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아니야!”
서아는 눈앞에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절규한다.
정신을 무너뜨릴 정도의 공포가 그녀를 집어삼킨다.
악의가 담긴 그때의 불꽃이 다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증오하는 그 불꽃은 생명을 가벼이 여기며 짓밟는다.
겸손이란 하늘마저 태우려는 오만한 그 화마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마구잡이로 몸집을 불리는 녀석은 스스로가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그 열기가 선명히 그녀의 살갗에 닿는다.
그 냄새가 분명히 그녀의 코끝을 스친다.
먹잇감을 발견한 늑대무리처럼 불길은 서아를 점점 죄어오기 시작한다.
공포에 시달리는 서아를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불길은 몸을 꿀렁인다.
그 불경스러운 움직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리며 서아에게 무기력함을 선사한다.
그 자리에서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서아는 그저 불길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눈물은 물론이고 사고마저 멈춰버린 서아는 저항하거나 살아남으려는 의지조차 상실한다.
“서아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
한정우, 한정우가 틀림없을 것이다.
서아는 뒤돌아본다.
그러나 서아를 부른 사람은 한정우가 아니었다.
“너, 너......”
그 사람이 한 번 더 서아를 부른다.
“서아야.”
‘그럴 리 없어.’
서아는 자기를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빛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를 걱정해 주는 듯한 위선적인 눈빛.
그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은 지금처럼 그녀를 걱정하듯이 아련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이기적이고 비굴함이 가득했던 그 사람은 서아를 나 몰라라 한 채 제 몸 챙기기 급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이 불길 속에 혼자 버려놓고 떠난 인간이었다.
서아는 그 사람이 그런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끔찍할 정도로 소름이 끼친다.
‘저건 가짜야!’
서아는 홀린 듯 아직 불길이 닿지 않은 수풀을 발견한다.
그녀는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간다.
불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닌 단지 그 눈빛, 그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서아 역시 그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모른 척할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싫다.
그녀가 느꼈던 원통하고 서글픈 고독은 단순히 그런 눈빛과 표정으로 달래줄 수 없다.
그렇기에 서아는 그 눈빛에 오히려 역정을 내며 도망친다.
계속 달리고 또 달린다.
이미 옷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찢어진 상태다.
서아의 하얀 얼굴에는 선명한 붉은 핏자국이 그어있었다.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만, 서아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피로에 시달려 고된 노동에 아우성을 지르지만, 무너질 듯한 그녀의 정신은 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그녀를 더욱 사지로 내몬다.
“서아야.”
뒤에서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아야.”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들린다.
서아가 목소리를 난 곳을 쳐다보았을 때 저 멀리 수풀 속에서 그녀를 부르던 사람이 방금 불길에 둘러싸여 형체가 사라진다.
“서아야.”
이번에 왼쪽이다.
수풀 옆에 서 있던 그의 위로 불타고 있는 나무가 쓰러진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다.
서아는 괴이한 상황에 피가 말리는 듯한 스트레스를 느끼면서도 다시 달린다.
“서아야.”
이번에는 뒤에서 들린다.
“서아야.”
오른쪽.
“서아야.”
왼쪽.
“서아야.”
오른쪽? 왼쪽?
이제 구분할 수 없다.
어디가 오른쪽이고 왼쪽인지, 지금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아니면 내려가고 있는지 인지할 수 없다.
정신이 붕괴하기 직전, 서아는 멈춰 선다.
“서아야.”
“그만! 그만! 그만! 그만하란 말이야!”
서아는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에게 위협한다.
돌을 주워 던지거나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저항한다.
그러나 서아의 뜻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는지 그 사람은 서아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온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서아는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발악한다.
손발이 떨리고 불안함과 불길함이 서아의 마음을 지배한다.
극도의 긴장감에 결국 다리가 풀려버린 서아는 자리에 주저앉는다.
“정우야! 한정우!”
그녀는 애타게 한정우의 이름을 부른다.
바보 같은 놈이지만, 칠칠찮은 놈이지만, 서아는 한정우를 찾는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따뜻하고 아련한 눈빛.
그녀를 부르는 진중하고 차분한 목소리.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서아 앞에 있는 건 한정우가 아닌 그녀를 내려보고 있는 그 사람뿐이다.
서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서아야.”
두 손으로 귀를 막지만, 소리가 마치 그녀의 안에서 울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린다.
그때
“이서아!”
한정우의 목소리다.
“정우야!”
한정우가 불길 속을 헤치고 나와 서아 앞에 나타난다.
한정우는 바닥에 주저앉은 서아를 와락 끌어안는다.
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많이...... 놀랬잖아.”
안도감을 느끼며 긴장이 싹 사라진 그녀는 울먹이며 말한다.
“날 버리지 마! 나를 두고 사라지지 마!”
“내가 왜 너를 버리고 떠나! 떠나지 않아. 네 곁에 있을 거야.”
서아는 정우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그녀를 에워싸던 뜨거운 불길은 사라졌다.
그녀를 괴롭히던 그 사람도 사라졌다.
이제 온전히 둘만 남는다.
***
서아가 눈을 뜬다.
어두운 숲속, 서아는 한정우의 외투를 두른 채 한정우의 가슴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한정우를 만나 긴장이 풀린 서아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서아가 도망쳐 내려오면서 길이 아닌 숲속으로 가버린 탓에 지금 그들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한정우는 서아와 함께 ‘잠입’을 통해 숙소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째선지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그는 이후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런 와중 산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싸늘하고 냉랭하고 쓰러진 서아는 추위에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결국 한정우는 자기 외투를 벗어 서아의 몸에 두르고 나무에 기대어 앉아 서아를 품에 안는다.
