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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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다섯별
작품등록일 :
2024.10.01 10:51
최근연재일 :
2024.11.0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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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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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자(7)

DUMMY

모두가 숨죽여 살아가는 힘든 시기, 조선의 소나무와 송진을 착취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하야시 세이조(林省三)는 오랜 시간 화족과 정치인과의 관계를 강화할 목적으로 밀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욕심은 뒤틀린 방향으로 불어나 결국 식민지인 조선의 영기가 서린 계룡산과 고승을 이용해 ‘즉신불’을 만들겠다는 참혹한 계획을 세웠다.


절의 주지였던 나는 하야시 세이조에게 고용된 자들에게 밤중에 납치되어 깊고 어두운 동굴 안에 가부좌를 틀린 채 고정되었다.

고립된 그곳에서 초반에는 음식과 물이 주어졌지만, 그 양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언제부턴가 오직 견과류와 솔잎, 그리고 옻나무 수액만으로 연명해 갔다.


그렇게 3년, 6년이 흘렀고, 의식이 희미해져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여러 발소리가 들리고 동굴 안에 수많은 촛불이 밝혀졌다.

동굴을 가득 메운 촛불은 눈이 부시게 밝았고, 곧이어 내게 마지막 남은 수분과 공기마저 앗아갔다.

내가 살아있는지, 아니면 이미 원혼이 되어 떠도는지조차 모를 마지막 순간, 하야시 세이조의 들뜬 목소리로 들려왔다.

“망해가는 조선에 이토록 큰 스님이 나와 성불했으니, 조선인도 머지않아 우리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함께 누리리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동굴보다 좁은 석탑 안에 마니륜과 밀교의 각종 법구와 같이 봉해졌다. -


그런데 지금 즉신불 앞에 원수인 하야시 세이조와 똑 닮은 그의 손자가 있었다.

즉신불은 하야시의 목을 움켜쥔 손에 온 힘을 쏟아냈다. 고통과 억울함이 메마른 그의 영혼을 옥죄었다.

평생의 수련을 아득히 뛰어넘은 분노와 원한이 숯처럼 검게 탄 그의 얇은 팔에 스며들어 결실을 보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거칠면서도 따스한 손길이 그의 팔을 상냥하게 감쌌다.


남성이라기에는 부드럽고, 평범한 여성이기에는 투박한 그 손길은 오로지 즉신불만이 느낄 수 있는 아련한 감각이었다.

산에서 나물을 채집하며 수행하던 세월이 주름과 상처로 깃들어 있는 손길에 그의 원한 어린 팔은 서서히 진정되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잊지 못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라 즉신불의 마음을 스쳤고, 타버린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오직 원한과 분노만이 나를 이곳에 묶어두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가장 무거운 미련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구나. 출가자(出家者)로서는 결코 가져서는 안 될 연정이 나에게 있었음을 부족한 나는 지금에서야 깨닫는구나.”

수십 년 간의 고통과 외로움, 분노가 흐르는 눈물에 씻겨가듯 즉신불의 얼굴로 오랜만에 평온이 찾아왔다.

졸렸던 목이 풀리고 연신 기침을 내뱉던 하야시는 즉신불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제 조부의 끔찍한 행위로 당신이 겪은 고통을 저는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야 알게 된 진실이 너무나 부끄럽고 후회스럽습니다. 제 가문이 지은 죄, 그리고 저의 어리석음이 저지른 결례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얼마나 걸리더라도 제 남은 삶을 속죄에 바칠 테니, 부디 제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두 주먹을 꽉 쥐어 핏줄을 드러난 손등과 유난히 작게 웅크린 어깨가 하야시의 마음을 드러냈다.

연이어 사죄하는 그를 즉신불은 묵묵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의 진심은 이미 내게 닿았다. 이제는 네 조부로 인해 벌어진 이 모든 고통의 연쇄를 끊을 시간이 왔구나. 하야시 세이조의 손자, 하야시 쇼우지여. 네 가족을 위해 내 마지막 경고이자 가르침을 받아들이길 바란다.”

어느새 부드러워진 눈길을 보내는 즉신불의 고요한 목소리에 하야시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내가 사라지면 내 사리를 가져가거라. 그것이 네 가문의 죄를 청산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될 게다. 나를 찾아와 진심으로 사죄해 주어서 고맙구나.”

