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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하우스
작품등록일 :
2024.10.01 11:12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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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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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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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별

DUMMY


분노와 증오를 품은 그 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불렸다.


그 화마는 마을 전체를 먹어 치우고도 만족하는 법을 몰랐는지 곯은 배를 채우기 위해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겨우 현석을 부축하고 서 있는 옥경에게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기란 어려웠다.


지나왔던 길모퉁이를 지나 현석을 따라왔던 길로 돌아가지만, 모든 걸 가로막는 뜨거운 불은 옥경이 가만히 길을 찾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더구나 그 뜨거운 열기는 옥경의 몸을 뜨겁게 달구었고 그로 인해 독은 그녀의 몸에서 더욱 활개를 친다.


그것은 옥경 역시 몸으로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 어떤 것도 옥경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거대한 불길을 그녀의 앞을 막고 독은 점점 그녀의 몸을 갉아 먹고 있다.


심지어 현석은 몸을 축 늘어뜨리고 옥경에게 기대어 있는 신세다.


옥경은 현석의 팔을 어깨에 두른 채 넋이 나간 얼굴로 길 한가운데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는 사그라들고 무력감이 그녀를 지배한다.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고 한들 그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굳이 발버둥 쳐야 할까?


그녀의 앞에서 아른거리는 불길은 그녀에게 말한다.


“포기해. 그럼, 편해.”


옥경의 아픔마저 잊을 정도로 그 불길은 옥경의 앞에서 그 화려함 춤사위를 펼치며 그녀를 현혹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불의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옥경은 그 뜨거운 열기가 점점 그녀의 목을 옥죄어오고 있다는 걸 모른 채 홀린 듯이 불을 바라본다.


마치 그녀 자신이 불나방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때 기대어 있던 현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녀를 밀쳐내지 않았다면 그녀의 앞머리가 타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불길의 매혹적인 몸짓에 정신이 팔려 겨우 힘을 주고 서 있던 다리가 풀려버린 것이다.


바닥에 털썩 쓰러진 현석은 슬며시 눈을 뜨고 얼굴을 한껏 찡그린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현석은 마치 무언가를 놓고 온 사람처럼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그리고 옥경과 옥경의 주변을 살피더니 고개를 획 돌리며 서슴없이 돌아왔던 길로 돌아간다.


“현석아! 현석 엌!”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현석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숨이 잠시 멎는다.


그녀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군다.


경련이 일어나며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바닥에 쓰러진 옥경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현석을 두고 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살기 위해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숨을 쉬는 것에 집중한다.


조금씩 숨을 쉬어가며 현석이 사라져간 길을 살핀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저 불길 속에서 겨우 현석을 끄집어냈건만 그는 옥경의 마음을 짓밟고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으니 말이다.


옥경은 현석이 돌아간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저 그 보석함 하나 때문에.


물론 그 함은 현석과 옥경에게 있어 가족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만, 죽음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현석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옥경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원통하게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른다.


“아...... 으억...... 어...... 머니, 아버......,지.”


왜 나만 두고 먼저 가버렸냐고, 왜 나에게 저것을 맡겨두고 떠나 버렸냐고, 이럴 거면 나도 같이 데려가지, 그랬냐고.


부모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네가 네 오라비를 잘 챙겨주어야 한다.’


옥경은 몸을 웅크린 채 배를 부여잡고 실성한다.


이렇게 절망적인 와중에도 오빠를 부탁한다는 그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나는?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옥경은 바닥을 치며 부모를 향한 원망을 내뱉었다.


전쟁 앞에서, 이 험난 세상 앞에서 그녀는 아직 어른도 되지 못한 아이인 것을.


지금 그녀의 몸과 마음은 헌신처럼 너덜너덜한 상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미운 부모의 얼굴이 떠올라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눈앞이 어지러워 제대로 걸을 수 없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부모님의 부탁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공기와 주변을 가득 채우는 퀴퀴한 냄새.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옥경에게 불길 속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며 그녀에게 경고다.


하지만 옥경은 다리를 절뚝이며 그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지옥을 연상케 하는 뜨거운 불길과 아지랑이들이 하늘을 덮었다.


