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 1부 끝

현석은 마음속으로 느껴지는 결핍이 그저 가족을 잃은 상실이라 믿은 채 살아갔다.
그 결핍이 머릿속에서 지워진 옥경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걸 모른 채 말이다.
부모님이 지켜주신 삶을 살아가며 지어주신 이름을 널리 알려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소중한 딸을 품에 안아도 채워지지 않은 결핍은 그저 그가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그에게 산타가 찾아와 묻는다.
소망이 무엇이냐고.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현석은 자기 소망이 무엇인지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도대체 여기서 더 바랄 게 무엇이 있는가?
그럼에도 산타는 그에게 말한다.
너의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게 무엇인지 너는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고.
결국 그는 산타를 따라다니며 그를 도와주면서 그것에 대한 실마리를 얻고자 했다.
산타의 나라에서 견습 지위에 대한 정식 인증을 받고 산타를 도와 사람의 소망을 이루어주기도 했으며 고귀한 성인이 선열에 오를 때 곁에서 지켜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남아있는 결핍이 좀 쑤시듯 그를 괴롭혔다.
그러던 중 그 옛날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홍식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그 함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된 탓일까?
보석함을 보면 느껴지던 통증은 더 이상 불쑥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당시의 기억을 잃어버린 현석은 그저 가족사진과 아버지의 얼굴이 담긴 그림을 떠올리며 보석함을 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찢어진 가족사진 한 장.
아버지, 어머니, 형님, 나 그리고......
잊고 있던 단발머리의 소녀가 다시 그의 눈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 순간 잠시 정신을 잃은 그는 본인이 발작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딸아이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마음에 자리 잡은 허전함과 결핍을 마주한 현석은 이제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의 마음속에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러나 현석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잊고 있던 존재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도, 얼핏 곁눈질로 떠올린 그때의 기억도 그에게 좌절, 슬픔, 미안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날 산타가 찾아와 그의 소망에 관해 물었을 때 현석은 은근슬쩍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를 괴롭히는 이 기억과 감정이 정녕 그의 소망이 맞는지 물었다.
내심 아니길 바라면서 말이다.
자기의 소망을 깨우친 현석을 보며 산타는 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현석은 가슴은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공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세상의 온갖 슬픔이 새어 들어왔다.
현석은 그 모진 슬픔을 자기의 소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뤄질 수 없기에 애써 외면한다.
그 역시 이런 자신이 추하고 부끄럽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현석은 그것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 쌓아 올린 추억으로 그 추악한 자신의 모습과 기억을 덮은 것이다.
새로운 인연들과 찍은 사진들, 소중한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들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 소망은 피할 수 없는 화살 같은 것.
싹을 피운 그것은 현석 몰래 꽃을 피워낼 정도로 지독하게 현석의 마음속에서 살아남았다.
결국 그는 그것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십 번 결심하고 포기하길 반복했다.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지만, 결국 캔버스가 아닌 사진 뒷면에 그려 넣은 것처럼.
시리도록 푸른 밤하늘을 그려놓았지만, 막상 별을 그리지 못해 그림을 완성하는 데 수많은 시간이 걸린 것처럼.
속죄를 위해 그림을 완성 시켰지만, 그 대상이 이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포기하려 했던 것처럼.
겨우 떠올린 그 얼굴을 다시 잊기 위해 일부러 약물을 투여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는 없다.
드디어 그는 그 소녀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
현석은 그녀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옥경이 맞는지 믿을 수 없을뿐더러 지금까지 곁에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원통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으로 직접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를 가두고 괴롭힌 얼굴이지만, 다시 보고 싶고 그리운 그 얼굴.
현석은 드디어 하나뿐인 동생 옥경과 마주하고 그날의 기억을 마주한 것이다.
옥경 역시 그녀의 오빠처럼 눈물을 흘린다.
외로이 죽어가던 그 당시의 슬픔과 애통함이 떠올라 제 오빠의 품속에서 몸을 떤다.
현석은 옥경의 등을 토닥이며 말한다.
“미안하다. 옥경아. 미안하다.”
오빠의 사과에 동생은 울분이 터져 쌓아 두었던 원망을 내뱉는다.
“오빠. 너무 어둡고 무서웠어.”
애달픈 동생의 투정에 현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느낀 아픔은 그녀가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더욱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옥경 또한 그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녀는 그의 곁에서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나날을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나서지 않고 망설인 건 그가 사실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한 오라버니가 미웠기 때문이다.
그 험난한 고초를 함께 겪고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같은 뱃속에서 같은 날에 태어난 오빠를 저버릴 수 없었던 옥경은 무의식적으로 마음 한구석에 작은 희망을 품었다.
언젠가 그가 그녀를 알아봐 줄 거라는 희망을.
그렇기에 그녀가 일부러 아무도 모르게 한정우와 떠났을 때 느꼈던 불편함을 느낀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린 그들의 재회는 가슴 아프면서도 따뜻하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한정우는 시큰해지는 콧잔등을 훌쩍이며 돌아선다.
둘이서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잔뜩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정우는 백현석 이사장과 서아를 내버려둔 채 방을 나왔다.
***
“제대로 한 건 했네~”
계단을 내려온 나에게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산타가 말했다.
나는 후련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용케도 정답을 찾았군. 어떻게 알아낸 거야?”
