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그림(8)~하나뿐인 신물(1)

새하얀 백지 위로 7척(남북조시대의 1척=약 23cm)의 키와 가늘고 긴 팔다리, 백옥같이 하얀 피부와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이 완성되어 갔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얼굴을 그리려는 순간, 장승요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며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눈앞이 흐릿해지는 고통에서도 붓을 놓지 않으려던 그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달콤한 꽃향기와 머리를 감싸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장승요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보인 여인의 얼굴에 그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빌려준 여인은 매끄럽고 하얀 피부에 고운 턱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없는 달걀귀신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장승요는 서둘러 구석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내 그는 여인이 전날 자기가 완성하지 못한 그림 속 여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달걀귀신이었던 여인은 이목구비가 없어도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었다.
장승요는 몇 번이고 그녀의 얼굴을 그려주었으나, 지워지지 않는 그녀와는 다르게 얼굴만큼은 물에 닿기만 하면 지워져 버렸다.
창조주로서 책임을 느낀 장승요는 그녀를 내치지 못하고 함께 생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승요는 얼굴만 지워지는 이유를 찾기 전에 그녀와의 생활에 익숙해졌고, 그녀를 ‘달걀귀신’을 줄여 대충 ‘달귀’라고 부르며 제자로 삼았다.
520년, 양무제(梁武帝)가 즉위해 불교를 장려하면서 여러 사찰과 탑묘(塔廟)를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가 이어졌다.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부처님께 최고만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당대 최고의 화공인 장승요에게 여러 장식화와 불화를 맡겼다.
하루는 금릉(金陵: 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주지스님이 장승요에게 절 벽면에 용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전날 달귀와 술을 마시며 과음한 탓에 정신이 없던 장승요는 예비용 붓을 챙기는 것을 잊은 채 안락사에 도착하고 말았다.
당시 스님들은 황제를 등에 업고 위세를 떨쳤기에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장승요는 급한 김에 신비로운 붓을 들어 하늘로 솟아오르려는 두 마리의 용을 그려냈다.
꿈틀대는 몸통과 찬란한 비늘을 가진 한 쌍의 용은 여의주를 움켜쥔 억센 발톱을 가지고 서로 장난치듯 얽혀 당장이라도 구름을 헤치고 날아오를 듯이 생동감이 넘쳤다.
벽면을 채운 대단한 걸작에 지켜보던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던 주지스님은 문득 그림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아니, 왜 눈동자는 그리지 않으셨습니까?”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오.”
장승요의 태연한 답변에 사람들은 픽 웃었다. 주지스님을 포함한 모두는 그가 지나치게 오만하다고 여겼다.
주지스님은 장승요가 허세를 부려 부처님을 위한 벽화를 모욕한다고 생각해 얼굴을 굳혔다.
“그림을 완성하려면 용의 눈을 그려주셔야 하지 않겠소.”
장승요는 다음날 그리겠다고 물러나려 했으나, 주지스님은 이참에 그의 자만을 꺾고자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경꾼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다.
구경꾼 중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제아무리 잘 그리면 뭐 하나? 눈 없는 애꾸용인데, 화공도 그림도 덜떨어졌구나!”
장승요를 향한 조롱이 늘어가던 중, 변성기도 오지 않은 소년이 군중 사이에서 나와 장승요의 붓을 빼앗았다.
“그토록 원하신다면 제자인 제가 대신 그려드리겠으나, 이후에 벌어질 일은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군중에서 나온 소년은 남장을 한 달귀였다.
그녀는 주지스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여 확답을 요구했다.
“물론입니다.”
주지스님은 목소리를 높이는 달귀를 같잖다는 듯 웃었다.
다짐을 받아낸 달귀는 장승요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 한 마리의 눈에 눈동자를 가져다 댔다.
맑았던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며 어두워지자,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동시에 벽화 속 눈동자를 가진 용이 꿈틀거리면서 벽을 깨고 튀어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구름을 타고 사라지는 용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놀라 엉덩방아를 찧거나,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한 마리의 용만이 남은 부서진 벽 앞에 주저앉은 주지스님의 멍한 눈으로 겁에 질린 사람들이 보였다.