무자비하게 피어오르는 화마는 마치 현석을 구하러 들어온 옥경을 조롱하듯 일렁거린다.


어차피 현석이나 옥경이나 이 불길 속으로 들어온 이상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며 그녀를 비웃는다.


마치 순순히 목숨을 내놓으라는 듯 그녀에게 절망을 심는다.


그러나 다시 그녀가 좌절하게 만든 건 그것의 조롱이 섞인 움직임이 아닌 그녀의 몸이었다.


그녀는 피를 쏟아내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냥 포기하자.”


옥경은 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눈을 끔벅인다.


눈을 뜨면 사납고 거칠어 보이는 불길은 눈을 감을 땐 포근한 이불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녀가 눈을 감을 찰나.


“살려주세요!”


귀를 찢어질 정도로 울려대는 외침이 들린다.


옥경은 번쩍 눈을 뜨며 아픈 몸을 일으킨다.


문득 그녀의 눈에 현석이 보인다.


그 단말마가 현석의 것으로 생각한 옥경은 죽을힘을 다해 천천히 일어나 불편한 걸음으로 현석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현석의 것이 아니었다.


현석은 겨우 건진 가족사진 한 장을 쥐고 바닥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절망과 충격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다시 그 비명이 들린다.


그건 그 아이, 아니 아이의 얼굴을 한 괴물의 절규였다.


온몸에 불이 붙은 그는 흉측한 모습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불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의 몸짓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끔찍하다.


모든 살이 녹아내리고 피부가 터져 피가 새어 나온다.


그가 그렇게 벌을 받고 있음에도 그의 몸에 붙은 불은 추어도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가 오히려 괴로워하고 아파할수록 그에게 달라붙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도저히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어 옥경은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현석은 그 모습을 끝까지 쳐다보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 현석은 눈을 감기도 고개를 돌릴 수도 없던 것이었다.


보석함에 정신이 팔린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로 보아 드디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의 비명과 발악하는 그 몸짓이 현석의 정신을 뒤흔든 것이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현석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얼른 현석을 일으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지만, 이제 옥경에겐 그를 부축할 힘은 없다.


그래서 옥경은 현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 도망칠 수 있다면 바랐건만 이 바보 같은 녀석은 옥경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다.


그때 옥경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아버지의 함이었다.


옥경은 겨우 보석함을 챙긴 다음 현석의 눈앞에 흔들었다.


현석의 눈동자가 보석함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옥경은 그대로 보석함을 들고 절뚝이는 다리로 뛰었다.


옥경은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현석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불은 퍼질 대로 퍼져 안전한 곳이 없었다.


그때 옥경의 눈에 들어온 건 우물이었다.


우물 뒤에는 뒷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운이 좋은 걸까? 아직 그곳까지 불이 번지지 않았다.


그래서 옥경은 입에 피를 머금고도 멈추지 않고 뛰었다.


고작 하나 남은 핏줄 때문에. 그 녀석과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현실이 아닌 과거에 매달리는 바보 같은 놈 하나 때문에 그녀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다.


겨우 서 있을 수 있던 그녀가 보석함을 들고 불타는 마을 뛰어나올 수 있었던 건 현석 하나라도 살리고자 다짐한 그녀의 결의 덕분이었다.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도 말이다.


옥경과 현석은 겨우 숲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멈출 줄 모르는 불은 결국 그들이 도망치고 있는 숲까지 쫓아온다.


그 불에 어떤 한이 서려 있는지 몰라도 그것은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옥경은 몸은 이제 제풀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


결국 그녀의 몸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닥에 털썩 쓰러진다.


그녀의 입에 머금고 있던 피가 바닥에 흩뿌려진다.


그녀가 안고 있던 보석함은 그녀의 앞에 내팽개쳐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피 때문에 쿨럭이면서도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위해 애를 쓴다.


미동도 없는 손가락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조금씩 움직여보지만, 그녀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뒤를 따르던 현석은 넘어진 옥경을 신경 쓰지도 않고 그녀의 앞에 놓인 보석함을 챙기느라 급했다.


