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그림(3)
낮은 굽의 남색 샌들을 신고도 여성치고는 큰 키였던 보목조차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큰 키의 남성은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실례예요.”
불쾌감이 가득 묻어나는 한마디를 내뱉으며 남성은 보목을 가로지르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위협적인 행동에 보목은 잠깐 긴장했지만, 그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다급히 뒤쫓았다.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걸음을 멈춘 남성이 인상 찌푸리며 몸을 돌리더니, 보목을 쏘아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갈라졌다.
“실례라고 했잖아요. 사이비 종교면 다른 사람이나 알아봐요.”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단지 장승요라는 사람을 아는지 물으러 온 거예요.”
남성의 매서운 눈초리에도 보목은 그가 장승요의 제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꿋꿋이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지켜보던 이목이 조용히 다가와 남성의 턱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이목의 붉은 눈이 사납게 빛나며 남성을 노려보았다.
뱀이 몸을 기듯 서늘하게 뻗어 나오는 이목의 목소리에는 섬뜩한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네놈이 왜 그곳에 갔는지를 말해라.”
사로잡힌 남성의 눈동자가 깊은 핏빛 호수에 빨려 들어가듯 기이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저항하려던 그의 입술은 경련을 일으키며 떨렸고, 마침내 맥없이 비밀을 토해냈다.
“나는 그 여자가 왜 그렇게 잘나가는지 알고 싶어서 염탐하러 간 것뿐이야.”
마치 기계처럼 일정한 높낮이로 끊임없이 이어지던 남성의 설명은 갑자기 격한 감정으로 요동쳤다.
“그 여자는 대중에게 먹이를 던지는 가짜야. 자기만의 세계관과 개성을 가져야 할 예술의 세계에서 그저 트렌드만 따라가며 메이크업을 기성품처럼 추락시키는 녀석이 진짜 아티스트일 리 없잖아!”
고통스러워하며 격해지던 남성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붉은빛으로 물들었던 그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그는 힘없이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꿈에서 깬 것처럼 혼란스러워하던 남성은 보목과 이목을 번갈아 보더니, 기겁하며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엉기적거리면서 도망쳤다.
그를 바라보던 보목에게 이목이 냉정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다시 찾으러 가야겠구나, 돌아가자.”
보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목을 따라 발걸음을 돌렸다.
급하게 퍼스트 가든으로 돌아온 보목과 이목은 이미 행사가 끝나 대부분의 사람이 돌아간 조용한 공간에 들어섰다.
무대 위의 조명은 꺼져 있었고, 조금 전까지 환호와 박수 소리로 가득했던 자리는 이제 빈 의자와 청소하는 몇 명의 스태프들만이 남아 있었다.
보목은 고요해진 행사장 주변을 둘러보면서 잘못된 판단으로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느린 걸음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보목의 등 뒤로 파란색과 자주색, 하늘색이 볼륨감 있게 층을 이룬 치마 아래로 깔끔한 흰색 운동화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이제 시간 많지? 나랑 대화 좀 할까?”
의기양양한 목소리와 함께 달려온 것은 달귀였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비율이 좋아 키가 더 커 보였지만, 실제로는 평균이 약간 넘는 키에 가녀린 체격이었다.
예상치 못한 달귀의 등장과 반말에 보목은 아까의 무례한 행동을 떠올리고 서둘러 사과했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급한 일이 있어서 그만 예의 없이 행동했어요.”
보목의 사과에 달귀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과를 마친 보목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달귀가 유난히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재빠르게 앞을 가로막았다.
“아까 너희를 미행시킨 직원에게 들었어. 너희, 장승요 화공의 제자를 찾고 있다며? 진작 말하지. 내가 바로 너희가 찾던 장승요 화공의 유일한 제자이자, 수제자야.”
달귀의 선언에 보목은 경악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편, 이목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달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달귀가 당당히 맞받아치자, 이목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보목은 다시 한 번 놀라며 그제야 그녀의 말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왜 의심하는 건데? 대충 봐도 예술적 감각이 흘러넘치잖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보목의 반응에 달귀는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믿기 어렵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이목은 여전히 냉담한 눈빛으로 그녀의 예술성을 찾으려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옆에 있던 보목이 지금의 상황을 조금 난처해했다.
“죄송해요. 설화에서 청년이라고 해서 분명히 남자일 거로 생각했어요.”
“남자라니, 내가 남자일 리가 없잖아.”
달귀는 마치 증명이라고 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여 자신의 미모를 과시했다.
다소 뻔뻔하지만 부정하지 못할 그녀의 모습에, 보목은 어째서 그녀가 설화에서는 청년으로 기록되었는지 의아했다.
“저기, 혹시 조선시대 때 한양에서 지내면서 충청북도 제천에 사는 가난한 친구를 도와주신 적 있으세요?”
“글쎄, 당시 나한테 제천에 있을 친구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으로 시작한 달귀는 말끝이 흐려지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얼굴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침묵한 그녀를 바라보며 보목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설화는 진짜였나 보네요. 그런데 왜 청년으로 기록됐을까요?”
