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해야 할 시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서아는 그 옛날 백현석과 백아영이 살았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한정우에게 물었다.
서아는 지금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는 한정우의 존재가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이곳에 있는 걸까?
그 넓은 부산에서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냥 네가 여기에 올 것 같았어. 네가 그나마 부산에 연고가 있는 건 여기뿐이니까.”
한정우는 그녀가 이곳을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서아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 불안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인지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 죄책감으로 인해 그녀는 분명 이 집을 찾아올 것이라 한정우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불안과 죄책감은 바로 그녀의 할아버지, 백현석 때문이니까.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를 네가 어떻게 찾은 거야?”
서아 역시 이 미로 같은 곳에서 숙희 아주머니와 지은의 도움 없이는 이 집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한정우가 그 집 앞에 서 있다.
“사진.”
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정우의 말에 곰곰이 생각한다.
“사진? 설마? 할아버지 사진?”
“그래.”
둘이 함께 백현석의 사진을 탁자 위에 늘어놓고 담소를 나누던 때가 떠오른다.
그 사진 중에는 이 집에서 찍은 백현석과 그의 아내 그리고 백아영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었다.
한정우는 겨우 그때의 그 기억만으로 ‘잠입’을 통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도 될 줄 모르고 시도를 했는데...... 눈을 떠보니 여기더라.”
그러나 서아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한정우를 보자마자 가슴이 떨렸기 때문이다.
이 떨림이 한정우를 봐서 그런 것인지, 그가 했던 질문 탓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아니 그녀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아는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과 반가움을 자각한 서아가 곧바로 무표정한 얼굴로 싹 바뀐다.
그리고 돌아선다.
그녀는 아직 한정우와 마주하고 싶지 않고 만나기도 싫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마음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한정우는 항상 이렇게 갑자기 방심하고 있는 그녀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서아의 집 현관에 갑자기 그가 나타났을 때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절한 채 쓰러져 있을 때도.
그가 수줍어하며 그녀에게 사과하러 왔을 때도.
그리고 갑작스러운 여행에 고민하고 있을 때도.
그는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마치 사고처럼 나타났다.
방심하고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을 때 말이다.
그 점이 서아는 싫었다.
마음의 벽을 세우기도 전에 나타난 그에게 서아는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마음을 들키거나 터놓았다.
그렇게 점차 서아의 일부분에 한정우가 스며들어 갔다.
서아는 더 이상 그가 다가오지 말았으면 한다.
더 이상 그가 그녀의 삶에 들어오지 않길 바란다.
그러다간 결국 그에게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버릴 것 같아서.
그가 혹시 이 마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남들 모르게 마음속 간직하고 있던 나의 고통과 슬픔을 그가 알게 되지 않을까?
아직 숨기고 또 숨긴 마음마저 그에게 털어놓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더 이상 그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서아의 그런 생각과 바람은 그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서아야.”
한정우가 돌아선 서아의 팔을 붙잡는다.
그의 손길에도 서아의 마음은 흔들린다.
서아는 그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완전히 무너질까 두렵다.
이제 서아에게 한정우는 모든 걸 맡기 고픈 사람이 되어버렸다.
몸도 마음도.
그러나 그 기억마저 들추어내고 싶지 않다.
지금 여기서 그의 얼굴을 본다면 그 기억마저 그에게 말해버릴까 두렵다.
서아는 한정우를 향해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이거 놔.”
한정우는 서아의 팔을 잡고 망설이더니 그녀의 손을 놓는다.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에게 손을 놓으라 했던 서아였지만, 손을 놓을 때 왠지 그가 그녀를 포기한 듯한 느낌이 들어 오히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럼에도 그를 밀어내기 위해 서아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
“그동안 미안했어. 내가 지금까지 너랑 붙어 다닌 것도 그냥 네가 불쌍해서 그런 거였어. 안타깝고 처량해 보여서...... 그러니까 선을 지켜줬으면 해. 그저 너는 나와 아무것도 아닌 사이니까.”
모진 말을 내뱉은 서아의 얼굴은 냉랭하게 굳어버린다.
이 말에 그가 상처라도 받을까 봐 마음을 졸인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고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는다.
그럼에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목이 메어와 서아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서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포근한 온기가 그녀를 감싼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지만,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이 떨림은 그녀의 것인가? 아니면 그의 것인가?