즉신불의 말에 하야시는 잠시 눈을 감았다.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감정에 하야시의 두 손이 떨렸다.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든 그의 눈빛에는 결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일본으로 돌아가 반드시 가문의 죄를 청산하고, 남은 삶을 속죄에 바치겠습니다.”

더는 증오나 원망이 아닌, 생전의 자비를 담은 즉신불은 하야시에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결의를 지지했다.

그리고는 보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난 그대가 어째서 부처가 되기를 포기하고 이곳에 남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나은 그대가 선택한 길이니,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겠죠. 부디 이번 생에는 모든 미련을 풀고 평안을 찾기를 바랍니다.”

한때는 보목의 존재를 불경이라고 외치던 즉신불은 지금은 그녀에게 깊은 공감과 존경을 보내고 있었다.

금돼지, 이목 그리고 이제는 즉신불까지. 이들이 언급한 인물을 보목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즉신불의 눈을 바라보며 고맙다고만 말했다.

즉신불은 잠깐의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다음 생에는 나도 당신이 봤던 풍경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온화한 목소리에 숨어있는 두려움을 느낀 보목은 즉신불이 말하는 ‘풍경’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을 가다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언젠가 분명, 같은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을 거예요.”

확신에 차 웃는 보목에게서 가장 바라던 무언의 약속을 확인한 즉신불은 깊은 안도에 젖었다.

그는 합장을 대신해 고개를 살며시 숙여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 마지막으로 이목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승에서의 미련도 결국 서로의 여정에서 중요한 부분이겠지요. 그러니 과거의 고통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여기시길 바랍니다.”

즉신불의 조언에 이목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약간의 비웃음을 담아 대꾸했다.

“방금까지 악귀였던 주제에, 이제는 부처 행세를 하는구나.”

“용인 당신에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죠. 그러나 부디 소승의 말을 잊지 마세요. 때로는 보여도 허상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아도 실체일 수도 있다는 것을요.”

이목의 공격적인 태도에도 즉신불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더는 남길 말이 없던 그는 오랜 집착을 내려놓고, 온전한 죽음을 갈망하며 이목에게 마지막 요청을 전했다.

“이제는 그만 보내주시겠습니까?”

즉신불의 부탁에 이목이 주위를 물리고 금강저를 내밀었다.

이제는 검게 그을린 금강저가 즉신불을 겨냥했으나, 그는 무척이나 평온한 눈으로 이목을 바라볼 뿐이었다.

곧이어 금강저의 끝에서 섬광이 번쩍이며 하늘로부터 번개가 내리쳤고, 즉신불의 실루엣이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

그 안에서 즉신불은 떨어져 나가는 팔로 최후의 합장을 올리며 고요하게 사라져갔다.


모든 것이 잠잠해진 자리에는 그을린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즉신불이 있던 자리에는 검게 그을린 재가 아닌, 순백의 하얀 재가 남아 있었다.

곧이어 이목의 손에 들려 있던 금강저도 잿더미가 되어 손에서 흩어졌다.

잠잠해진 밤에 살며시 불어온 바람을 타고 검은 재와 하얀 재가 하늘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재에서는 노린내 대신 침향목을 태운 듯 그윽한 향이 감돌았다.


그로부터 숨 막히는 적막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즉신불은 홀로 흑암지옥을 걷고 있었다.

육도윤회의 심판을 받기에 앞서 생전의 업보를 따라 어둠을 헤매야 하는 이 외로운 지옥에서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리던 여인이 살며시 다가와 발을 맞췄다.

살아생전 그랬듯이 두 사람은 대화도, 포옹도 없이 그저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묵묵히 걸었다.

전혀 부부 같지 않은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믿으며 어둡고 긴 여정을 나란히 ‘함께’ 걸어갔다.


한편, 하얀 재가 날아간 자리에 남아있던 것은 자수정과 닮은 빛을 내는 아름다운 사리였다.

이목은 그것을 경귀석(警鬼石)과 닮았다고 설명했다.

‘집에 두면 잡귀는 쫓아주겠지.’하고 이목이 말할 때, 사리 근처에서 타버린 정감록이 발견되었다.

