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아버지!”
“장인어른!”
백아영과 이진학은 반송장이 되어버린 백현석의 모습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이라 볼 수 없는 백현석의 모습을 믿고 싶지 않았다.
생기를 잃어버린 눈동자는 이미 그 주인이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공허했고 며칠 사이 야위어버린 얼굴에는 죽음이 드리워 있었다.
백아영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모습에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그가 선열에 오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산타에게 전해 들었지만, 이런 모습일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 심정은 이진학마저 마찬가지였다.
한평생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았던 백현석이 저렇게 무너진 꼴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먹먹함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역시 아내처럼 무너질 뻔했으나 여기서 자기마저 무너져 내린다면 안 될 거란 생각에 겨우 버티고 서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상실에 빠져 있는 백아영 이진학 부부를 대신하여 우 실장이 에릭에게 소리쳤다.
그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치며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에릭은 우 실장의 위협에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우 실장 뒤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백현석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감싸며 아이처럼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에 우 실장마저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에릭은 작은 목소리로 우 실장에게 말한다.
“여기서 소리 지르면 안 됩니다. 영감님 놀라십니다.”
마치 조롱하는 듯한 그의 언행에 우 실장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 손을 들었지만, 에릭은 더욱 그 주먹질을 바라는 것처럼 눈을 번득였다.
순간 소름을 느낀 우 실장은 멈칫했으나 다시 곧 주먹을 꽉 쥐며 그를 향해 내질렀다.
“그만.”
오브라이트가 차가운 목소리로 우 실장을 말린다.
“우 실장. 우린 지금 싸우러 이곳에 모여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또 다른 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우 실장과 당신들은 그 첫 시작을 똑똑히 보고 나중에 우리의 대의에 대해 누군가 정당성을 따져 물었을 때 그 증인이 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런 신성한 이 공간, 이 시간에는 어떤 풀 한 포기라도 소중히 다뤄야 해.”
우 실장은 재수 없는 오브라이트의 말에 혀를 찬다.
마치 이미 산타가 된 듯한 오브라이트의 말은 오만하고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꼴값 떠시네.”
그러나 우 실장의 시비에도 그는 넓은 아량을 베풀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네가 꼴값을 떠는 것인지 아닌지.”
오브라이트는 방 한구석에 세워둔 큰 액자 크기의 물건을 집어 올렸다.
그 물건은 종이 포장지로 말끔히 포장되어 있다.
“그림이군.”
이진학은 단번에 그 물건이 그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푸른 밤하늘에 하얀 별이 그려진 그림.
오브라이트가 조심히 포장지를 고정한 끈을 풀자, 그 밤하늘이 담긴 캔버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 실장은 허망하게 그 그림을 바라본다.
로즈가 아니었다면 지금 그 그림은 우 실장의 손에 들려 있을 것이다.
‘이렇게 블리첸 녀석들에게 당하고 마는 것인가?’
그렇게 우 실장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실망하고 있을 때 오브라이트는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산타는 뭘 하고 계시나? 혹시 산타도 한정우처럼 숨으셨나?”
이제 도를 넘은 오만방자한 오브라이트의 말에 우 실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한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 실장은 그의 언행을 도저히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에릭이 아닌 자기가 산타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에릭. 네 심정을 알겠군. 네가 왜 시간을 끌었는지 알겠어. 한정우가 저런 얼굴로 애타고 있을 걸 생각하니 통쾌하군.”
오브라이트는 우 실장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유쾌하게 웃는다.
에릭은 그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우 실장은 그런 그들이 마땅치 않지만, 별다른 말을 할 수 없다.
‘정우 님, 도대체 어디 계시는 겁니까? 정녕 이렇게 두고만 볼 것입니까?’
그가 할 수 있는 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한정우에게 애원이 담긴 기도를 할 뿐이다.
“말이 많군.”
그때 방안을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산타가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 아무도 없던 소파 위에 그가 버젓이 앉아 있다.
“산타!”
의도치 않던 산타의 등장에 우 실장은 놀라며 반긴다.
“산타! 도대체 어딜 가셨던 겁니까? 오늘 아무리 찾아도 그 어디에도 계시질 않으셨는데.”
우 실장은 산타에게 매달리며 애걸복걸하듯이 일러바친다.
