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뒷면

“아 미쳐버리겠네. 이 일을 어쩌지?”
회의실에서 우 실장은 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질 못한다.
오늘이 바로 에릭이 말한 기한이 끝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이 넘어가면 이제 견습 산타의 지위가 에릭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런 상황에 한정우는 어디론가 사라져 흔적도 없다.
영월에서 놓친 이후로 몇 번이나 그의 행적을 쫓았지만, 그를 찾을 수도 없었다.
정말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우 실장은 머릿속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몇 개나 지어냈는지 셀 수도 없다.
세상의 운명을 그런 인간에게 맡겨야 한다니 우 실장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외투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낸다.
사직서다.
“그런 녀석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차라리 포기하는 게 편해.”
우 실장을 비롯하여 여러 직원에게 사직서란 조금 다른 의미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냥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의미지만, 우 실장을 비롯하여 여러 직원에게 사직서란 지금 부여받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다.
우 실장을 그런 마음을 먹을 정도로 에릭이 견습 산타가 되지 않길 바란다.
그런 인간이 산타가 된다면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평생 임의로 부여받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 세상을 추어도 보기 싫은 우 실장이다.
우 실장은 큰 결심을 하고 산타에게 가기 위해 회의실로 나선 순간 그는 선 듯 발길이 멈춘다.
그리고 돌아보며 한정우가 부탁한 두꺼운 서류 뭉치들을 보며 고민한다.
아직 희망의 끈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애쓰던 한정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의 그 눈빛.
그 결의찬 눈빛은 결코 거짓이나 연기가 아니었다.
“하아~”
우 실장은 사직서를 꼼지락거리며 만지다가 찢어버린다.
때마침 우 실장에게 연락이 온다.
폰 화면에 발신자표시제한이 뜬다.
우 실장은 단번에 그 전화가 에릭에게 온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고민하다 전화를 받는다.
“아! 우석환 실장님?”
에릭이다.
우 실장이 우려하던 사실이 들어맞는다.
“제가 정우 형에게 전화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우석환 실장님에게 연락드렸습니다.”
에릭은 우 실장에게 떠보는 식으로 묻는다.
“정우 형, 잠수탔나요? 전화가 꺼져 있던데. 히히.”
직접 보지 않아도 우 실장은 에릭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 실장은 피곤한 얼굴로 에릭에게 말한다.
“용건만 말해.”
“이런! 정말인가 보군요!”
에릭은 놀라는 척 연기하며 말한다.
우 실장은 슬슬 짜증이 몰려온다.
“잡소리 집어치우고...... 용건만 말해.”
다시 한번 장난을 쳤다간 우 실장님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올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 우 실장의 분노를 느꼈는지 에릭은 그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아쉬워하는 어조로 말한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저녁 7시까지 오시면 됩니다. 장소는...... 아시죠? 그럼, 끊습니다.”
***
서아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득 그녀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서아는 졸린 눈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한정우를 찾는다.
그가 누워있던 자리가 싸늘하게 식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일어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서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부른다.
“정우야?”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상함을 느낀 서아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나왔다.
거실의 공기는 냉랭하다.
그녀를 반기는 목소리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서아는 불길함을 느끼며 집안 곳곳을 살핀다.
그녀의 집에 비하면 자그마한 거실에 주방이 달려있고 3개의 방이 있다.
하나는 어린 시절 백아영의 방으로 방금 서아가 나온 방이다.
다른 방은 백현석과 그의 아내가 지내던 방.
그리고 마지막 방은 백현석이 화실로 쓰던 방이다.
서아는 화실의 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한다.
한정우가 그곳에 숨었을 것으로 생각한 서아는 조심조심 다가간다.
분명 그는 그녀를 놀라게 할 심산이다.
서아는 오히려 그를 놀리기 위해 몰래 다가가 문을 확 열어젖힐 것이다.
그리고 놀란 얼굴의 그를 보며 꺄르르 웃고 떠들 것이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는다.
곧 그의 얼굴을 볼 생각에 그녀는 들떠있다.
“와!”
서아는 큰 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를 반기는 건 그의 놀란 모습이 아닌 흩날리는 먼지뿐이다.
“정우야......”
서아는 허탈한 마음으로 거실로 나와 나머지 방도 살핀다.
이번에도 역시 그의 흔적이 없었다.
어젯밤의 그는 다 허상이었나?
그 모든 일은 그저 꿈이었나?
그의 따뜻한 온기와 차분한 목소리는 모두 내 착각이었나?
서아는 텅 비어버린 거실에 앉아 멍하니 창만 바라본다.
그 느낌, 그 소리 그것들은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서아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한정우가 한편으로 미웠고 한편으로 그립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혹시 한정우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아는 급히 현관문을 나선다.
