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또 뵙네요

영월역에서 내린 나와 서아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역을 둘러보았다.
“와...... 예쁜데!”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하늘과 쌀쌀한 바람에 불어오는 정취가 역의 분위기를 더욱 차분하고 정갈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서아는 한옥처럼 꾸며진 역의 모습에 흠뻑 빠져있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역의 모습을 보고 흥분한 서아였다.
미국이 아닌 오로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맑지는 않지만, 흐리지도 않는 애매한 날씨였지만, 역에서 느껴지는 정취가 방금까지 걱정하던 모습마저 사라질 정도로 마음에 든 모양이다.
서아는 건널목을 지나 역 안으로 들어서며 들뜬 그 기분을 좀처럼 감추지 못했다.
“나, 나 사진 찍어줘!”
역 앞에 놓인 글자 조형물 옆에 서서 서아가 부탁했다.
그러나 우리 신세를 떠올린 서아는 금방 시무룩해진다.
지금 우리는 도망자 신세.
당연히 스마트폰을 꺼놓은 상태다.
분명히 지금 우리를 찾는 부재중 전화가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더구나 딸바보 이진학 씨라면 지금 손을 벌벌 떨며 전화를 받을 때까지 폰을 손에서 놓지 않겠지.
카메라도 없던 터라 지금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을 수 없었다.
근처에 즉석카메라라도 팔까 봐 둘러보았지만, 파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평일이라 우리 같은 여행객도 별로 없었다.
방학 시즌도 아니고 연휴 시즌도 아닌 애매한 시기였다.
그렇게 돌아설 찰나 누군가 뒤에서 우리를 불렀다.
“저기요!”
뒤를 돌아보았을 때 꽁지머리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한 사람이 우리를 보며 씩 웃고 있다.
유명 브랜드의 이름이 적힌 카메라를 목에 매고 있는 그는 딱 봐도 전문가처럼 느껴진다.
“오늘 선돌을 찍으러 왔는데 너무 늦어버려 제가 원하는 사진을 찍지 못했어요. 그렇게 실망하며 돌아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났는데 뭐랄까...... 너무 보기 좋네요.”
나와 서아는 서로를 바라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저희 말씀이죠?”
“네!”
그는 카메라에 필름을 갈아 끼우고 카메라를 들고 우리를 찍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딱 1장만! 1장만 찍어도 될는지요?”
그는 우리에게 애원하듯 검지를 세우고 흔들며 부탁한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말한다.
“아니에요. 괜찮.......”
그러나 서아가 내 팔을 끌어당기며 큰 목소리로 말한다.
“네! 좋아요. 예쁘게 찍어주세요.”
서아의 말에 그분은 활짝 웃으시며 카메라의 조리개를 조절한다.
카메라 렌즈를 우리에게 향하며 조심스레 셔터에 손가락을 올린다.
그러다 뭐가 못마땅한지 입을 삐죽거리시더니 우리에게 말한다.
“두 분, 좀 더 붙어주세요.”
막상 사진을 찍으려 하니 어색한지 서아와 나는 서로 멀찌감치 떨어진 채 굳어있다.
물론 서아가 내 팔을 잡고 있지만, 찰싹 붙어 있지 않고 거리를 둔다.
거기다 어색한 표정과 분위기.
남이 보기에도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모양이다.
서아는 내 팔을 더 세게 끌어당긴다.
당황한 내가 서아를 내려보지만, 서아는 렌즈를 응시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밝은 표정을 짓는다.
“자, 좋아요! 그런데 남성분 조금 거 활짝 웃어주세요. 에이~ 좀 더, 좀 더. 여자 친구는 잘하는 데 남자 친구가 영 엉망이네.”
“네?”
그분의 말에 나는 눈이 번쩍 뜨인다.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변명하듯이 말한다.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이에요!”
나는 혹시나 서아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녀의 반응을 살핀다.
다행인지 서아는 그분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나 혼자 방정 떤 것 같아 약간 낯부끄럽지만, 아닌 건 아니니까.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러나 그 사람은 ‘나도 다 알아.’라는 식으로 콧방귀를 뀌며 말한다.
