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정, 정우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서아는 겁을 먹은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선다.
“지금 우리를 봐. 아무도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거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녀는 마치 나에게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간절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아니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녀에게 묻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남모르게 숨겨둔 비밀이 들킨 아이처럼 당황한 얼굴이다.
“난 너와 함께 바다를 건널 수 있어.”
서아의 눈빛이 흔들린다.
나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말한다.
“미국? 유럽? 호주? 어디든 말해.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끝까지 쫓는다면 나는 너와 함께 평생 이곳저곳을 다니며 도망칠 수 있어. 고작 이렇게 한국에서 머무르는 게 아니라......”
서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바닷바람에 쓸어 넘긴 그녀의 머리가 다시 흩날리지만, 그녀는 가만히 서서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나 무서워...... 그만해! 정우야.”
나는 그녀에게 다시 묻는다.
“어떻게 할 거......”
“그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서아가 내 말을 끊는다.
“그만해! 네가 뭘 알아! 네가 지금 내 기분을 알긴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떠들지 마!”
서아가 몸서리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내딛으려 할 때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한다.
“다가오지 마!”
단말마 같은 그녀의 외침에 나는 발걸음을 멈춘다.
그녀는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그랬다간...... 나 도망갈거야!”
커다란 파도가 일며 바닷물이 우리가 서 있는 곳까지 여린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 발자국은 파도에 말끔히 지워진다.
서아와 나는 동떨어진다.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모질게 말한다.
“정말 도망가고 싶은 거니? 그저 피하고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그 말에 서아는 가차 없이 돌아서 가버린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걷는다.
나는 멍하니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우리의 발자국이 서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시 큰 파도가 일어난다.
파도는 모래사장이라는 거대한 그림에 오점처럼 남은 우리의 발자국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그리고 흡족하며 돌아간다.
***
혼자가 되어버린 서아는 바다를 따라 형성된 산책로를 거닌다.
‘그냥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버려졌으면 좋겠어.’
밤이 내려앉은 바다 위로 화려한 조명이 비춘다.
광안 대교와 다양한 건물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빛이 무수히 반짝인다.
서아는 그 화려한 빛 속에서 서늘함을 느낀다.
“그냥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서아는 말도 안 되는 상상들로 머릿속을 채운다.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거나 거대한 홍수가 일어 세상이 멸망했으면 한다.
아니면 갑자기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떨어져 그 누구도 나의 생사를 모른 채 조금씩 잊혀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서아는 현실을 피하고 싶었다.
서아는 퉁퉁 부어버린 눈을 비비면서 계속 걸었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훌쩍이며 걷는 자기 모습이 청승맞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이제는 온전히 마음을 삼켜버린 불안에 뭐라도 해야 했기에 쉴 틈 없이 걸어야 한다.
하지만 부산까지 내려오며 쌓인 여독에 그녀는 힘든 모습이다.
피로가 쌓인 다리는 저리고 발은 물집이 잡혔는지 땅을 밟을 때마다 쓰라리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쉴 수도 없었기에 결국 서아의 발걸음은 얼마 못 가 멈추고 만다.
서아 앞에는 차들이 여럿 다니는 사거리가 있다.
오른쪽으로는 다리가 놓여 있고 왼쪽으로는 산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려 했던 서아는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발길을 멈춘다.
문득 그 옛날 어머니가 살았던 집이 떠오른다.
백현석이 부산에서 자리 잡은 곳.
서아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그 집이 떠올랐다.
‘정말 도망가고 싶은 거니? 그저 피하고 외면하는 게 아니라?’
한정우의 말이 떠오른다.
그가 그녀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서아는 고민에 빠진다.
그 집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밤새 서성거려야 할지.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다.
이제 그녀의 몸은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피로를 느끼다 못해 이러다간 정말 쓰러질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수중에 돈도 얼마 없었기에 그녀가 지낼 만한 곳을 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집으로 향한다.