사찰의 벽화가 완성되던 것을 기대하고 찾아온 그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장승요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퍼져 양무제의 귀에까지 닿았다.
불심이 깊던 그는 장승요가 요사한 술법을 부려 안락사의 주지스님을 모욕하고, 부처님의 위한 벽화를 훼손했다며 분개했다.
“요사한 술법으로 백성을 현혹하고 부처님을 모욕한 죄인 장승요와 그의 제자를 잡아 오라!”
황명이 떨어지자, 황궐의 군사들이 즉시 움직여 장승요와 달귀를 체포하고 국문(鞠問)에 회부했다.
첫 국문이 끝난 저녁, 습기가 스며든 벽으로 쥐와 벌레만이 드나드는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장승요와 달귀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장승요는 비록 화공으로 이름났지만, 한때 우장군(右將軍)까지 지낸 무관이었다.
그러나 오직 미(美)를 추구해 생명을 얻은 달귀는 국문으로 남은 상처로 인한 고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장승요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겨워하는 달귀를 찬찬히 살폈다.
어떻게든 오늘을 넘긴다 해도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어떤 끔찍한 운명이 기다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옷자락 깊숙이 숨겨두었던 붓을 꺼내 들었다.
멀리서 감옥을 지키는 옥졸의 횃불이 아른거리는 감옥에서 장승요가 벽을 더듬었다.
어둠 속에서 장승요는 차갑고 울퉁불퉁한 감옥 벽을 더듬으며 한 줄씩 선을 그어 나갔다.
습기가 배어 고르지 못한 벽 위로도 그의 붓끝은 지나간 자리마다 정확한 선을 그어 선명한 형상을 만들어 갔다.
마지막 붓질이 끝나자, 벽이 들썩이더니 생명을 얻은 새가 벽을 깨고 튀어나왔다.
장승요는 곁에 쓰러진 달귀를 끌어안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힘없는 스승이라 미안하구나.”
달귀를 안은 장승요는 국문으로 망가진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그녀를 새의 등에 조심스레 눕혔다.
이어서 그가 몸을 싣자, 새는 힘찬 날갯짓으로 감옥을 벗어났다.
부서진 감옥 벽을 뒤로하고 하늘을 가르던 새의 날갯짓은 산둥성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태산의 옥황봉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차갑게 스며드는 밤공기 속에서 장승요는 달귀를 꼭 끌어안았다.
새벽노을이 산등성이에 붉은빛을 드리우는 순간, 장승요의 새는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그래, 가용(佳容)이 좋겠구나.”
하루 만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장승요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반대로 자기 무릎에 달귀를 눕히고 그녀가 깨어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달귀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앞에 비친 이는 그녀가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이자 감정을 가르쳐준 장승요였다.
그러나 그는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단번에 견딘 사람처럼 쇠약해져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 달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많이 힘들었는지, 그림이 거의 지워졌구나. 다시 그려줄 테니, 얼굴을 가까이 보여주렴.”
부드럽고 따스한 목소리였다.
장승요의 손길이 달귀의 눈가에서 눈물을 닦아내며, 이제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희미해진 달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조심스럽게 붓을 가져다 댔다.
“언제나 달귀라고만 부른 게 마음에 걸려서 네가 자는 동안 이름을 생각해 봤단다.”
그의 말투는 평소보다 애틋하고 세심했다.
사라져 가는 윤곽을 어루만지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붓끝은 노쇠한 손끝 따라 가끔 멈출 때마다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했다.
“가용(佳容). 아름다울 가(佳)에 얼굴 용(容).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란다.”
“······달걀귀신에게 아름다운 얼굴이라니, 저를 놀리는 건가요?”
거칠어진 숨소리와 옅어지는 웃음에서 가용은 장승요의 마지막을 직감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장승요는 그녀의 투정을 다정한 눈길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정성을 다해 그녀의 얼굴을 그려 나갔다.
붓이 닿는 곳마다 그의 마음을 담은 섬세한 선이 하나하나 진하게 새겨졌다.