차가운 흙바닥에 몸져누운 옥경은 그저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현실이 괴롭고 슬프다.


어두운 밤 식어버린 땅에서 소름 끼치는 한기가 그녀의 몸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녀는 이제 죽을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볼 수 없었지만, 사실 보석함을 챙긴 현석은 옥경을 일으켜 세워 함께 도망갈 생각이었다.


현석은 그들을 쫓아오는 불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 속에 옥경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끝까지 다다른 화마는 먹이를 앞에 둔 늑대처럼 그들의 주위를 서성거린다.


그것은 현석이 자기 먹이를 가지고 도망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결국 현석은 거대한 화마가 드러낸 송곳니에 겁을 먹고 주저앉고 만다.


그것은 쓰러진 현석을 조롱하며 옥경을 덮친다.


“꺄아아악!”


몸이 타오르며 그녀의 서러운 마음이 담긴 비명이 들린다.


현석의 두 눈동자에 비친 증오가 가득한 불길은 그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옥경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몸을 짓밟고 마구잡이로 할퀴며 그녀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린다.


“으아아아!”


현석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절망하고 좌절하며 고함을 질렀다.


결국 그는 옥경을 내버려두고 점점 뒤로 물러서다 떨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난다.


그녀의 몸은 밖에서부터 야금야금 타들어 가고 그녀의 마음은 속에서부터 곪아간다.


매정하게 그녀를 두고 멀어지는 현석의 모습에 옥경은 억울하고 한이 맺힌다.


원망스럽다.


허무하다.


옥경은 현석에게 소리친다.


“살려줘!”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던 그녀였지만, 불이 주는 고통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괴로운 것이었다.


그 고통이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려던 그녀의 다짐을 철저하게 망가뜨린 것이다.


뇌를 관통하는 듯한 옥경의 목소리에 현석은 멈칫하며 돌아선다.


잔악한 손길이 그녀를 완전히 덮친다.


“오빠! 오빠!”


그제야 현석은 손에 붙들려 있던 보석함과 죽어가고 있는 옥경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드디어 정신이 돌아온 현석은 죽어가고 있는 옥경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흉포한 불꽃은 현석이 다가오길 거부한다.


그를 향해 다시 뜨거운 송곳니를 내밀어 위협한다.


옥경과 현석 사이로 불타는 나무가 쓰러져 그들을 가로막은 것이다.


“오...... 옥...... 옥...경아.”


현석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겨우 옥경을 부른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그의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 잔인무도한 장면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석은 자기 머리를 내려치며 울음을 터뜨린다.


머리를 마구 쥐어뜯고 자기 뺨을 때리며 미련하고 한심한 자신을 원망하고 저주한다.


“오빠!”


죽어가는 여동생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울려 퍼진다.


현석은 타들어 가는 옥경의 모습을 보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결국 밤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불길에 현석의 다시 정신을 잃고 만다.


그 잔악한 것은 현석에게 말한다.


“벗어나라. 도망가라. 뒤돌아보지 마라.”


다시 정신을 잃은 현석은 하나뿐인 동생을 내버려둔 채 죽도록 뛰었다.


하늘을 덮은 불은 어두운 산길을 환하게 밝힌다.


앞만 보고 달리고 있던 현석의 오른쪽으로 옥경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빠.”


등줄기에서부터 소름이 듣는다.


그때 그의 옆 수풀에서 그녀가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오빠.”


이번엔 왼쪽이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 죽어가는 옥경이 그를 향해 손을 내민다.


“아니야. 아니라고!”


현석은 분명 헛것이 분명하나 선명하게 보이는 옥경의 모습에 점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다.


점점 그의 팔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는다.


다리가 무겁다.


도저히 땅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현석은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앞으로 고꾸라진다.


넘어지면서도 현석은 보석함을 놓지 않았다.


나자빠진 현석은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그의 발이 땅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리고 만다.


현석은 그것이 나무뿌리인지도 모른 채 비명을 지른다.


“으아아아!”


그는 누군가 그의 발목을 덥석 잡은 줄로 알았다.