“원래, 다들 그렇게 말해요. 결국엔 할껀 다 하더라. 자, 됐습니다.”
사진을 찍은 그 사람은 우리 사진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고맙습니다. 재밌게 여행하세요.”
그리고 고맙다며 꾸벅 인사하고는 바로 뒤돌아 가버린다.
갑자기 찾아와 갑자기 떠나는 그의 모습에 잠시 얼이 나간 우리는 급하게 그를 부른다.
“아저씨!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요! 사진도 보여주지 않고 가시면......”
이미 그는 흔적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진 상태다.
우리는 서로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빵 터져버린다.
“하하하, 정말 웃긴 아저씨네.”
“그러게 말이야. 와~”
그러자 서아가 내 옆구리를 세게 때리며 뾰로퉁하게 말한다.
“야, 그런데 거기서 아니라고 하는 건 조금 그랬어.”
그 사람이 우리를 연인 사이로 착각할 때 부정하며 손사래 친 것이 너무 방정을 떤 게 아닐까?
나의 행동이 서아의 체면을 구긴 게 아닐까?
다행이라 봐야 할지 내 걱정과 달리 서아는 그 부분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부탁하시는데 거절하면 어떡해!”
서아는 사진을 찍어준다는 아저씨의 부탁에 거절하려 했던 내 행동에 대해 꾸짖었다.
나는 생각과 다른 서아의 반응에 당황하며 대답한다.
“응...... 그, 그렇긴 하네.”
서아는 머리를 긁적이는 나를 보고 콧방귀를 뀌며 묻는다.
“그런데 너 선돌이 뭔지 알아?”
오히려 서아는 그분이 말한 선돌이 어딘지 궁금해하는 듯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역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 이걸 하나 챙겨야 하지 않겠어?”
그녀의 손에 들린 건 관광안내 책자다.
***
“이거 기분이 이상해...... 멀미 나나 봐......”
처음 ‘잠입’을 겪어본 서아의 감상평이다.
나도 산타를 따라 처음 미국으로 넘어갔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기에 지금 서아가 느끼는 멀미를 이해한다.
별을 보기 위해 영월을 찾아왔지만, 밤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우리는 시간을 보낼 겸 선돌을 찾았다.
충분히 현금을 들고 있었기에 택시를 탈 생각이었지만, 서아가 그 방식을 나에게 권했다.
“너 순간이동 할 줄 알잖아. 차라리 택시를 타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좋지 않겠어?”
서아는 될 수 있으면 아낄 수 있는 건 아끼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택시를 타고자 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혹여나 그곳에 사람이 있다면 갑자기 나타난 우리의 모습에 놀랄 것이다.
지금 역 앞에서는 사람이 얼마 없고 우리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능력을 쓰면 되겠지만, 만약 전망대에 이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면 곤란해진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는 아직 선돌을 구경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선돌을 본 적이 없어. 지금까지 내가 ‘잠입’을 통해 이동한 곳은 다 내가 가본 적이 있거나 알고 있는 장소였어.”
내가 주저하고 있을 때 그녀는 책자에 있는 선돌 사진을 보여주며 말한다.
“에이 오늘 같은 평일에 관광지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방학 시즌도 아니고 연휴 시즌도 아닌데. 괜찮아. 그리고 이 사진들 봐봐.”
선돌이 보이는 전망대의 사진이다.
“그리고 혹시 몰라. 사진만 보고도 갈 수 있을지.”
서아는 나에게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인다.
나를 부추기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나는 결국 그녀의 뜻대로 한다.
“내 팔을 잡아.”
눈을 지그시 감고 전망대를 생각한다.
순간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과 함께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불어오는 바람, 주변의 온도, 소리까지 바뀐다.
산에서 맡을 수 있는 풀과 흙냄새가 내 코끝을 스친다.
우리가 있는 곳은 사진 속 모습 그대로인 전망대였다.
지금 서아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는 듯 계단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묻는다.
“괜찮아?”
방금까지 노랗던 서아의 얼굴이 다시 하얀 얼굴로 돌아온다.
“응, 괜찮아. 그런데 정말 신기했어. 주변이 막 종이접기 하듯이 접히고 뭉쳐지고 펼쳐지더니 여기에 있을 줄이야.”
