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비록 제정신이긴 하나 백현석 이사장님은 기력이 쇠한 탓에 좀처럼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병상 위에 가만히 앉아 있을 뿐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없었다.
숨을 쉬는 것도 그에게 있어 힘겨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건 로즈가 마음속으로 전한 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딱 들리더군. 그 로즈라고 했나? 그 사람의 마음이 말이야.”
백현석 이사장님은 아직 자신에게 산타의 기본 소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모양이다.
“우 실장님께 듣기론 아직 이사장님도 견습의 지위가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산타에게 듣지 못했나요?”
백현석 이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에게 산타가 되길 포기한단 말했을 때 그는 그저 알겠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났어. 나는 그렇게 끝난 줄 알았지.”
하지만 나는 그에게 의문점이 들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능력을 쓰지 않으셨나요?”
“아니. 그 이후로 능력을 쓴 적이 있었어.”
백현석 이사장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말한다.
“마음을 읽는다는 건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이야.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나는 해송재단을 운영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지원하고 그들을 만나보았지.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들어보았어...... 혹시 저번에 내가 이야기했던 진학의 어머니를 기억하나?”
이사장님은 나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진학 씨의 어머니.
아들을 버리고 도망가 도박 빚에 허덕이던 그 사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들으면 어떨 것 같나?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나?”
그가 직접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결국 나는 그들에게 싫증을 느낀 걸까? 언젠가부터 마음이 들리지 않았네. 아니 듣지 않았지. 그 편이 내 정신에 이롭더군.”
이사장님은 능력으로 인간의 추악함을 엿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마음을 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를 했다는 사실이 정말 허무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는 자기 팔을 들어 보이며 말한다.
“내 팔을 보게나. 거의 말라비틀어질 정도지. 나는 능력도 이 근육과 같다고 생각하네.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질 뿐이야. 그렇게 내 능력 또한 사라진 줄 알았어.”
백현석 이사장님은 밤하늘을 올려다 보듯 천장을 보며 말한다.
“내 정신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렸지, 그런데 갑자기 그 목소리가 들렸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가 나를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더군.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렸지.”
산타란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
아직 견습 산타의 지위가 남아 있는 그에게 애타는 로즈의 마음이 전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산타는 저에게 기억을 지우고 지옥 불길 속에 집어넣는다고 협박했는데 이사장님께 그러진 않은 모양입니다. 그에게 산타가 되길 포기하셨는데도 기억이 남아 있는 걸 보면.”
“하하하, 산타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나? 맞네,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어.”
“왜 그러셨을까요?”
“응?”
백현석 이사장님은 뜬금없는 내 질문을 의아하게 받아들인다.
“그냥. 산타께서 자네에게 장난을 치신 게 아니겠나?”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저라도 그럴 거예요. 지옥 불길 속에는 집어넣지 않아도 기억은 지울 겁니다.”
그 말에 백현석 이사장님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부로 세상에 발설할 수 없는 사실을 그대로 기억에 남겨둔다니 산타가 되길 포기했을 때 기억을 지우는 것은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백현석 이사장님은 산타의 자리를 포기했음에도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째서 그랬을까?
나는 그에게 말한다.
“산타는 다른 사람의 소망을 이루어주는 존재. 산타가 했던 모든 행동은 다 그 이유로부터 비롯되는 거예요.”
아직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백현석 이사장님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나는 그의 앞에서 두 손으로 망원경을 흉내 내며 눈앞에 갖다 댄다.
여전히 그의 후광은 온화하게 빛을 낸다.
“그건 마음을 볼 때의 모습 아닌가?”
“네 맞습니다. 아직 이사장님의 후광은 건재하군요. 이사장님도 한 번 해보세요.”
백현석 이사장님은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고 가만히 내려본다.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다.
“다시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는 팔에 힘이 없어 떨리지만, 조금씩 천천히 손을 눈가에 갖다 댄다.
그리고 나를 본다.
그는 흠칫 놀라더니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한다.
“자네에게서 무표정한 얼굴의 아이가 보이는군. 공허한 눈빛, 굳은 얼굴. 희망조차 보이지 않아......”
예상치 못한 혹평에 나는 뻘쭘함에 머리를 긁적인다.
“뭐...... 저는 천천히 보시고. 저기, 저기를 보세요.”
나는 문을 가리켰다.
“문?”
“네.”
문에 무언가 특이한 점이 있는지 유심히 살피던 이사장님은 나에게 핀잔을 주듯 말한다.
“자네 이 능력이 사람에게 통한다는 걸 알지 않나? 저건 그냥 문이야. 사람이 아니라고.”
“네~ 아무렴요.”
그는 나에게 콧방귀를 뀌며 말한다.
“싱겁기는~ 알면 됐어. 살아있지도 않은 문이 어떻게 소망이 있겠나. 우리는...... 어......”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백현석 이사장님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놀라움과 반가움 때문에.
그의 말이 맞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오, 옥경아......”
***
“야!”
현석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뒤돌아본다.
그의 쌍둥이 여동생 옥경이다.
“옥경아 왜?”
옥경은 터벅터벅 그에게 걸어가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현석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
“내가 우리 둘이 있을 땐 내가 누나라고 했지! 어디서 반말이야!”
현석은 머리를 매만지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옥경을 쳐다본다.
하지만 곧 옥경의 날카로운 눈매에 깨갱거리며 시선을 피한다.
옥경은 현석이 그녀보다 5분 일찍 나왔다는 사실에 그를 오빠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다른 형제들에 비해 약하고 여린 그의 성향 탓에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둘이 있을 때는 누나라고 부르라고 옥경이 억지를 부린 것이었다.
