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콘이 내 경기를 중계해?

나는 게임이 끝난 날 저녁 LA의 어느 한인식당에서 하성 선배를 만났다.
예약은 하성 선배가 했지만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하성 선배가 조금 늦게 들어왔다.
“오, 인성아 오래 기다렸어?”
목소리는 쾌활했지만 그는 어딘가 피로에 지쳐 보였다.
“아뇨, 금방 왔어요. 그런데 형은 조금 지쳐 보이네요.”
“말도 마라. 너무 힘들어. 메이저리그라는 게 정말 만만치 않아. 우선 제일 힘든 게 뭔지 알아? 시차야 시차.”
“시차요?”
“그래. 너도 경험해 봤는지 모르겠지만 서부에서 동부로 또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면 시차가 적응이 안돼”
“그럴 거 같애요”
“더구나 동부에서 낮 경기가 있는 날은 마치 자다가 일어나서 시합하는 느낌이야. 컨디션이 영 안 올라와.”
나는 아직 선수들을 따라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실감은 안나지만 실제로 겪어 보면 충분히 그럴 것 같았다.
“게다가 형은 풀타임 유격수잖아요. 유격수 포지션이 다른 포지션보다 더 힘들잖아요.”
“그렇기도 하지. 그래서 요새 실수도 많이 저질러. 오늘도 공 잡았다 놓치는 바람에 두 점 실점했잖아. 눈 앞이 캄캄해 질만큼 창피하더라.”
“그래도 형이 유격수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샌디에고 내야가 탄탄한 거 아녜요?”
“그럴까?”
나는 배고프니까 우선 음식부터 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래, 이 집이 고기가 맛있어 너 먹고 싶은 거 많이 먹어. 여기서 류현진 선배하고도 밥을 먹은 적 있어.”
나는 갈비와 불고기를 3인분씩 시켰다.
매일 미국식 스테이크만 먹다 보니까 한국식 양념 고기가 먹고 싶었다.
“요즘 다저스는 투수들이 줄줄이 부상이라 힘들겠다.”
“맞아요. 벌써 11명이나 부상자 명단에 올랐어요. 로버츠 감독이 죽을 맛이겠죠.”
“그래도 이 정도 끌고 가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해. 샌디에고도 투수진 때문에 고민이 많지만 다저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
“다르빗슈는 언제 돌아온대요?”
“몰라. 개인사정이 있나봐. 연봉도 안 받고 이탈해 있어. 하지만 곧 돌아온다는 말도 있어.”
“샌디에고가 벌써 두 게임 차로 추격해 왔어요.”
“응, 선수들 사기가 많이 올라가 있어. 나만 더 잘하면 더 높이 올라갈 텐데 요즘 들어 잘 맞질 않아.”
“아녜요. 보니까 정타로 잘 맞히시던데 그렇게 하다보면 안타가 나오는 거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시즌 내내 잘 안돼. 이번 시즌 끝나면 FA인데 성적이 더 잘 나와야 대박이 나지 않겠냐?”
“그건 그렇죠. 잘 되실 거예요.”
“너 내일 선발로 나서지? 좋은 공 좀 줘봐.”
우리는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하성 선배는 타율이 잘 오르지 않는다.
2할 3푼을 넘어서는가 하면 어느 새 다시 2할 2푼대로 가라앉고 계속 그 구간을 반복하고 있다.
홈런도 벌써 50게임 가까이 나오지 않고 있다.
오늘도 담장을 가까스로 넘기긴 했는데 비디오 판독 결과 담장 안쪽을 먼저 맞고 야수의 글러브를 맞은 다음 넘어갔다고 해서 2루타로 판정을 받았다.
“오늘 고기 많이 드시고 내일부터 펑펑 홈런을 치세요.”
“나도 그러면 좋겠다.”
얘기하는 동안 음식이 나와 우리의 이야기는 잠시 끊겼다.
하성 선배도 나도 오랜 만에 한국식 양념 고기를 실컷 먹었다.
“오늘 정말 잘 먹었어요.”
“고기 먹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 LA까지 운전해서 두 시간이면 가니까 아무 때고 만나자고.”
“저 근데 솔직히 계속 메이저리그에 있을지 확신이 안 들어요. 저 같은 신인은 한 경기만 삐끗해도 바로 마이너행 아닌가요?”
“그렇기도 하지만 넌 다저스에서 전략적으로 키우는 선수 아니냐? 그러니까 한 경기 잘못 던졌다고 바로 내리지는 않을 거야. 그것보다도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해. 아무도 내 공 못 친다. 이런 자신감으로 던지면 대성할 수 있어. 솔직히 메이저에서도 너만큼 던지는 투수 별로 없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너무 잘 먹고 즐거웠어요.”