보목은 그제야 원래 목적이 떠올라, 아쉬운 대로 정감록의 일부라도 챙겨 신원사로 돌아갔다.


보목을 따라 신원사로 돌아와 주지스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하룻밤 신세를 진 하야시는 날이 밝고, 가져왔던 조선의 문화재를 모두 신원사에 기증했다.

“이 모든 것들은 저와 제 가문이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나마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증하는 겁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이유를 몰랐던 주지스님은 당황했지만, 전날의 일을 듣고는 하야시의 사죄가 진심이라는 사실에 오히려 고마워하면서 기증을 받아들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하야시는 편안한 얼굴로 주지스님과 보목, 이목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즉신불이 남긴 사리를 품에 안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찍 길을 나섰다.


훈훈한 작별을 마치고 전날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등운암을 오른 주지스님은 파괴된 등운암의 잔해를 멍하니 굳었다.

예상을 넘어선 훼손 현장에 선조에 대한 깊은 좌절감으로 머리를 감싸던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사건을 해결해 주고도 어쩐지 눈치를 보게 된 보목이 주지스님에게 다가가자, 그는 곧 미소를 지으며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신원사를 대표해 두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만약 두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운 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주지스님은 여전히 이목을 보지 못하지만, 전날의 사정을 듣고 허공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에 보목이 용기를 냈다.

“주지스님, 말씀드렸던 대로 이번 사건 해결에는 계룡산신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중악단의 산신도를 다시 그려주실 분을 찾아봐도 될까요?”

엄연히 귀불과 관련된 피해가 아니었지만, 이번 일로 인해 피해를 본 주지스님에게 신령이 깃들 산신도를 다시 그리게 허락해 달라는 부탁을 드려도 되는지 보목은 고민했다.

주지스님은 망설이는 듯하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보목이 깊은 생각 끝에 꺼낸 요청이라, 그도 이것이 절을 위한 선택이라 느꼈다.

“은인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게다가 산신도는 신원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일로 원래 그림을 잃은 것이 더 안타까웠는데, 새로 그려 주실 분을 찾아주신다면 저희는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요. 필요하시면 저희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안도의 미소가 떠오른 보목은 주지스님의 승낙을 받자마자 중악단으로 향했다.

대전으로 돌아갈 준비와 계룡산신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중악단 본전에 도착한 보목은 희미해진 몸으로 산신도를 보고 있는 계룡산신에게 다가갔다.

“주지스님께서 새로운 산신도를 그리는 것을 허락하셨어요. 원래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다시 그려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잠겨있던 슬픔이 풀리듯 계룡산신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자 보목은 감사를 전하려 살짝 몸을 기울였다.

“어제 일은 정말 감사드려요. 절대 잊지 않을게요.”

계룡산신은 가만히 보목의 어깨를 토닥였다.

중악단을 떠나면서 산신도를 그릴 화가를 구해온다고 다짐하는 보목에게 계룡산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손을 흔들어 작별의 인사를 전했다.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보목의 뒷모습을 계룡산신은 아쉬운 듯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작가의말

다음화는 계룡산신이 보목을 보호한 이유와 관련된 설화를 알려주고 에피소드를 끝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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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아름다운 그림(4) 24.10.31 15 0 12쪽
31 아름다운 그림(3) 24.10.30 20 0 12쪽
30 아름다운 그림(2) 24.10.29 18 0 12쪽
29 세상을 바꾸는 자(8)~아름다운 그림(1) 24.10.28 18 0 12쪽
» 세상을 바꾸는 자(7) 24.10.27 18 0 12쪽
27 세상을 바꾸는 자(6) 24.10.26 17 0 11쪽
26 세상을 바꾸는 자(5) 24.10.25 18 0 12쪽
25 세상을 바꾸는 자(4) 24.10.24 24 0 12쪽
24 세상을 바꾸는 자(3) 24.10.23 24 0 12쪽
23 세상을 바꾸는 자(2) 24.10.22 2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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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드러난 탐욕(4) 24.10.19 33 0 12쪽
19 드러난 탐욕(3) 24.10.18 27 0 11쪽
18 드러난 탐욕(2) 24.10.17 30 0 12쪽
17 흘려버린 추억(6)~드러난 탐욕(1) 24.10.16 2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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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흘려버린 추억(4) 24.10.14 3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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