버선발로 뛰쳐나가 대문을 열어준다.
그러나 그 앞에 서아는 한 번 더 실망하고 만다.
“언니야 왔다!”
지은이다.
지은은 반갑게 서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아의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어제 잘 들어갔나?”
그 입꼬리는 귀에 걸려 내려올 줄 모른다.
그러나 식어버린 서아의 얼굴을 보며 지은은 금방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은은 표정을 싹 바꾸고 미간을 찌푸리며 서아에게 묻는다.
“무슨 일 있나? 아 뭔 일인데!”
서아는 멍하니 지은을 바라보다 망설이듯 시선을 내린다.
답답한 지은은 서아의 팔을 잡고 흔들며 다시 묻는다.
“뭔 일 인데? 언니한테 말해봐라!”
지은은 빠르게 열린 현관문으로 집안을 살폈다.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없자, 지은은 경악하며 서아에게 묻는다.
“금마는? 그 새끼는 어딨노?”
지은은 자기의 생각이 틀리길 바랐다.
한정우가 서아를 버리고 도망갔을 거란 그 생각이 틀리길 바랐다.
***
숙희의 집.
지은은 부들부들 떨며 밥을 아작아작 씹고 있다.
분에 겨운 그녀의 행동에 쌀알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 문디 자슥. 내 눈에 띄면 죽이삔다.”
지은은 숟가락으로 밥상을 내리치며 당부한다.
얼마나 흥분했으면 입안에 있던 밥풀이 다 튀길 정도다.
그 옆에서 아주머니는 얼굴에 묻은 밥풀을 떼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알았다. 가스나야. 그까지 해라. 니보다 서아가 더 힘들다.”
아주머니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아를 살폈다.
서아는 고개를 숙인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서아를 걱정하며 묻는다.
“서아야 괜찮나? 하긴 뭐가 괜찮겠노. 그래도 밥은 먹어야 된다. 먹어야 힘을 내지.”
그러나 서아에게 들리지 않는다.
서아는 밥상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 모습에 지은은 광분하여 날뛴다.
“언니야가 그 새끼 찾아 줄게! 찾아서 그냥 확!”
“니는 좀 그만하라고! 이 가스나야!”
아주머니는 옆에서 서아의 눈치를 살피며 지은을 말린다.
지은이 지금이라도 뛰쳐나가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고성방가를 지르며 한정우를 찾을 기세다.
“그 새끼 이름이 뭐야! 빌어먹을 문디 자슥! 찾아내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삔다.”
“아야. 좀 참아라! 서아야 니도 좀 말려봐라. 안카면 이 가스나 나가서 생사람 잡는다.”
“아 쫌! 나봐라. 그런 새끼는 고쳐 쓰는 거 아니다. 그냥 확 마! 그냥!”
서아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말한다.
“정우, 한정우.”
“그래! 한정우라고! 내 지금 그 새끼를......”
“으아아아~”
서아가 엎드려 울기 시작한다.
“나쁜 놈! 곁에 있어 주기로 했으면서. 소중한 사람이라면서 어떻게 날 두고 가버릴 수 있어! 엉엉 엄마아아~”
아주머니는 지은의 등짝을 때리며 속삭인다.
“가시나야. 괜히 니가 난리 치가 아가 더 울잖아.”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서아의 울음을 부추겼다는 것을 깨달은 지은은 뻘쭘해하며 서아의 눈치를 살피고 속삭인다.
“아...... 내도 이럴 줄 몰랐지. 아 진짜 이 놈의 성질머리는 누굴 닮아가지고. 아!”
아주머니는 한 번 더 지은의 등짝을 때린다.
“가시나가 아직도 정신 못 차맀나?”
지은은 얼굴을 찌푸리며 아주머니 바라본다.
“어어언니이이이. 그 자식 잡아서 혼내주세요오오오. 그, 그, 그 나쁜 새끼! 으아아아~”
서아는 눈물 콧물 가득한 얼굴을 들고 지은에게 말했다.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가져와 서아에게 건네며 말한다.
“알았다. 걱정 말고 우리 밥이나 묵자.”
“네에에에엥. 어어어엉.”
도저히 그 눈물이 멈출 기미가 없자, 지은과 아주머니는 어쩔 줄 몰라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그때 무언가 떠오른 아주머니가 다급히 자리를 떠나 사진첩을 들고 온다.
“서아야. 이바라. 이게 누꼬? 누군지 알겠나?”
아주머니는 우는 아이를 달래듯 서아 앞에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서아는 억지로 울음을 참고 눈물을 닦으며 사진을 건네받는다.
“이게...... 뭐예요?”
서아는 코를 훌쩍이며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니 아이가. 그 옆에는 이 못난 가스나고.”
“이게 저라고요?”