“놀리는 게 아니다. 네가 그랬잖느냐? 내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그러니 내가 그린 네가 제일 아름답단다.”
더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입술로 확신을 담은 그는 붓을 움직여, 가용의 눈동자에는 생동감을, 입술에는 부드러움을, 피부에는 윤기를 불어넣었다.
“네가 특별했던 이유를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이제 내게 남은 것이 별로 없구나. 부디 이게 오래 남아주길 바란다.”
완성을 앞두고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던 장승요는 자기가 가진 모든 기술과 정성으로 그은 선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기 직전, 붓을 멈추었다.
그는 거의 남지 않은 힘을 짜내듯 조용히 말했다.
“가용아, 너는 내 생의 최고 걸작이란다.”
점 하나를 남겨두고, 마지막 선물이자 최고의 작품을 바라보던 장승요는 반쯤 감긴 눈으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점을 찍었다.
그림에서 온기와 생명력이 살아났고, 떨어진 붓이 바닥을 굴러 가용의 무릎에 걸려 멈췄다.
힘든 여정을 끝내고 드디어 쉼을 얻은 여행자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은 장승요를 두고, 가용은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며 소리 내어 울었다.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사랑하던 사람의 무덤을 자기 손으로 만든 가용은 그가 남긴 마지막 선물인 그의 마지막 작품을 날마다 바라보며 홀로 연습했다.
다른 그림은 그릴 수 없더라도, 언젠가 그의 혼이 모두 닳아도 세상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며 가용이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도 그리운 기억이었지만, 너무나 아픈 기억이기에 차마 붙들 수 없는 과거였다.
그녀는 차가운 밤공기를 쐬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 밖으로 나갔다.
깊어진 밤을 걷는 그녀의 등 뒤로 방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나뿐인 신물
경기도 양평군 청계산(淸溪山)에 태양광 패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바위가 깎이고, 나무와 무덤이 기계에 의해 파헤쳐졌다.
깊은 산중에 기계 소음이 진동하고 산새들이 지저귀던 중, 산 북쪽에서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낮에 울려 퍼지는 쓸쓸한 울부짖음에 산새들이 지저귐을 멈췄고, 맑았던 하늘에서는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예고 없이 내리는 비에 인부들이 작업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작업반장이 외쳤다.
“다들 일단 멈춰! 여우비라 금방 그칠 테니까. 잠깐 쉬었다가 다시 작업 들어가자고.”
반장의 명령에 인부들은 중장비 사이에 천막을 치고 비를 피했다.
비에 젖은 안전모를 털며 천막 아래로 장비를 챙겨 모인 그들은 갑작스러운 비와 여우의 울음을 두고 재수 없다는 듯 투덜거리며 비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하늘에는 먹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짙어지는 먹구름을 따라 가볍던 여우비는 점점 폭우로 변했고, 천둥소리가 산을 뒤덮었다.
심상치 않은 날씨에 인부들의 얼굴에 염려의 빛이 스치자, 반장이 고함을 질렀다.
“내일 다시 작업하기로 하고, 철수하게 간단한 장비만 챙겨!”
인부들은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중장비를 남겨둔 채 손에 들 수 있는 짐만 챙겨 천막을 나왔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목에 그들이 도달했을 때, 깎여있던 산의 경사면이 무너져 내렸다.
나무와 흙, 바위가 거칠게 뒤엉켜 중장비들을 해일처럼 휩쓸었다.
금속의 삐걱거림과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진흙더미에 파묻혀 빗속을 울렸다.
‘천막에서 늦게 나왔다면 죽었을 거야.’
벗겨진 산비탈에 흙더미와 뿌리가 뒤엉킨 혼란스러운 광경에 인부들은 하나같이 기도처럼 중얼거렸다.
곧이어 그들의 눈앞에 이 세상의 일로 보이지 않는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산사태가 일어난 지점을 중심으로 풀과 나무들이 일제히 핏빛으로 변해 시들어갔다.
음산하게 물든 풍경 속에 숨죽여 입만 뻐끔거리는 인부들의 귀로 오직 여우의 울음소리만이 서늘하게 들려왔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호작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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