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신물(3)
“지금이에요. 던져요!”
먼저 정신을 차린 청운이 외침이 귓가에 파고들자, 놀란 보목이 쥐고 있던 노란 병을 던졌다.
날아간 병은 허공에서 깨지더니, 병조각 사이로 울창한 가시덩굴이 폭발적으로 자라나 여우신령을 향해 뻗어갔다.
그 틈에 보목과 청운이 서둘러 도망쳤다.
그러나 가시덩굴이 닿기 직전, 여우신령의 꼬리에서 푸른 불꽃이 일더니, 덩굴보다 먼저 그녀의 몸을 휘감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타오르는 잿더미 속에서 여우신령은 보목의 도망치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필사적으로 숲을 가로질러 도망치던 보목과 청운은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여우신령의 발걸음은 그들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마침내 잡히기 직전, 보목이 푸른 병을 꺼내 힘껏 던졌다.
이번에는 병이 바닥에서 깨지면서 작은 물방울이 생겨나더니, 물줄기를 형성해 파도처럼 여우신령을 덮쳤다.
높이 치솟은 파도의 벽에 맞서, 꼬리를 넓게 펼친 여우신령을 중심으로 덩굴 때보다도 환한 불꽃의 꽃 한 송이가 만개해 그녀를 보호하고 물줄기를 모두 말려버렸다.
뿌연 수증기를 뚫고 여우신령이 걸어 나왔다.
“이제 잔재주는 모두 끝인 게냐?”
생채기 하나 없이 여유롭게 다가오는 여우신령에 마지막 남은 병을 쥔 보목의 손이 떨렸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녀에게로 여우신령이 도약했다.
재개된 추격전에서 손끝이 닿기 직전, 보목은 마지막 남은 붉은 병을 던졌다.
허공에서 깨진 병은 짙고 불길한 붉은 연기를 폭발적으로 뿜어내며 여우신령을 둘러쌌다.
처음에는 아무 효과도 없어 보이던 연기 속에서 여우신령의 눈동자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허공을 응시하며 일그러지는 얼굴로 비수처럼 깊이 박혀 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과거의 환영이 눈앞에 나타난 여우신령의 입가에 아릿한 고통이 스쳤다.
- 조선 14대 선조 때, 약관의 나이를 넘긴 이식(李植)은 매일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글을 배우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루는 배가 고팠던 이식은 품에 넣어둔 곶감을 꺼내 먹으며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때, 은사로 수놓은 소복에 은빛 머리를 한 아리따운 여인이 길을 막아섰다.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은 이식의 곶감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이봐, 허약한 몸으로 고개를 넘느라 힘들지? 괜찮다면 여기서 쉬었다 가도록 해.”
낯선 여인의 살가운 권유에 이식은 머뭇거렸다.
여인은 망설이는 그의 손을 잡고 등나무 그늘로 이끌었다. 마치 홀린 듯 자리에 앉은 이식에게 여인이 물었다.
“네가 들고 있는 하얀 가루가 묻은 그것은 무엇인데 그리 단내를 풍기느냐?”
“괜찮으시면 한 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이식이 곶감을 내밀자, 여인은 흥미로워하며 집어 들었다.
하얀 가루가 묻은 곶감을 코끝에 가져가 잠시 살핀 그녀는 이내 한입 베어 물었다.
“겉보기에는 볼품없어진 감이 그냥 먹는 것보다 맛나니 재미있구나.”
커진 눈으로 미소 짓는 여인의 모습에 이식은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평소 책상에 묶여 글공부에만 전념해 온 그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그날 이후, 이식은 늘 곶감을 두 개씩 준비해 글공부를 다녔다.
스스로를 산신령 후보라 칭하던 이상한 여인은 며칠에 한 번씩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나타나 이식과 곶감을 나눠 먹었다.
어느 날, 이식의 늦은 귀가를 염려한 아버지 이안성(李安性)이 그를 불러 물었다.
“요즘 밤늦게 돌아오는 일이 잦구나. 대감께서도 네가 항상 밤에 귀가한다고는 하셨지만, 최근에는 너무 늦더구나. 혹시 몰래 계집질이라도 하는 게냐?”
“가문의 이름을 짊어진 소자가 어찌 그런 짓을 하겠나이까. 그저 달빛을 벗 삼아 글을 다시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이안성은 아들의 말을 의심했으나, 이식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여겨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 후로 이식은 아버지의 의심을 피하고자 며칠 동안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제대로 자지 않고 무리하게 공부한 탓에 그의 얼굴은 핏기를 잃어가고 몸은 날로 쇠약해졌다.
하루는 제자의 이상을 알아차린 스승 정철이 그를 불러 자초지종을 묻자, 이식은 여인과의 만남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정철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눈을 부릅떴다.
“본디 여우는 요사스럽고 단것을 좋아한다고 하였으니, 그 여인은 아마 여우일 게다. 이대로 가다간 너만이 아니라, 너와 관련된 이들까지 해를 입을지 모른다.”
정철은 결연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옥과 은으로 장식된 단도와 종이에 싸인 물건을 올려놓았다.
그가 종이를 조심스레 풀자, 싸여있던 약재가 드러났다.
“늙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지지. 이건 온갖 약재로 특별히 제조된 남령초(南靈草)다. 남령초의 연기는 어떤 귀신과 요물이라도 맥없이 주저앉게 만드니. 이것으로 여우를 제압하고 단도로 여우의 단전을 세 번 찔러 여우구슬을 꺼내라. 네가 그 구슬을 삼켜야만 모든 일이 끝날 것이다.”
단호하고 흔들림 없는 정철의 눈빛이 이식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속으로 여인이 그럴 리 없다고 부정했지만, 스승의 진심 어린 걱정이 마음을 짓눌렀다.