손전등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터라 지금 내려갈 길을 찾는 것보다 아침에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한정우도 잠시 잠을 청했다.
서아는 그런 정우의 품속에서 일어나 그의 얼굴을 올려본다.
한정우는 가벼운 반팔 차림에 붕대를 감은 팔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정우야......”
나지막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가슴에 기댄다.
외투를 벗어주고도 그녀가 추울까 봐 팔로 자기를 에워싼 그의 배려에 서아는 옅은 미소를 짓는다.
그 역시 지금 기온에 추울 터인데 자기를 생각해 주는 한정우의 모습에 서아는 기쁘다.
그녀는 한정우 역시 추워할 것으로 생각하며 두른 외투를 벗어 한정우와 함께 이불처럼 덮는다.
외투가 둘을 덮기엔 작아 공간이 부족했기에 서아는 한정우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두근-, 두근-
한정우의 심박이 느껴진다.
괜스레 서아는 떨림을 느끼며 얼굴을 붉힌다.
겨우 얇은 티 하나였기에 피부가 닿는 듯한 느낌이다.
서아는 수줍어하며 한정우의 얼굴을 올려본다.
그리고 손을 올려 한정우의 눈앞에서 흔들어보며 한정우가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한정우가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서아는 그 틈을 타 한정우에게 투정 부린다.
“너 진짜 나빴어. 나를 어디든지 데리고 도망갈 거라는 놈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서아는 오늘 꽁지머리의 아저씨가 사진을 찍어주었을 당시를 생각했다.
“그렇게 정색 떨며 부정하면 내가 어떻게 돼?”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며 손사래 치며 정색하던 한정우의 모습이 내심 서운한 서아였다.
서아는 입을 삐죽 내밀고 한정우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곧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정우의 품에 안긴다.
“그래서 할머니한테는 내가 먼저 선수 친 거다. 그러니까 너도 내 마음 조금이라도 헤아려봐!”
그렇게 서아가 한정우의 품에서 투정 부릴 때 잠결에 서아의 말을 들은 한정우가 하품하며 일어난다.
“어? 서아야. 일어났어? 방금 뭐라고 말하지 않았어?”
한정우는 눈을 끔벅이며 서아에게 물었다.
서아는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한정우에게 소리쳤다.
“아니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냥 네가 꿈꿨겠지.”
“그런가? 그런데 서아야 너 열나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야.”
한정우는 쌀쌀한 밤공기에 서아가 감기에 걸린 줄 알고 걱정하며 서아의 이마를 손으로 짚는다.
“봐. 지금 네 이마가 뜨거워. 이걸 어쩌지?”
“괜찮아! 나 지금 완전 멀쩡해!”
서아는 한정우의 품속에서 일어서며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알겠으니까. 이리 와.”
그러나 한정우는 서아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 그녀를 다시 끌어안는다.
힘이 없던 서아는 스르륵 한정우의 품에 안긴다.
“이것 봐. 서아야 열이 더 오르는 모양이야. 큰일인데......”
서아의 건강 상태가 심히 걱정된 한정우는 서아를 안고 외투를 다시 덮는다.
그는 그저 서아가 열이 난다고 생각할 뿐 그녀의 마음을 들을 생각이 없다.
아마 그녀의 마음을 들었다면 그 역시 얼굴이 새빨개질 것이다.
그런 한정우는 서아가 추울까 봐 그녀를 꼭 끌어안는다.
반면 서아는 가슴이 터질 지경이다.
‘도대체 누가 아무것도 아닌 남녀 사이에 이렇게 꼭 안고 있냐고!’
서아는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붉힌다.
“아, 알겠으니까. 잠시 놔줄래. 답답하거든!”
“어? 그래?”
서아의 마음을 모르는 한정우는 덤덤하게 말하며 서아를 풀어준다.
그러나 서아는 여전히 한정우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그의 가슴에 기대어 앉는다.
서아는 헛기침하며 한정우에게 말한다.
“으흠! 난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는 당부하며 말하지만, 한정우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정말?”
서아는 한정우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응. 정말.”
“그래. 알았어.”
한정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낸다.
“그럼, 이제 괜찮아?”
한정우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응......”
갑작스러운 모습에 놀란 건 한정우 역시 마찬가지다.
“미안해.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괜찮아. 미안해하지 마.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너만 괜찮으면 됐어.”
서아는 피가 묻어 나오는 붕대를 보며 한정우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게 말이야......”
서아는 한정우에게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기 어렵다.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서아는 한정우의 배려에 눈물을 참으며 말한다.
“미안해......”
한정우는 아무 말 없이 서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듯 하늘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 봐. 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보았던 하늘이나 지금 그가 올려보고 있는 하늘이나 같은 하늘이 분명한데 둘이 함께 올려본 하늘은 뭔가 색다르고 남달랐다.
별들이 한정우와 서아를 축복하는 것처럼 더욱 빛을 발하며 반짝거린다.
“서아야. 정말 예쁘다.”
“응...... 예뻐.”
서아는 한정우의 품에 기댄다.
한정우는 서아를 품에 안는다.
서로 포개어진 둘은 같은 하늘을 올려보고 있다.
그렇게 한참 둘은 대화 없이 별빛이 수놓은 밤하늘을 바라본다.
어느덧 둘의 눈동자에는 같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봐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니라고 해놓고 뒤에서 다 한다니까!”
서아와 한정우는 적막을 깨는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는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밝은 빛에 눈을 가린다.
“아저씨?”
꽁지머리의 아저씨가 손전등을 들고 서아와 한정우를 비추고 있다.
“손님들이 사라졌다길래 찾으러 왔어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윗니를 드러내는 특유의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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