서아는 민락역에서 서면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른다.
한정우와 함께 내린 광안역 플랫폼을 지나쳐 서면역에 도착한 그녀는 이번엔 1호선으로 갈아탄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문제다.
서아는 어릴 적 엄마를 따라 그 집에 가본 경험이 있지만, 운전을 해주는 기사님이 따로 계셨기에 집의 주소나 찾아가는 길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건 그 집이 보수산 아래에 있다는 것뿐.
그 미로 같은 곳에서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서아는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갈 곳도 없다.
“저기요......”
서아는 조심스레 옆에 앉은 아주머니 한 분에게 물었다.
“제가 길을 잘 몰라서...... 혹시 보수산에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나요?”
아주머니는 서아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초량역에서 내려가지고 시장 앞에서 버스 타면 돼요. 근데 와 보수산에 가노? 볼 것도 없는데.”
“아...... 그게......”
서아가 머뭇거릴 때 아주머니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서아에게 묻는다.
“니 혹시...... 서아가?”
그 아주머니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튀어나오니 서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
“맞제? 맞제? 엄마야! 니 완전 니 엄마랑 영판이다!”
아주머니는 서아를 보며 반갑게 반긴다.
“내 누군지 모르겠나? 숙희 이모! 니 어릴 때 이 동네 오면 몇 번 봤는데. 내 서울 가서도 보고 그랬는데.”
서아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본다.
“그카면 아영이 그 가시나....... 아 흠흠, 아영이도 한국 왔는 갑제? 근데 니 엄마는 어딨고 딸랑 니만 있노?”
“네...... 어머니는 지금 서울에 계셔요.”
“와 그 가시나 섭섭구로 연락도 없네. 한국 왔으면 연락을 해야제~”
때마침 지하철을 초량역에 도착한다는 알림을 울린다.
숙희 아주머니는 서아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오랜만에 할아버지 집을 찾으러 왔제? 가자! 이모가 델다줄게.”
서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머니를 따라 내린다.
***
보수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 아주머니와 나란히 앉은 서아는 미로 같은 동네의 전경을 보고 있다.
그때 아주머니가 서아를 툭툭 치더니 폰으로 사진 하나를 보여준다.
“어? 엄마?”
그 확대된 사진에는 단발머리의 백아영이 있다.
지금과 전혀 다른 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사진을 옆으로 조금 움직이니 백아영 바로 옆의 여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요게 바로 나. 크~ 다 옛날이다. 진짜.”
아주머니는 그 시절의 사진을 폰에 담아두고 다니는 모양이다.
“이 참에 니 엄마한테 전화해 볼까? 전화번호 그대로제?”
아주머니는 신이 난 목소리로 전화번호부를 켰다.
서아는 아주머니를 말리며 말한다.
“안 돼요!”
“와? 안 될게 뭐가 있노? 그냥...... 니 혹시 설마 가출했나? 엄마야 참말로?”
서아는 아주머니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고 보니 서아의 모습이 기운이 없고 초라해 보인다.
“니 밥은 묻나?”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서아에게 묻는다.
서아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들자, 아주머니는 놀란 얼굴로 서아의 손을 덥석 잡는다.
“밥은 먹고 댕겨야지. 그래가지고 되겠나? 안그래도 삐쩍 말라가 히바리도 없게 생겼구만.”
아주머니는 하차 벨을 누른다.
얼마 있지 않아 버스가 멈추고 아주머니와 서아가 내린다.
“여서 저 만데이로 올라가면 니 할아버지 집이다. 늦었지만 아직 이모도 저녁 안 먹었거든. 지금은 이모 집에서 밥 먹고 가자. 니 엄마한테 말 안할게.”
아주머니는 서아에게 매달리며 사정하듯이 말했다.
얼떨결에 승낙한 서아는 아주머니를 따라 길을 걸는다.
미로 같은 길을 지나 대문 앞에 선다.