“그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아무 때나 연락해.”
나는 그렇게 하성 선배와 헤어졌다.
별다른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는데 가슴 속에 맺혀 있던 답답함이 많이 풀린 것 같았다.
외국 선수들과 안 되는 영어로 더듬거리다가 오랜 만에 모국어로 속 시원하게 말을 해서 그런지 가슴이 시원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일 있을 선발 등판도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내일 나의 선발 경기는 ESPN을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될 예정이다.
다시 말해 잘 던지면 전국구 스타가 되겠지만 못 던지면 전국적으로 망신살이 뻗치는 거다.
‘하, 오늘 밤도 잠은 다 잤는 걸...’
나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
다음 날 다저스 스타디움에는 5만명이 넘는 관중들이 들어찼다.
ESPN의 아나운서 칼 라베크와 해설자 데이빗 콘이 중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데이빗 콘은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한 때 메이저리그를 평정했던 뉴욕 메츠 소속의 투수였다.
선수 시절 약간의 기행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었지만 투구 하나만큼은 정말 뛰어났다.
통산 18시즌 동안 194승 126패 3.4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메이저리그에서 16번째로 퍼펙트 게임도 달성한 바 있는 명투수다.
1988년 뒤늦게 선발로테이션에 합류해서 231.1이닝 20승 3패 ERA 2.22 213K를 잡아내는 기염을 토해 소속팀 뉴욕 메츠를 내셔널리그 챔피언 결정전에까지 올렸지만 하필 그 해 다저스에는 오렐 허사이져가 버티고 있어 팀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탈락했다.
88년엔 커크 깁슨의 극적인 홈런에 힘입어 비록 다저스가 우승했으나 당시 메츠에는 데이빗 콘을 비롯해 드와이트 구든, 론 달링 등 쟁쟁한 투수들이 즐비했다.
그 전설 속의 데이빗 콘이 지금 내 경기의 해설을 맡고 있다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들 말고 ESPN의 다른 리포터들도 양팀 덕아웃을 바쁘게 방문하며 사전 인터뷰를 따기에 열중했다.
경기장에는 얼핏 봐도 20대가 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선수들의 플레이 바이 플레이를 놓치지 않고 화면에 담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샌디에고에서는 매니 마차도가 헤드셋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있었고 우리 팀에서는 대이빗 로버츠 감독이 방송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었는데 기분 탓이라 그런지 오늘은 왠지 컨디션이 좋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을 다 풀고 덕아웃으로 들어오자 포수 윌 스미스가 오늘의 사인을 확인해 주었다.
이제 곧 플레이 볼.
우리 팀이 홈팀이라 먼저 수비에 나섰다.
로버츠 감독이 나를 부르더니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 던지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릴랙스, 오케이?”
“오케이”
나는 천천히 글러브를 챙겨 마운드로 향했다.
오늘은 ESPN의 중계일이므로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나의 피칭 내용을 객관적으로 들어보도록 하자.
“네 다저스의 신인 투수 인성 장 선수가 마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습니다. 저 선수는 다 아시다시피 흥미롭게도 양손을 다 쓰는 투수입니다. 처음에는 오른손으로 던지는 공의 구속이 더 빨랐지만 요즈음에는 왼손으로 던지는 구속도 오른손 구속 못지않게 나온답니다. 기대가 되네요.”
“오늘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는 한 선수가 글러브를 번갈아 갈아 끼면서 왼손 오른손으로 던지는 진풍경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말씀 드리는 순간 샌디에고의 1번 타자 아라에즈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현재 .308의 타율로 리그 1위에 올라섰고요. 매우 정교한 타자입니다. 좀처럼 삼진도 당하지 않죠?”
“네, 어떻게든 맞추고 나가는 선수입니다. 맞추는 능력이 대단합니다.”
“저거 보세요. 왼손타자 아라에즈가 나오니까 글러브를 바꾸어 끼고 왼손으로 던질 준비를 하네요. 왼손 대 왼손. 흥미로운 대결이 될 것 같습니다.”
“말로만 듣던 스위치 피처를 직접 보네요.”
“제1구는 볼입니다. 96마일의 패스트 볼이 타자의 몸쪽을 파고들었습니다.
2구는 스트라익. 슬라이더가 예리하네요.”
“네, 바깥 쪽 코너를 낮게 찌르는 멋진 슬라이더였습니다. 공의 움직임이 아주 좋네요.”
“3구를 준비하고 있는 인성. 3구를 던졌습니다. 쳤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유격수 땅볼. 다저스 유격수 로하스가 1루에 송구해 아라에즈를 아웃시킵니다. 어려운 타자를 잘 잡았어요.”