한정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마음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가 말한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네가 내 곁에 있는 이유가 단지 내가 불쌍해서, 처량해서 그렇다면 지금 떠나면 안 돼. 나를 봐. 지금도 얼마나 불쌍한데. 소중한 사람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그 사람은 나를 피하려고 하고 있어. 이게 얼마나 처량한지 너는 모를 거야.”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다.
“가지 마. 서아야.”
그 말에 잠시 그녀는 현실인지 꿈인지 혼란스럽다.
이러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이대로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보며 화를 낸다.
“미칠 것 같아! 너 때문에 미칠 것 같다고!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네가 내 마음을 알기나 해?”
그녀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원망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쏟아낸다.
“왜! 도대체 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그저...... 그저......”
애증이 서린 그녀의 투정에도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 눈빛이다.
온화하고 편안한 눈빛.
서아는 그 눈빛을 피하고자 고개를 숙인다.
“나쁜 놈! 이 머저리 같은 놈아!”
그녀는 그를 밀치던 손을 툭 떨군다.
“서아야.”
그 목소리다.
진중하고 차분한 목소리.
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며 참는다.
그 목소리에 몸도 마음도 빼앗겨 버린 느낌이다.
그녀의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그녀는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두 손에 얼굴을 묻는다.
그녀는 이제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마치 벼랑 끝에선 느낌이다.
그때 그가 그녀의 손을 내리며 그녀를 끌어안는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녀가 발버둥 치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지마...... 제발.”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서아야.”
다시 그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든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어. 네가 지옥 끝에 떨어진다고 하여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두려워하지 마. 나는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
그녀의 떨림이 느껴진다.
함께 하겠다는 그의 말에도 아직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다.
그녀는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가 두려웠고 그녀의 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점을 그도 알고 있다.
“나에게 미안할 필요도 없고 나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 단 그게 어떤 것이든 결정은 네가 해야 해.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내가 같이 감당할 거야.”
그 말에 그녀의 떨림 조금씩 잦아든다.
그녀도 이제 선택을 마주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단 그녀 혼자였다면 지금도 그녀는 힘껏 외면할 것을 그와 함께이기에 결심한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날 당시 기억나?”
***
“부산?”
기차역으로 가는 길 한정우는 서아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부산에 가고 싶다는 말이지?”
“어, 어...... 응.”
부산은 어디로 가고 싶다는 물음에 서아가 답한 것이다.
“왜 부산에 가고 싶은 거야?”
한정우가 서아에게 물었다.
“그, 그냥.”
서아는 사실 멀리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불안 때문에 마음 편히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
그건 서아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마음에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서아는 그 불안의 원인을 알고 있다.
그저 모른 척 외면할 뿐.
떠나고 싶지만, 멀리 떠나갈 수 없던 서아는 그나마 한국을 떠나지 않는 선에서 서울에서 가장 먼 부산을 골랐다.
***
“너도 알고 있잖아. 이대로 떠나기가 두려웠단 사실을.”
그의 품에 안긴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니까 부산으로 오고 싶었던 거지? 그나마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말이야.”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그녀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는다.
“아무도 모르게 떠나자면서, 멀리 떠나자던 네가 한국을 떠나 멀리 사라지자고 했던 내 말을 듣지 않은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잖아.”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서아야. 너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네가 후회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 후회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거든.”
그녀는 그를 꼭 끌어안는다.
그런 그녀를 그가 포근히 안아준다.
결국 그녀는 오늘 역시 그에게 당하고 말았다.
***
서아는 벌써 깊은 잠에 빠졌다.
오늘 여행이 길었던 탓도 있었다.
한정우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곤히 잠든 서아를 살피고 조심스레 방을 나선다.
불이 꺼진 거실은 고요하다.
시간이 멈춰버린 가구들과 벽지.
오래된 집에서 풍기는 그 냄새.
한정우는 어둠 속에 적응된 시야로 문이 살짝 열려있는 방을 발견한다.
그 틈 사이로 방을 채운 달빛이 새어 나왔다.
한정우는 발소리를 죽이며 조금씩 다가간다.
혹여나 오랜 세월에 뒤틀린 문에서 소리가 날까 봐 조심히 문을 연다.
기울어진 천장으로 난 창문에 달빛이 텅 빈 방을 채우고 있다.
푸른빛과 회색빛이 어우러진 그 달빛은 기묘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시간을 품은 먼지들이 그 달빛 속에서 춤을 춘다.
한정우는 텅 빈 방을 둘러보다 창을 통해 달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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