산타는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우연히 사진의 뒷면에 그려진 소녀의 얼굴을 발견하였고 그 소녀가 백현석 이사장님의 입에서 튀어나온 옥경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날 달빛 아래에서 기도하던 서아의 마음은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었다.
바로 사진 뒷면에 그려진 소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때 난 서아가 옥경의 환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비, 치즈, 모찌같이 다시 생을 부여받은 이들이 있는데 환생이라고 없을까?
그녀에게 떠나자고 했을 때 흔들리던 눈동자, 길을 떠나는 내내 내뱉은 한숨.
이사장님을 미워하지만,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녀의 마음은 직접 듣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다 아시잖아요.”
어차피 산타도 알고 있을 것이기에 나는 자세한 설명은 대충 넘겼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그에게 묻는다.
“그나저나. 이게 가능한 겁니까?”
“뭐가?”
“환생이요. 죽었던 사람을 다시 환생시키는 것도 산타의 기본 소양인가 해서요?”
내 말에 산타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환생이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가능하지.”
“정말입니까?”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산타를 올려본다.
산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런 게 산타라는 거야. 소망이라면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게 산타지. 물론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되는 건 아니야. 필요한 서류와 거쳐야 할 싸인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아직 모를 거야.”
“그럼, 이사장님 말고도 이렇게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소망을 이뤄드리죠?”
산타는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백현석 같은 경우는 운이 좋은 경우야.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산타의 기본 소양이 남아있었고 옥경일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서아도 특이한 경우였으니 서로 만날 수 있던 거지. 그러나 대게 평범한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쳐. 언젠가 스쳐 지나간 사람이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지. 아니면 아직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갈 수도 있다는 거잖습니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나의 물음에 산타는 입을 꾹 다물고 고민에 빠진 듯 망설인 후 말한다.
“그래도 그리운 사람이 어딘 가에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이 세상 어딘가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것으로 생각해.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완벽한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들의 소망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산타가 내 생각을 읽고 말한다.
“물론 이들처럼 서로 만나면 좋겠지.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정말 큰 노력이 필요해.”
“노력이요?”
“그래. 재회라는 건 서로가 다시 만난다는 것.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어느 한쪽만 소망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야.”
“그 말은 서아도 역시 백현석 이사장님을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는 거죠? 그런데 보통 다른 사람들도 서아처럼 재회를 바라지 않을까요?”
산타는 내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보통 다들 그래. 그런데 그게 어렵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세상에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가 말했지. 서아처럼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특이한 경우라고. 서아는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했어. 그 과정은 자기가 죽었을 때의 고통, 환경, 싸늘하게 식어가는 감각 등 그때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복기하는 과정이야.”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럼, 죽은 사람보고 두 번 죽으라는 뜻이잖아요!”
“그래. 다들 서아처럼 그리운 인연을 다시 만나길 희망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좀처럼 재회가 이뤄지지 않아.”
마음속에 남은 찝찝함이 남는다.
어쩜 그리 가혹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일부러 갈라놓으려는 것이 아닌 이상 그토록 힘든 과정을 왜 겪어야 하는 것인가?
내 마음을 읽은 산타는 내 이마를 툭 치고 내 앞을 가리키며 말한다.
“골치는 그만 썩이고 앞을 봐.”
갑자기 나타난 우 실장님이 나를 향해 달려들어 헤드록을 건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악! 우 실장님!”
풀어달라고 그의 팔을 쳐도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한정우!”
그리고 이진학 씨가 달려들어 우 실장님의 팔에서 나를 빼낸 뒤 내 멱살을 잡고 흔든다.
“대체 서아랑 어딜 갔던 게야!”
이젠 우 실장님과 힘을 합쳐 나를 때려죽이지 못해서 안달이다.
“정말 못 살겠다니까! 그만해 여보!”
백아영 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들이 나를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하하. 정우 님 고생하셨습니다.”
의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땐 크루소 회장님과 엘리자베스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아니 어째서 두 분이 여기에......”
그리고 그들 뒤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난다.
“저도 있어요.”
로즈다. 죽은 줄 알았던 로즈가 멀쩡히 살아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는 나는 눈이 동그래진다.
그리고 저절로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래 내가 이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고생했지.’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 걱정해 주는 사람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
그들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그들의 소망을 이어줄 수 있었다.
그때 내 마음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더니 내 몸으로 감사의 빛이 흘러들어왔다.
그 빛을 볼 수 있는 건 나와 산타뿐.
순간 나는 산타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린다.
“견습 산타의 지위를 건 경합에서 승리한 자는 한정우다. 그러니 그의 견습 산타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며 더 이상 그의 자질에 대한 그 어떤 의심도 허하지 않는 바이다. 축하한다. 한정우.”
우 실장님을 비롯해 크루소 회장, 엘리자베스, 심지어 백아영 이진학 부부도 나를 향해 손뼉을 쳐주었지만, 나는 아직 그 상황을 즐기지 못했다.
나는 그 감사의 빛이 누구 것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어! 정우 님!”
뒤에서 나를 부르는 우 실장님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나는 얼른 계단을 타고 2층으로 향한다.
백현석 이사장님은 선열에 오르기 위해 소망을 이뤘다.
그 말은 즉 소망을 이룬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2층에 도착하고 문 앞에 섰을 때 안에서부터 서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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