“네, 이번 공은 투심 패스트볼 같은 움직임을 보였어요. 공의 움직임이 아주 좋았습니다.”
“2번 타자 프로파는 스위치 타자입니다. 스위치 타자와 스위치 피처의 대결이네요. 프로파가 어느 쪽 타석에 설까요? 네, 왼쪽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인성도 왼손으로 던져야겠죠?”
“네, 어떤 공으로 프로파를 요리할까요? 초구는 슬라이더가 들어왔네요. 볼입니다. 그런데 슬라이더의 움직임이 마치 스플리터처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각도가 큽니다. 독특하네요.”
“네, 인성 선수 2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2구는 빠른 볼로 스트라익을 잡았습니다. 96마일이 나왔죠?”
“왼손투수 96마일이면 오른손 투수로 치면 거의 100마일 던지는 느낌일 거예요.”
“그동안 만년 유망주 소리만 듣다가 올 시즌 드디어 꽃을 피운 주릭슨 프로파. 이번엔 어떤 공이 들어올까요? 아, 헛스윙입니다. 저거 무슨 구종이었죠?”
“스플리터군요. 떨어지는 각이 상당히 큰데요. 타자들이 애를 먹을 것 같아요.”
“제구도 좋아요. 리플레이를 보면 저기까지는 마치 스트라익 같죠? 그러다가 뚝 떨어집니다. 일종의 마구네요. 네, 4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입니다. 볼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익입니다. 이번 공은 노려봐야겠네요.”
“네 아마도 빠른 공을 던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까 빠른 공이 왔을 때 타자가 지켜만 보고 있었거든요.”
“네, 말씀하신대로 빠른 공입니다. 또 한번 헛스윙. 투 앤드 투가 됐습니다.”
“5구도 맞춰보실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인성 선수가 워낙 다양한 공을 던질 수 있어서 예측하기 힘든데요.”
“5구. 어허. 전혀 예상치 못한 공이 들어왔습니다. 프로파도 헛웃음을 짓고 타석에서 물러납니다. 삼진 아웃.”
“너클볼이네요. 와우. 너클볼을 저 정도 제구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저 선수 이제 19살입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 왔죠. 다저스는 보물을 하나 건진 거 같습니다. 전혀 어린 선수 같지가 않아요. 침착하고 제구도 예술이에요.”
“저는 19살 때 뭐했을까요?”
“콘씨는 그 때 풋볼하고 농구하셨잖아요. 어릴 때부터 만능 스포츠맨으로 유명하셨던데.”
“네, 제가 다닌 학교에 야구부가 없어서 그 땐 야구를 못했습니다. 하하하”
“타석에 크로넨워스가 나왔습니다. 이 선수 역시 왼손타자입니다. 수비도 견고하고 타격도 훌륭한, 말하자면 샌디에고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영웅입니다.”
“맞아요. 찬스 때 주자를 불러 들이는 클러치 능력도 아주 좋아요.”
“인성 1구를 준비합니다. 바깥 쪽 직구입니다. 크로넨워스가 그냥 보내네요.”
“샌디에고 선수들은 변화구를 노리고 들어온 느낌이예요. 직구에는 웬만해서 손이 나가지 않습니다.”
“제2구. 오호. 이번엔 몸쪽 직구를 찔러 넣었군요. 97마일이 찍혔습니다. 몸쪽 바깥쪽 제구가 정말 좋네요.”
“저 선수 원래 왼손투수였나요? 스위치 투수라는 걸 믿을 수 없네요. 빨리 오른손으로 던지는 모습도 보고 싶어요.”
“크로넨워스가 벌써 투 스트라익 노 볼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이제 떨어지는 공에 손이 나가면 안 되겠죠?”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지면 타자가 아마 따라나올 겁니다.”
“제3구 스윙 스트라익 아웃입니다. 역시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슬라이더로 크로넨워스를 잡아냅니다. 1회를 깔끔하게 마치는 인성 선수입니다.”
“네, 1회에 어려움을 겪는 투수들이 많은데 저 선수는 그렇지 않군요. 볼수록 괜찮은 투수같습니다.”
“네, 저희들은 잠시 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1회 투구를 마치고 덕아웃으로 들어가자 로버츠 감독과 프라이어 투수 코치가 내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잘 던졌어. 멋졌어.”
내 공을 받아주던 윌 스미스 포수도 한마디 거들었다.
“오늘 무슨 일 낼 것 같은데 인성.”
’그래 일 낼 수 있으면 일 내보자‘
나는 속으로 다짐하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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