처음 산타와 함께 미국으로 이동하던 때를 떠올리며 말한다.
“나도 처음엔 놀랬지.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기계처럼 움직이며 퍼즐처럼 맞춰지더라.”
서아도 내 말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나도 너처럼 눈을 감고 있을 걸 그랬어. 그럼, 멀미가 덜하려나?”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어깨를 으쓱이고 말한다.
“아마도 그럴지도.”
능글맞은 내 표정에 서아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무튼 잘 됐으니 됐어!”
그리고 전망대에서 선돌을 향해 서서 팔을 활짝 펼친다.
“매번 건물 사이에 있었는데 이런 곳에 오니 정말 좋다!”
서아는 이 순간을 즐기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정우야! 너도 이리 와!”
서아가 나를 돌아보며 부른다.
불어오는 바람에 서아의 긴머리가 흩날렸다.
서아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긴다.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는다.
그녀의 빨간 입술은 그녀의 하얀 얼굴 때문에 더 도드라진다.
나는 홀린 듯 그녀를 멍하니 바라본다.
어째선지 모든 게 느려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공간 속에서 내 눈엔 오직 서아뿐이다.
‘안돼. 정신 차려.’
하지만 나는 이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태연하게 그녀의 곁으로 향한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낸다.
“서아야 선돌에 소원을 빌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한 번은 소원을 이루어준대.”
“뭐?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서아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고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나는 그 모습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참으며 말한다.
“정말.”
“그래? 그럼!”
내 말에 서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입맛을 다시더니 곧바로 두 손을 모아 눈을 감는다.
“소원 비는 거야?”
내가 서아에게 묻자, 서아는 눈을 감은 채 말한다.
“당연하지.”
그리고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너도 얼른 소원 빌어.”
서아는 지그시 눈을 감고 한참을 서 있었다.
당당하고 곧으면서도 순수하고 여린 서아의 모습을 나는 한참 들여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선돌을 바라본다.
‘소원이라......’
나는 아직 내 소원, 소망이 무엇인지 모른다.
산타가 한 말이 떠오른다.
‘정말? 정말 네가 네 소망을 모른다고 생각해?’
‘일부러 외면하고 거부하는 게 아니고?’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니?
내 소망을 모르겠는데 어쩌란 말인가?
‘정말로 내 소원이 있다면 무엇인지 알려주면 되잖아!’
나는 선돌에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 해답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뭔가 그 해답에 가까이 다가가면 거대한 벽이 나를 가로막는 듯한 느낌이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는다.
갑자기 전해지는 따뜻한 손길에 고개를 돌렸을 때 서아가 내 손을 잡고 나를 올려보고 있다.
그리고 나를 걱정하며 묻는다.
“갑자기 왜 그래? 왜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어?”
“어? 내가?”
주먹을 꽉 쥔 손에는 땀이 흠뻑 젖어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서아는 소매로 내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말한다.
“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갑자기 얼굴은 왜 빨개지고 그래? 감기 걸린 거야?”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빠르게 고개를 휙 돌린다.
‘한정우 제발!’
서아는 내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고 여러 차례 괜찮은지 물어본다.
“정말 괜찮지? 너무 무리하지 마.”
서아는 내 얼굴을 확인하러 내 주위를 돌아다니지만, 나는 서아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한다.
내가 생각해도 내 모습이 참 요란하고 한심스럽다.
서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시간도 늦고 바람도 쌀쌀하니 추울 만도 하지. 그만 돌아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그래 그러자.”
그녀와 단둘이 아무도 없는 곳에 있으니 내 몸이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환각에 빠진 듯 몽롱해진다.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이곳에서 벗어난다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찰나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어! 여기서 또 뵙네요.”
역 앞에서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었던 꽁지머리의 그분이다.
그분은 윗니를 활짝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웃고 있었다.
“아! 여기 있었구나!”
그분은 숲속 나무 뒤에서 무언가를 줍더니 우리에게 보여준다.
작은 키링이다.
“혹시나 해서 돌아왔는데. 여기 떨어져 있었네요.”
그리고 그는 키링을 찰랑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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