“그림 그리고 있었어?”
현석에 손에 쥔 연필과 종이를 발견한 옥경이 현석에게 물었다.
“어, 어...... 나비를 그리고 있었어.”
현석은 판잣집이 가득한 청계천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현석은 그리고 있던 그림을 옥경에게 보여준다.
현석의 나비는 정적으로 멈춰져 있는 것이 아닌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나비의 모습이다.
실제로 나비가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듯하다.
옥경은 매번 현석의 그림을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림에서 그림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착시가 느껴졌기 때문에.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현석의 능력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네 그림이 좋다고 생각해.”
현석은 옥경의 칭찬에 헤벌쭉 웃으며 볼을 긁적인다.
“정말?”
“응! 그런데 왜 아버지는 이 그림을 싫어하실까?”
옥경은 의문이었다.
현석의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건 나이가 어린 옥경이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는 현석의 그림을 마땅치 않게 여기셨다.
옥경은 몰랐지만, 현석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현석은 몇 년 전 깊은 밤 아버지를 찾아온 사람과 나누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내로 태어난 녀석이지만, 음침하게 그림만 그리는 아이입니다. 그릇이 큰아이는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한 말이다.
사내대장부 같은 다른 아들들과 달린 소심하게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들이 석연치 않은 것이다.
왜소한 현석과 달리 그의 형들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호탕하고 당당한 성격과 맞물려 그들은 어린 나이라 하더라도 일제에 맞서 싸웠다.
첫째 형은 현석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군이 쏜 총알에 맞아 죽었다.
둘째 형은 현석이 갓난아기일 때 일본군에게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형은 소리소문도 없이 군에 들어갔다.
현석과 정반대의 인물들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 시간이 늦었어.”
하늘은 벌써 기울어 새로운 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노란 햇빛이 점점 주황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그림을 그리다 하루를 보내버린 걸 깨달은 현석은 급히 연필 몇 자루와 종이를 챙긴다.
현석이 이리 서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큰일이다. 어머니가 시킨 심부름도 못 했는데.”
현석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현석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이모에게 빌린 인두를 다시 돌려주러 가던 길이었다.
그러다 날아다니는 나비를 발견한 현석은 홀린 듯 나비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
“아! 인두! 어떡하지? 인두가 사라졌어.”
나비에 한 눈이 팔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이모에게 돌려줘야 할 인두는 이미 사라졌다.
옥경은 그런 처지의 현석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혀를 찬다.
“쯧쯧, 넌 이제 큰일 났다.”
아연실색하며 현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다.
분명 이대로 돌아간다면 부모님께 혼날 게 뻔하다.
특히나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팔려 인두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현석은 도무지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어 입이 삐쩍 말라간다.
현석의 표정만으로 그의 기분을 알 수 있는 옥경은 입을 가린 채 실실 웃는다.
사실 현석을 찾으러 돌아다니던 옥경은 나비를 그리고 있던 그를 발견했다.
그림을 그릴 땐 세상엔 오로지 그와 피조물뿐이다.
옆에서 누가 그의 이름을 크게 불러도 그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는 옥경은 그의 옆에 놓인 인두를 챙겨 이미 이모에게 전해주고 오던 길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그가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옥경은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의 현석의 팔을 붙잡고 집으로 향한다.
옥경과 현석은 종로 근처에 있는 사진관 앞에 멈춰 섰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진관이다.
“들어가자.”
옥경이 현석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직 인두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현석은 들어가기가 망설여진다.
옥경은 이 정도면 골려줄 대로 골려줬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사실을 말한다.
“내가 이모에게 인두 돌려줬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자. 부모님이 기다리실 거야.”
옥경은 장난스럽게 웃어넘겼지만, 현석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피가 마를 정도로 시달렸다.
현석은 그런 옥경이 얄미웠지만, 자기 대신 무사히 인두를 전해준 옥경이 고마웠다.
“다녀왔습니다.”
사진관으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계셨다.
어버지가 현석에 들린 종이와 연필을 발견하자, 집이 내려앉을 정도로 한숨을 크게 쉰다.
아버지의 한숨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는 현석은 급히 종이와 연필을 뒤로 숨겼다.
아버지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한다.
“얼른 들어가 보거라 너희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거다.”
“네.”
옥경은 해맑게 대답하고 사진관 안쪽으로 들어간다.
사진관 안쪽에는 자그마한 부엌과 사람 5명 정도가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이 나온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셨다.
“현석아 이번에 뭘 그렸니?”
아마 현석이 제대로 심부름했다면 이미 1~2시간 전에 집에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건 현석이 그림을 그리느라 심부름을 까먹었다는 의미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어머니가 옥경을 시켜 현석을 찾은 것이다.
“죄송해요......”
어머니는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무슨 그림이니?”
현석은 머뭇거리며 종이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나비요.”
어머니는 그림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우리 아들이네.”
그리고 그림을 다시 현석에게 돌려주며 말한다.
“이제 저녁을 먹자꾸나, 아버지도 많이 시장하실 거야.”
***
“현석아.”
옥경이 현석을 불렀다.
이미 부모님은 잠에 들어계신다.
“응?”
현석도 깨어있었다.
“너는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
현석은 화가가 될 거란 그 한마디가 좋았다.
그림을 보시며 온화한 미소를 짓는 어머니와 나를 격려해 주는 옥경의 존재가 큰 힘이 된다.
현석은 이런 나날이 계속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족과 함께 누워 잠을 이루는 날이 오늘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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