엎드린 채 다른 발로 나무뿌리에 걸린 자기 발을 세차게 내리쳤다.


몇 번의 발 구름 끝에 풀려난 현석은 몸을 웅크리며 보석함을 끌어안는다.


그의 주변에는 벌써 그를 잡으러 온 지옥의 불길이 그를 둘러싼다.


그는 벌벌 떠는 손으로 꼭 쥐고 있던 가족사진을 펴본다.


아버지와 어머니, 셋째 형님과 나 그리고......


현석은 그 얼굴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의 자기 파괴적인 성향과 약하고 여린 심성이 맞물려 제 주인이 무너져 내리기 전 그의 머리가 그의 기억 속에서 옥경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그림을 그릴 때 함께였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스치듯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해맑게 웃는 단발머리의 소녀.


그 얼굴이 일그러지고 녹아내린다.


현석은 떨리는 손으로 그 소녀의 얼굴을 사진에서 찢어낸다.


그 소녀의 얼굴은 바람을 타고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


현석은 찢어진 사진을 보석함에 넣는다.


가족들의 추억이 담긴 보석함에.


현석은 이제 그 소녀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에겐 동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럴 터였는데.


그가 보석함을 닫았을 때.


보석함 위로 피가 묻은 손이 보인다.


현석은 벌벌 떨며 그 손을 따라 고개를 든다.


그 소녀가 현석을 보고 있다.


***


그 뒤로 현석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눈을 떴을 땐 이미 그는 박홍식과 같이 있었고 부산으로 향하는 피난길에 오른 상태였다.


어떻게 산에서 내려왔는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가 불길에 휩싸이기 전 내린 비 덕분에 겨울 살아남은 것도 말이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상실을 겪은 그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기억을 지웠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 홍식의 아버지와 홍식이 그에게 보석함을 돌려주려 할 때 그가 벌벌 떨었던 것도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반응이었다.


그 보석함을 볼 때마다 머리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는 홍식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오며 떠오른 기억은 온전치 않았다.


무언가 잃어버린 허전함.


그 허전함이 무엇인지 현석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죽은 소녀의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더 이상 그는 그것에 매달리지 않았다.


과거에, 추억에 매달리지 않고 보석함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과거를 얽매이지 않고 그의 삶을 살아갔다.


그의 부모가 바란 것처럼.


그리고 살아가며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던 허전함과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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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쿠키 NEW 12시간 전 1 0 15쪽
106 산타의 나라 25.02.05 2 0 12쪽
105 성인이란 무엇인가? 25.02.04 3 0 12쪽
104 정해진 운명 25.02.03 4 0 11쪽
103 재회 - 1부 끝 25.01.18 6 0 13쪽
» 마지막 이별 25.01.17 6 0 16쪽
101 형과 동생 25.01.16 6 0 15쪽
100 마을 25.01.15 4 0 10쪽
99 도망 25.01.14 4 0 13쪽
98 열매 25.01.13 5 0 15쪽
97 곳간 25.01.11 5 0 14쪽
96 그 남자와 아이 25.01.10 4 0 12쪽
95 두번째 이별 25.01.09 6 0 15쪽
94 이 대감 25.01.08 5 0 13쪽
93 새벽녘 25.01.07 6 0 11쪽
92 다음날 새벽 25.01.06 7 0 11쪽
91 그날 밤 25.01.04 7 0 9쪽
90 쌍둥이 25.01.03 7 0 13쪽
89 그동안 수고했네. 25.01.02 7 0 13쪽
88 극적인 연출 25.01.01 7 0 14쪽
87 살아 돌아왔다. 24.12.31 7 0 14쪽
86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24.12.30 7 0 14쪽
85 미친놈 24.12.28 8 0 13쪽
84 그럼, 돌아가자. 24.12.27 7 0 10쪽
83 사진 뒷면 24.12.26 7 0 13쪽
82 마주해야 할 시기 24.12.25 8 0 11쪽
81 그 얼굴이면... 24.12.24 8 0 10쪽
80 우연 24.12.23 8 0 12쪽
79 부산밤바다 24.12.21 9 0 11쪽
78 키링 24.12.20 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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