“아니 오브라이트가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오만하다 못해 하늘을 무서운 줄 모릅니다!”
산타는 매달리며 치근덕거리는 우 실장을 귀찮아하며 밀어내며 말한다.
“그래 알고 있으니까. 떨어져 줄래.”
“산타!”
그렇게 산타와 우 실장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오브라이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 오셨습니까? 산타. 당신이 직접 행차하실 줄 몰랐습니다.”
“당연히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내가 심판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저, 저는 이곳에서 결정이 나면 당신에게 말할 생각으로......”
“마치 내가 오지 않길 바란 모양이군. 그렇지 않은가?”
산타는 오브라이트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오브라이트는 당당한 태도의 산타가 불만스럽다.
어찌 보면 그의 대행자인 한정우와 자신의 대행자인 에릭과의 싸움에서 이제 에릭이 이길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다음 산타는 에릭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산타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오브라이트를 보며 미소 짓고 있다.
그 모습에 오브라이트는 역정을 느끼며 이제 그에게 겸손을 감추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그저 조용히 골방 늙은이처럼 앉아 계시면 될 텐데 굳이 이렇게 오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오호라~”
산타는 오브라이트를 가소롭게 바라보며 턱수염을 어루만진다.
오브라이트는 이에 질세라 팔짱을 끼고 꺽다리를 짚는다.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만. 그럼, 어서 시작하게. 얼른 백현석의 소망을 이루어주란 말일세.”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에릭!”
오브라이트는 산타를 노려보며 에릭을 불렀다.
에릭은 눈알을 굴리며 오브라이트에게 다가가 그림을 건네받으려 그림을 잡지만, 오브라이트가 그림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이거 놔요.”
“에릭. 명심해라. 우리의 대의를. 우리의 이상을!”
오브라이트는 산타에게 으름장을 놓듯, 경고하듯 에릭에게 말했다.
“아무렴요.”
지금도 장난스럽게 여기는 에릭이 마땅치 않은 오브라이트는 에릭을 노려보며 말한다.
“이제 네가 산타가 될 몸이다. 이제 경각심을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나?”
에릭은 그 잔소리가 지겹다는 식으로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린다.
“알겠으니. 얼른 끝마치죠. 지금 아니면 영감님이 넘어가실 것 같은데.”
에릭은 천장을 보며 귀찮은 듯이 말한다.
오브라이트는 에릭을 한번 쏘아보고 그림을 손에서 놓는다.
에릭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백현석의 모습은 경우 생명줄을 붙잡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보기에 그가 눈을 감는다면 다시 뜨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산타와 오브라이트가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도 백아영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버거웠다.
옆에서 이진학이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기에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백현석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은 바로 그녀다.
거의 시체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에릭은 그의 앞에 그림을 내밀었다.
“영감님. 이거 영감님이 찾고자 했던 그림이야. 맞지?”
백현석은 공허한 눈으로 그림을 쫓더니 그림을 보는 순간 눈이 커진다.
그 광경을 본 우 실장은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이 경합은 에릭이 이긴 것이다.
“산타. 정말 이렇게 끝인가요?”
우 실장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은 산타를 보며 물었다.
지금 처연하게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다.
“정말 이게 끝이라고 생각해? 그저 조용히 지켜봐.”
“네?”
“셋, 둘, 하나.”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
나와 서아는 어두운 숲속 도로를 달리고 있다.
밤하늘에 오롯이 달이 떠 있다.
서울로 돌아와 남겨져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대부분이 우 실장님의 것이었다.
간혹 이진학 씨의 협박 문자가 섞여 있었지만, 그를 상쇄할 정도로 우 실장님의 메시지가 많았다.
그 메시지 중에는 에릭의 거처와 함께 7시까지 오라는 문자가 있었다.
‘정우 님. 오늘이 에릭이 말한 마지막 날입니다. 혹시나 이 문자를 보신다면 OO도 OO면 OO 번 국도를 타고 쭉 오시면 됩니다. 7시까지 오셔야 합니다.’
“늦지 않았겠지?”
서아가 불안한 마음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황이 상황을 악화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서아에게 말한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어느덧 불빛이 켜진 허름한 저택을 발견한 나는 주차장으로 보이는 공터에 차를 세운다.