혹여 가족에게 봉변을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자, 이식은 떨리는 손으로 단도와 약재를 곶감이 든 주머니 속에 챙겨 넣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글공부를 마치고 고개를 넘던 이식의 코끝에 꽃향기가 스쳤다.
향기가 나는 방향에서 달빛을 받아 머릿결을 빛내는 여인이 다가왔다.
스승에게 받은 주머니를 쥐고 머뭇거리는 이식에게 여인은 익숙하게 곶감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평소와 같은 그녀를 두고 이식의 머릿속에는 스승의 경고와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갔고, 그 끝자락에는 여인과 함께한 시간이 아른거렸다.
망설인 끝에서 이식은 주머니를 열어 곶감이 아닌 약재와 단도를 꺼내 보였다.
여인의 눈동자가 세로로 변하면서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러나 이식은 두려움 없이 여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내 비록 글재주밖에 없어 세상일에는 어두우나, 그대가 나를 해치려 했다면 진작 해할 수 있었다는 걸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오. 이건, 그대가 내게 보여준 신뢰에 대한 내 대답입니다.”
이식은 손에 든 단도로 종이를 찢어 남령초를 바닥에 흩뿌렸다.
약재가 흩어지며 특유의 향이 공기 중으로 퍼졌지만, 여인의 눈빛을 부드럽게 되돌린 것은 다름 아닌 이식의 진심이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그 밤을 보낸 뒤, 이식과 여인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달빛이 유난히 밝아 세상이 은빛으로 덮인 저녁이었다.
등나무 아래 앉아 달을 바라보는 여인을 이식이 옆에서 불렀다.
“그대의 이름을 생각해 왔습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이식이 오랫동안 품어 온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런 이식에게 여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게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은 필요치 않으니라.”
여인에게 이름은 사람과 달랐던 삶의 방식에서 허울에 불과했고, 그저 이식의 진심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이식은 여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아닙니다. 당신에게 꼭 불러주고 싶은 이름이 있습니다.”
여인은 이름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지만, 이식이 끈질기게 이름을 지어주려는 상황이 기특하면서도 즐거웠다.
그녀가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이름부터 말해 보겠느냐?”
“호난. 내가 그대를 생각하며 직접 지은 이름입니다.”
이식은 기쁜 마음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를 본 여인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장난스럽게 허공에 손가락으로 ‘狐(여우 호)’ 자를 적었다.
“이거 말이냐?”
이식은 고개를 저으며 여인의 손을 살며시 잡고, 그녀의 손바닥에 새로운 한자를 써 내려갔다.
‘好蘭’. 여인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피식 웃었다.
“단순하군. 너를 좋아해서 ‘호난(好蘭)’인가 보구나.”
난초가 고고한 선비를 상징하는 것을 알고 확신에 찬 여인의 말에 이식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내가 그대를 좋아해서 ‘호난(好蘭)’입니다.”
장난기가 가득한 이식의 눈빛과 말을 듣고, 여인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은 밤하늘 아래에서 담백한 애정을 나누며 서로의 존재를 느꼈다.
1610년, 광해군이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3월. 과거를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나기 전, 이식은 호난을 찾았다.
작별 인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그를 호난이 잡았다.
뒤돌아본 이식에게 그녀는 영롱한 구슬을 하나 내밀었다.
영롱한 자태로 주변을 밝히는 푸른 구슬을 보자마자 이식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왜 내게 주시오?”
“바보가 아니라 했으니, 내가 여우라는 사실은 진작 알았겠지? 이건 내 여우구슬이다.”
잠깐 이식의 시선이 구슬에 머물렀지만, 곧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호난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자기를 향하는 것을 확인한 호난이 피식 싱겁게 웃었다.
“내게 더는 산신령이 될 미련이 없다. 여우는 일생에 단, 하나의 짝을 맺는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 난 너와 백년해로(百年偕老)하고 싶다. 넌 어떠냐? 나와 함께 살겠느냐?”
이식은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마음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쳐 지나간 끝에 그의 발걸음이 호난에게로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온 이식이 호난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대와 함께라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나와 함께 삽시다, 호난.”
그날 밤, 호난은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그녀가 평범한 여인이 되어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날,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깊은 밤을 함께 보냈다.
여우구슬을 삼키고 하늘을 보면 하늘의 이치를,
땅을 보면 땅의 이치를,
사람을 보면 사람의 이치를 알게 된다는 호난의 충고대로 과거 시험을 치르기 직전, 이식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우구슬을 삼켰다.
그때, 감독관이 갑작스럽게 이식을 불렀다.
원래라면 하늘, 땅, 인간 순서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야 했을 그는 첫 번째로 감독관의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사람의 이치를 먼저 접하게 된 순간, 감독관의 눈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얽히고설켜 이식에게 스며들었다.
욕망, 기쁨, 불안, 슬픔, 분노를 바탕으로 사람의 본성, 인간관계의 복잡함, 사회에서 역할까지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이치를 꿰뚫는 깨달음이었다.
깨달음을 바탕으로 써 내린 이식의 답안지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이 녹아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높은 평가를 받아 급제할 수 있었다.
비록 하늘과 땅의 이치는 얻지 못했으나, 그는 4월에 생원이 되었고, 10월에는 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대간들은 그의 과거 시험을 부정 사건으로 상소를 올렸고, 그의 스승 중 한 명인 허균이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일로 이식은 충격을 받아 한동안 스스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
- 작가의말
단편을 쓸 때는 몰랐지만, 장편을 쓰면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매일 마주하네요.
반복되는 표현과 진부함이 보일 때마다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네요.
이런 부족한 글을 봐주셔서 언제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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