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서아야?
산타의 말에 나는 미술관에서 백현석의 그림을 찾을 때를 떠올렸다.
백현석에게 왜 그 그림이 필요할까?
백아영의 이야기로 알 수 있는 건 그 그림은 자신의 소망을 알게 된 백현석이 한이 맺힌 듯한 울음을 터뜨렸고 그 이후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다.
이진학의 말대로라면 백현석은 누군가 죽을 때마다 그림에 하얀 별을 그려 넣었다.
그렇다면 그의 소망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그 사람들과 관련된 것인가?
생각에 잠겨 있던 나에게 산타가 강조하며 말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직 경합은 끝나지 않았어.”
무언가 깨달은 나는 자리에 서서 얼어붙는다.
백현석이 그림을 그린 이유.
그 그림에 담긴 의미.
그리고 그가 소망을 이루고자 한 이유.
잠시 잊고 있던 기억들이 단번에 몰아치며 머릿속을 뒤집는다.
‘5일...... 5일 안에 끝내야 해!’
그 즉시 나는 산타를 내버려두고 떠난다.
그런 내 뒤에서 산타가 다급히 말한다.
“한정우! 잊지 말고 기억해. 산타는 다른 사람의 소망을 이루어준다. 그게 어떤 형태든지 말이야. 내가 했던 모든 행동은 다 그 이유로부터 비롯되는 거야.”
***
호텔의 회의실.
나는 상석에 앉아 우 실장님이 올 때까지 잠시 책을 읽고 있다.
그때 회의실 문을 열고 우 실장님과 직원들이 들어온다.
그들의 손에는 서류 뭉치들이 들려 있는데 그 양이 상당하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어놓고 그들을 반긴다.
“우 실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우 실장님은 서류를 탁상 위에 놓는다.
우 실장님을 따라 들어온 직원들은 서류를 놓고 곧바로 회의실을 나간다.
“부탁하신 대로 백현석의 과거와 그가 투여한 약물에 대한 조사 자료입니다.”
나는 그에게 여러 가지 조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일러두신 대로 백아영 이진학 부부도 불렀습니다. 이제 곧 도착하실 겁니다.”
“역시! 우 실장님 감사합니다!”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면 당황할 게 뻔한데 우 실장님은 그런 모습 없이 곧바로 내 부탁을 들어주셨다.
그러나 역시 그에게 찜찜함이 남아있었는지 나에게 묻는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시는 겁니까?”
그는 에릭에게 그림이 넘어간 마당에 내가 벌이고 있는 일이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당연히 백현석 이사장님의 소망을 들어드리기 위해서죠!”
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우 실장님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표정이 밝게 바뀐다.
“혹시 산타에게 뭐라도 들었습니까?”
내가 산타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 우 실장님의 눈은 은근히 기대에 차 있다.
어떻게 보면 그의 몇 마디가 도움이 되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요? 그 산타가 웬일이래! 그래서 백현석 이사장의 소망이 뭐랍니까?”
“그의 소망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어요.”
그 말에 우 실장의 얼굴이 망가진다.
마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얼굴이다.
“그게 도움을 준겁니까? 저 같으면 차라리 백현석 이사장의 소망이 무엇인지 대놓고 말해주겠습니다!”
우 실장님은 산타에게 불만을 표출하듯 회의실 천장을 향해 소리쳤다.
“에라이!”
덜컥!
누군가 굳게 닫힌 회의실 문을 열며 들어온다.
이진학과 백아영 부부다.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에게 놀란 실장님은 내 뒤로 숨는다.
아무래도 산타가 자길 찾아온 줄 알았던 모양이다.
“으흠!”
우 실장님은 헛기침하며 자연스레 떨어진다.
나는 애써 이 자리를 찾아온 이진학에게 인사한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백현석의 그림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가장 슬퍼하고 있는 그는 아직 얼굴에 침울함이 남아있다.
내가 그들을 여기에 부른 이유는 단 하나다.
백현석의 소망을 찾고 이루어주는 것.
이진학은 나를 보며 묻는다.
“왜 우리를 불렀나?”
나는 입을 벙긋거리며 망설인다.
나는 백현석 이사장의 그림이 없어도 그의 소망을 이뤄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내 짐작일 뿐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없다.
“아직 경합은 끝나지 않았어요. 우리가 백현석 이사장님의 소망을 이루어 드릴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우 실장님은 내 옆에서 자기 이마를 탁! 친다.
이진학과 백아영은 내 호언장담에 놀라며 서로 마주 보고 눈을 끔벅인다.
우 실장님은 내 두 팔을 잡고 흔들며 말린다.
그는 울상을 지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산타에게 제대로 된 도움이라도 받으면 말이 되겠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그 말에 동의한 듯 이진학이 한마디 거든다.