서아는 소매로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으며 사진을 자세히 들여본다.
4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말괄량이처럼 얼굴을 찡그린 채 브이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니랑 니 엄마고.”
아주머니가 다른 사진을 건넨다.
그 사진은 평상에 앉아서 서아를 안고 있는 백아영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서아가 그 사진을 보고 있을 때 아주머니가 그녀 옆으로 사진첩을 슬쩍 내민다.
“어제 니 가고 나서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니 사진들이 몇 개 있드라.”
퉁퉁 부어버린 얼굴의 서아는 휴지로 코를 풀고 소매로 눈을 비빈다.
그리고 사진첩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아주머니에게 건네받은 사진을 다시 끼워 넣고 맨 앞을 펼친다.
“이거는 니 엄마랑 나. 어제 내가 보여줬제?”
어제 버스 안에서 아주머니가 서아에게 보여준 사진이다.
서아에게 사진을 보여주다 추억에 잠긴 아주머니가 사진을 꺼내본다.
“이때가 아마 우리가 스물? 그쯤 됐을 끼라. 우리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니까. 엄마야. 이러고 보니 지은이 니랑 나랑 영판이다.”
아주머니가 사진을 지은의 얼굴 옆에 갖다 대고 비교한다.
그리고 서아를 향해 사진을 들며 말한다.
“서아 니는 니 엄마랑 영판이고~”
얼마나 닮았는지 궁금한 지은은 아주머니에게 사진을 뺏어 서아의 얼굴과 사진 속 백아영의 얼굴을 비교하며 확인한다.
“보자. 와. 서아 니랑 똑같다. 부럽구로. 내도 예쁜 엄마 있었으면 이쁠 텐데.”
“이 가스나가? 엄마 옆에 두고 뭐라카노!”
“아! 그만 좀 때리라!”
“니가 맞을 만한 짓을 하니까 그렇지!”
“엄마도 내보고 못났다고 했잖아!”
둘은 또 서아를 앞에 두고 티격태격 다툰다.
그러나 서아는 그들의 싸움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사진 뒤에 연필로 칠해진 자국이다.
“저기...... 사진 뒤에 색칠한 흔적은 뭐죠?”
그 말에 지은은 들고 있던 사진을 뒤로 돌려본다.
“그러네. 여기 색칠되있네. 어? 편지가?”
아주머니는 지은의 손에서 사진을 뺏어 사진의 뒷면을 서아에게 보여준다.
“이렇게 사진 뒤에 글씨를 새겨넣기도 했다, 아이가. 아영이도 알걸? 사진 뒷면에 끝이 뭉툭한 막대기 같을 걸로 눌러써서 나중에 연필로 색칠하면 글자가 그대로 보이거든. 그렇게 해서 우리끼리 몰래 비밀 편지도 쓰고 그랬제.”
지은은 뒷면의 편지를 읽으며 아주머니에게 말한다.
“귀찮게시리. 와 그런 걸 하노? 차라리 대놓고 하지.”
“에이 그러면 느낌이 안산다 아이가. 서아야 니는 알제? 이거 니 할아버지보고 우리가 재미 삼아서 해본 거 아니가.”
서아는 놀란 얼굴로 아주머니에게 묻는다.
“우리 할아버지요?”
“그래! 몰랐나? 언제고? 암튼 옛날에 현석이 아저씨가 가끔 이런 방식으로 사진 뒤에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거든. 뭔가 멋있어 보여가지고 우리가 따라 해봤지.”
그 말을 들은 지은은 엄지를 세우며 백현석을 찬양한다.
“역시 우리 백현석 선생님! 눈에 뵈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줄 알다니...... 내는 절대로 모한다, 그거.”
아주머니는 그런 지은에게 비아냥거린다.
“그래. 그래. 니가 그리 좋아하는 현석이 아저씨니까 하는 거지 니는 모한다, 이거.”
지은은 발끈한다.
“엄마. 아저씨가 아니라 선생님! 알았나? 백현석 선생님이라꼬!”
딸의 반응에 아주머니는 입을 가리고 호호 웃으며 말한다.
“알았다. 고마해라. 서아야. 얘가 니 할아버지 그림 보고 그림 시작했다 아이가. 그래가지고. 어, 서아야! 서아야! 저 가시나는 갑자기 어디가노!”
서아는 귀신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간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서로 다른 짝의 슬리퍼를 신고 대문 밖을 나선다.
지은이 그녀를 따라나선다.
“서아야! 아가 왜 저카노? 서아야!”
다급히 집 밖으로 나온 지은은 서아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두리번거린다.
“서아야! 서아야!”
서아를 발견한 그녀가 서아의 이름을 크게 부르지만, 서아는 이미 저만치 멀리 뛰어가고 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