아주머니는 가방을 뒤지더니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주머니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예쁘게 꾸며진 마당과 감성적인 인테리어를 겸비한 주택이 나타난다.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한다.
“엄마 왔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주머니가 씩씩거리며 왼쪽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이 문디 가스나야. 엄마 왔다고!”
그러자 신경질적인 말투로 대답한다.
“아 내가 말했제! 일할 때는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이게 엄마한테 말하는 꼬라지봐라! 그리고 방이 이게 뭐꼬 구신 나오겠다!”
“아야! 아프다고! 그만 때리라!”
싸우는 듯한 소리에 서아는 들어가지 못하고 현관문 앞에서 꽁꽁 얼어붙는다.
다시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며 다정하게 서아에게 말한다.
“뭐하노 얼른 들어온나.”
뒤에서 아주머니의 딸이 따라 나오며 묻는다.
“뭔데? 누구 왔나?”
펑퍼짐한 파자마 차림의 안경을 쓴 그녀는 엉덩이를 긁적인다.
“어우! 이 가시나야! 긁지 말고 씻어라 좀!”
“아! 알았다고! 근데 얘는 눈데?”
“서아. 이서아 기억나나? 아영이 아줌마 딸.”
그 이름에 그녀는 놀라며 말한다.
“정말! 니가 서아가? 와 그러고 보니 맞네! 알라 모습 고대로 자랐네! 와....... 역시 아줌마 딸이다. 그 얼굴 어디 안 가네.”
서아는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아, 안녕하세요.”
“내 누군지 알겠나. 지은 언니. 니 어릴 때 여만 오면 내랑 같이 놀았잖아. 내만 쫄쫄 따라 다니고. 이야 그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네.”
스스로 지은이라 밝힌 그녀는 얼굴을 훑는 시늉을 한다.
“얼른 들어온나. 춥다.”
그렇게 말하고 지은은 소파에 앉으며 거실의 TV를 켠다.
“내 씻으라 했제?”
“알았다! 내 밥 먹고 씻으면 되잖아.”
서아는 격양된 어조에 둘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온다.
지은이 앉은 소파에 살포시 앉으며 TV를 시청한다.
약간 긴장한 서아의 모습과 달리 지은은 소파 위에 옆으로 누워 배를 긁적이고 있다.
서아가 조심스레 지은에게 묻는다.
“저기...... 혹시 두 분 싸우시는 거예요?”
그 질문에 지은은 의아한 눈빛으로 서아를 보며 말한다.
“싸우다니 누가? 우리 안 싸우는데.”
그때 부엌에서 분주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던 아주머니가 말한다.
“여 사투리가 좀 그렇다.”
그 말을 듣고 지은이 덧붙인다.
“우리 원래 이렇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나저나 아줌마는? 할아버지 집에 계시나?”
서아는 눈동자를 굴리다 말한다.
“아니요.”
“그라모?”
때마침 아주머니가 예쁘게 깎은 과일을 내온다.
그리고 과일을 꽂은 포크를 지은에게 내밀며 말한다.
“아나. 니는 신경 쓰지 말고 과일이나 처무라.”
“알았다. 내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게.”
지은은 과일을 한입 베어 물고 냠냠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아주머니를 한숨을 쉰다.
다 늘어난 파자마에 언제 감았는지 모를 머리, 부끄러움을 모르고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배를 긁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아주머니는 답답한 심정이다.
“저러니 나이 먹고도 남자 하나 없지.......”
그 말에 지은은 능청스럽게 반박한다.
“내도 서아처럼 아영이 아줌마 딸이면 늘씬하고 예뻐가 남친 있을 텐데 누구를 닮아가 못 사귀는 거 아이가.”
“니 지금 뭐라 캤노?”
아주머니가 지은을 노려보며 묻자, 지은은 깨갱거리며 자리를 피한다.
“와 몇 년 만에 좀 씼어야 겠다. 와.”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며 욕실로 다급히 뛰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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