그곳에는 우 실장님의 차로 보이는 검은색 세단이 주차되어 있다.
그 옆에 차를 세우고 내린 나와 서아는 저택을 내다본다.
낯선 차량의 등장에 에릭의 부하들은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
“아무래도 들여보낼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그들은 우리를 위협하려는 듯 건달다운 과장된 몸짓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어깨를 돌리며 고개를 까닥이고 시건방진 표정을 짓는다.
그들의 위협에도 서아는 기죽지 않고 성큼성큼 그들 앞으로 걸어간다.
서아는 그들 앞에 서며 그들과 눈치싸움을 하더니 조심스레 현관 계단에 발을 올렸다.
에릭의 부하들은 서아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만, 그녀를 막거나 저지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내 생각과 달리 서아가 무사히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에릭의 부하들이 내 앞을 막아선다.
그들은 나를 밀쳐내며 저택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서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는 태연하게 그녀에게 말한다.
“서아야 올라가. 나는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녀석들 나를 들여보내지 않을 생각이야.”
에릭의 부하 중 하나가 말한다.
“너는 못 들어간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맘 같아서 조용히 처리하고 싶지만, 보스께서 너를 살려두라고 하시더군.”
“그래? 그거 정말 고맙군. 나를 생각해 주다니 너무 감동적인걸.”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한 뒤 서아에게 어서 들어가라는 식으로 눈짓한다.
서아가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고 저택으로 들어간다.
나는 돌아서 차로 향한다.
에릭의 부하들은 순순히 돌아서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에 따라줄 생각은 없다.
나는 태연하게 차로 걸어가 차에 오른다.
어둡기도 하고 저택에서 운전석이 잘 보이지 않을 각도로 차가 세워져 있었기에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차를 몰고 저택에 들이받고 싶지만, 더 조용한 방법이 있다.
그 저택에는 계단이 창을 통해 훤히 드러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굴뚝으로 들어가야겠지.”
나는 눈을 감는다.
***
“정우 님!”
우 실장님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람 좋게 웃는다.
“정말 죄송해-”
“이런 나쁜!”
반갑게 맞이한 게 아니다.
그는 나에게 주먹을 날리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이다.
우 실장님은 초 단위로 표정을 바꾸며 나에게 화를 낸다.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면! 도대체! 어쩌란! 거야!”
우 실장님은 나에게 여러 차례 주먹을 내지르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읽으며 이리저리 피하며 변명한다.
“그게! 어쩔 수! 없었어요!”
뒷걸음치다 발이 꼬인 나는 결국 우 실장님의 주먹에 턱이 맞을 뻔했지만, 우 실장님 뒤에서 산타가 그를 잡아 들어 올렸기에 그 주먹은 나에게 닿질 않았다.
“서아야!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백아영과 이진학 부부는 서아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서아는 그들 부부의 울음보다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백현석 이사장님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굽어진 등, 공허한 눈빛, 앙상한 얼굴과 팔다리.
나 역시 그의 상태를 얼핏 보았을 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들을 제외하고 울상을 짓는 이들이 또 있었으니 블리첸 녀석들이다.
“형이 어떻게? 분명 내가......”
에릭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창밖을 살핀다.
내가 계단으로 ‘잠입’하여 유리창으로 에릭의 부하들을 살폈을 때 그들은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무리를 이루어 떠들고 있었다.
“바보 같은 녀석들.”
하지만 그는 당황함을 감추고 당당하게 말한다.
“형, 그래도 이미 늦었어. 이미 그림은 내가 영감님께 드렸거든.”
이미 그림이 백현석 이사장님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말한다.
“그래서. 뭐?”
“뭐?”
“고작 그 그림으로 백현석 이사장님의 소망을 들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이거 실망인데”
오히려 도발하는 내 모습에 에릭은 다시 당황한 얼굴을 짓는다.
그리고 그 얼굴은 곧 새파랗게 질린다.
“그래. 그럼, 정우 군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백현석 이사장님이 멀쩡한 얼굴과 모습으로 나에게 물었다.
- 작가의말
정말 슬프고 원통할 뿐입니다.
제가 감히 유가족분들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가족을 잃 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기에 너무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갑자기 허무하게 저버린 그 삶들이 너무 가엾고 슬픕니다.
이렇게라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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