크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지옥 같은 풍경으로 변한 주변에 보목과 하야시는 넋을 잃은 채 굳어 있었다.
“이 밖으로 나가지 마라. 만약 나간다면 나도 너를 지킬 수 없을 게다.”
어느 때보다 굳은 표정의 이목은 보목을 향해 강하게 경고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보목을 두고 혼자서 장막을 벗어났다.
그가 장막에서 나오니, 종소리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격해졌다.
‘도산(刀山)’
숲처럼 솟아있던 쇠가시들이 산처럼 높이 자라나더니, 서로 얽히며 칼날을 닮은 나뭇잎 모양의 가지들이 뻗어 나갔다.
그렇게 쇠로 이뤄진 나무들이 하나씩 늘어나 쌓여가더니, 산을 이루었다.
“고작 불상 주제에 재주가 제법 요란하구나.”
양팔에 비늘을 드러낸 이목은 주변의 위협적인 풍경에는 관심을 주지 않고, 오직 등운암에 안치된 불상을 향해 직선으로 돌진했다.
그가 주저 없이 암자 안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검엽(劍葉)’이라는 음성과 함께 쇠 나무의 날카로운 잎들이 그를 덮쳤다.
옆으로 날아간 이목은 비늘로 몸을 보호했기에 옷자락이 찢긴 것을 제외하면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짙은 불쾌감이 서렸다.
곧바로 경천저수지에서 물을 더 끌어온 이목은 커다란 고드름 창을 만들어 불상을 향해 던졌다.
고드름 창이 불상에게로 빠르게 날아가는 상황에서 종소리와 음성이 울렸다.
‘화탕(火湯)’
끓어오르던 잿물이 거세게 솟구치면서 고드름을 집어삼켰다. 잿물은 순식간에 고드름을 녹이고, 그 여세를 몰아 이목까지 덮치려 했다.
이목은 다급히 보목 주변에 둘러놨던 장막의 일부와 저수지의 물을 끌어와 맞부딪혔다.
끓어오른 잿물과 차가운 물이 충돌하면서 뜨거운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와 동시에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주변이 뜨거운 습기로 가득한 가운데, 물기둥을 유지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이목의 귀에 불길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한빙(寒氷)’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면서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잿물과 물기둥, 그리고 공중에 퍼져있던 수증기마저 얼어붙어 무너져 내렸다.
얼음공예처럼 모든 물이 얼어 떨어지는 상황에서 물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던 보목과 하야시 주변의 장막도 유리 파편처럼 바닥으로 흩어졌다.
무방비해진 보목과 하야시를 향해 이목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한마디 음성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오차(五叉)’
이목이 뭔가 해볼 겨를도 없이, 다섯 개의 붉게 달궈진 금강저가 보목에게 날아들었다.
- 작가의말
언젠가는 빛을 보리라 믿고 적어보겠습니다.
추천과 선호작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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