“그 설화 나오는 애는 아마 내가 아닐 거야······”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달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를 둘러싼 오랜 오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걔는 내가 조선에 관광 왔을 때 자기를 김생원이라 소개하면서 붓을 보여 달라기에 보여줬더니, 그대로 들고 도망친 도둑놈이야. 그놈 때문에 즐기러 온 관광이 졸지에 강제 이민으로 바뀌어 버렸다고! 그놈을 찾는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화장이 다 지워진 얼굴로 ‘김생원 아세요?’하고 묻고 다니다가 도깨비 취급 받은 걸 생각하면 아직도 분통이 터져. 걔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도깨비가 사람을 김서방이라 부른다고 오해하잖아. 그나마 붓을 되찾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수치스러워하며 내뱉은 달귀의 황당한 고백에 보목은 그저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건 듣고 있던 이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도둑은 장승요의 제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림을 살아 움직이게 한 거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는 보목에게 달귀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스승님의 붓은 평범한 붓이 아니야. ‘만물일색모필(萬物一色毛筆)’이라고 사용자가 기운과 의지만 충분히 담으면 어떤 상상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보물이지.”
자부심에 찬 달귀의 설명에도 여전히 긴가민가해하는 보목과 달리, 붓에 가치를 알고 있던 이목은 달귀의 말에 집중했다.
오래전 각 민족의 창세신들이 자기만의 민족과 정착지를 그리기 위해 돌려썼다는 창조의 붓. 산수화를 그리면 산과 물이 생겨나고, 짐승을 그리면 짐승이 태어나며, 심지어 신과 태양까지도 그릴 수 있었다고 전해지던 붓이었다.
이로 인해 과거 예(羿)가 아홉 개의 태양을 화살로 떨어트리기 전에는 열 개의 태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비록 세상을 창조한 대가로 창세신의 목숨까지 대가로 삼은 위험한 물건이지만, 미묘한 빛으로 일렁인 이목의 붉은 눈동자는 달귀에게 고정되었다.
“사용하기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는 붓이라면, 네가 가지기에는 과분하구나.”
마치 달귀의 자격을 시험하려는 듯 이목의 눈이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
그 눈빛에 자기의 부족함을 직시한 달귀는 인정하듯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이니까 부정은 안 할게. 하지만 분명히 스승님께서 내게 넘겨주신 소중한 붓이야.”
“그런 귀한 붓을 어쩌다가 그렇게 쉽게 내주신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에도 보목은 신중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질문을 던졌다.
달귀의 하얀 얼굴이 붉어졌다.
당시 나이가 적지 않았으면서 고작 서른도 안 된 인간의 칭찬에 우쭐해져 붓을 내주었다는 걸, 한참 어린 보목에게 솔직히 털어놓기는 수치심이 앞섰다.
그녀는 달아오른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그런 달귀를 향해 이목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그냥 머리가 나쁜 게지. 별다른 이유가 있겠느냐?”
조롱 섞인 비난에 또 다른 수치심이 치밀어 오른 달귀는 말문이 막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주먹을 가만히 쥔 그녀의 손이 떨렸다.
상황이 더 나빠질까 봐 걱정한 보목은 다급히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래도 결국 되찾으셨잖아요. 그게 중요한 거죠, 안 그래요?”
달래려는 의도가 훤히 드러나는 말에 달귀는 보목을 보면서 잠시 과거를 되새겼다.
서서히 주먹이 풀린 달귀의 입가로 미소가 번지더니, 그녀의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맞아! 도둑놈 주제에 여기 파주 탑삭골에서 도사 행세하는 걸 내가 딱 잡았지.”
만족감으로 수치심이 날아간 달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복수심과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기분이 조금 풀렸다고 느낀 보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식으로 인사할게. 난 장승요 화공의 수제자, 본명은 가용(佳容)이야.”
“저는 류보목이에요. 그리고 저분은 이목이고요.”
기분이 조금 풀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가용(활동명‘달귀’)은 이목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아봤는지 그녀는 이목이 용이냐고 묻고는 스승님이 그렸던 용 말고 진짜 용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목을 바라보다가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찾은 이유는 뭐야?”
“저희는 지금 계룡산신님의 산신도를 새로 그려줄 화공을 찾고 있었어요.”
워낙 이목이 심기를 긁은 탓에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보목이 걱정하던 중 가용은 이제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산신도를 그릴 사람으로 뽑힌 거네?”
“네, 장승요 화공이 당대 최고의 화공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제자이신 가용 님도 분명 뛰어나 화공이라고 믿어요. 부탁드릴게요.”
간절한 의지가 담긴 보목의 눈을 본 가용은 미묘한 웃음을 띠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녀는 내심 보목이 했던 칭찬을 곱씹으면서 입꼬리를 실룩이다가 환하게 웃었다.
“좋아, 까짓것 산신도는 내가 그려줄게. 그런데 공짜는 아니야. 너구리 놈들한테 도둑맞은 내 붓을 찾아주면 보상으로 산신도를 그려줄게. 이게 조건이야.”
“······설마 또 도둑맞으셨어요?”
보목은 흔쾌한 승낙에 기뻐하다가, 마지막 조건을 듣고 황당해했다.
가용은 살짝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이목은 비웃었다.
“그러게, 내가 머리가 나쁘다지 않았느냐. 이제는 그걸 너구리한테까지 빼앗기다니.”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돼? 너희 나한테 부탁하려고 찾아왔잖아?”
자존심이 상한 가용은 이목을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감정의 절제라곤 없는 두 사람의 노골적인 의사소통에 보목은 혹시라도 산신도 부탁이 무산될까 싶어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알겠어요. 붓은 저희가 찾아올게요. 대신 산신도는 꼭 제대로 그려주셔야 해요.”
여전히 이목을 차갑게 노려보던 가용은 보목의 제안에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더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걱정하지 마. 너희가 붓만 찾아오면, 내가 가진 모든 실력을 다해 산신도를 그려줄 테니까.”
가용의 확고한 다짐에 보목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이목은 가용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가용은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보목에게만 미소를 보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호작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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