“장인어른의 그림이 에릭에게 넘어갔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네. 그런데 지금 뭘 하자는 건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에게 말한다.
“제 생각이 맞는다면 그 그림은 그저 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그의 소망이 아닐 겁니다!”
이진학은 허리에 두 손을 짚으며 눈살을 찌푸린다.
웬 미친놈인가 하며 나를 보고 있지만, 내가 꺼낸 말에 혹하는 듯 돌아서서 떠나지 않고 나를 한참 바라본다.
백아영이 나를 보며 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죠? 그림이 그저 수단이라니?”
그녀의 물음에 나는 이진학을 보며 답한다.
“그림 자체가 백현석 이사장님의 소망이라면, 아마 그가 그림을 완성한 그날 바로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을 겁니다. 그렇죠, 이진학 씨?”
백아영과 백현석 이사장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호텔로 찾아왔던 날 그가 말했다.
그림을 완성한 백현석의 얼굴은 슬픔에 차 있었다고 말이다.
이진학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한다.
“그래 그건 분명 슬픔에 찬 얼굴이었어. 기쁨이나 즐거움, 보람보다는 슬픔과 좌절에 빠진 얼굴이었지.”
이진학의 그때의 기억을 자세히 떠올리듯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풀어놓는다.
“그러고 보니 그때 장인어른은 그 그림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어. 그 그림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달까? 그래서 장인어른이 그림을 숨겨 달라고 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
‘거부감이라......’
나는 이진학의 말을 곱씹어 본다.
정말 내 생각이 맞는다면 백현석 이사장이 그림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가 그림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던 건 거부감 때문이 아니다.
이번에는 백아영에게 묻는다.
“백아영 씨 그때 백현석 이사장님이 소망을 이루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설명해 주셨죠?”
백현석 이사장과 그녀를 이 호텔로 데려온 그날.
그녀는 누워있는 백현석 이사장 옆에서 울먹거리며 백현석 이사장이 지금 와서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네. 산타가 말하길 아버지는 속죄하기 위해 소망을 이루려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때 백아영은 깨달은 모양이다.
“잠시만, 그렇다면 설마?”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한다.
“바로 그겁니다. 백현석 이사장님은 속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거지 그 그림이 이사장님의 소망 그 자체가 아닙니다.”
나는 이진학을 보며 말한다.
“하지만 막상 그림을 그린 후 그가 느꼈던 심정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일 겁니다. 그가 그림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던 건 아마도 그 감정 때문이겠죠. 그래서 처음 그가 소망을 거부했던 것처럼 그림을 멀리했던 겁니다.”
그는 그림을 볼 때마다 속죄해야 할 대상이 떠올랐을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과오에 수치를 느껴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이진학은 반박하듯 말한다.
“그럴 리가...... 그림을 그릴 당시 살아있는 분이 계셨어. 직접 속죄를 바라셨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셨을 거야!”
그의 말이 맞다.
속죄를 위한 것이라면 직접 찾아가 용서를 빌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상대가 이미 죽었다면요?”
그 말에 이진학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눈을 번득인다.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묻는다.
“이진학 씨, 그 당시 이미 죽어있던 분도 계셨죠?”
이진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래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계셨지. 그렇다면 장인어른이 속죄해야 할 대상이 그런 분 중 하나라는 건가?”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죠.”
하지만 여기서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우 실장님이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 대신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데 왜 하필 그림으로 표현했을까요? 돌아가신 분이면 묘라도 찾아가면 될 텐데.”
그 물음에 백아영이 말한다.
“아버지는 그림밖에 모르셨어요. 당신의 외골수적인 기질은 누구도 말리지 못했죠. 아버지는 당신만의 방법으로 그들에게 속죄하고 싶었을 거예요. 하지만......”
백아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잇는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누구에게 폐를 끼치거나 책잡힐 사람은 아니에요!”
백아영은 백현석 이사장이 누군가에게 속죄할 정도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큰 죄가 있을 수도 있다.
누구든 살면서 죄를 지을 수 있으니까.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이진학은 백아영을 위로하려는 듯 그녀의 손을 잡으며 눈을 바라본다.
백아영은 이진학의 눈을 피하며 아래로 시선을 내린다.
이진학은 백아영의 손을 꼭 잡는다.
이진학은 씁쓸한 마음에 한숨을 쉬고 나에게 묻는다.
“그래, 네 생각대로 속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쳐. 그런데 장인어른은 어떻게 그 그림으로 속죄하려는 거지? 그리고 그림이 없는 우리는 어떻게 그의 속죄를 도울 수 있나?”
나는 그의 물음을 듣고 고민하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이진학은 말없이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볼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보며 싱긋 웃고 지나 친다.
이상한 내 행동에 다들 나를 주목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회의실 문 앞에 선다.
그리고 문을 열며 말한다.
“그건 서아가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 서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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